013화. 보답(1)
13화. 보답(1)
종남파의 접객당.
재경각 각주인 청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진희원의 모습에 문득,
과거의 어느 날이 생각난 것이다.
대략 사십 년 전이던가.
사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사이지만, 약왕은 원래 종남파의 도사였다.
정확히는 청진의 사질이었다.
‘굉장히 밝고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지.’
그런데 사십 년 전 어느 날,
그는 우연한 사고로 단전을 잃었고.
무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만의 도(道)를 찾겠다며, 산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결국 목적한 바를 이룬 것인지, 약왕이란 별호를 얻었더랬다.
청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의 진희원을 봤다.
“장례는 잘 치렀느냐.”
“···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젠 죽었다고 한다.
딱 종남파를 떠날 때의 자기만한 아이를 남겨두고.
듣기론 실족사라나.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니에요.”
진희원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애도의 시간이 흐른 뒤,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주로 생전의 약왕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창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청진이 이윽고 말했다.
“너는 내게 가족과 다름이 없으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
진희원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가고.
잠시 머뭇거리던 진희원이 말했다.
“···그럼 혹시 제 동생을 맡아주실 수 있으세요?”
“동생?”
“네, 아직 어려서 부모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아서요.”
듣기론 어미도 진즉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한 것에 대한 답변인 것 같았다.
청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부탁이었다.
아버지를 잃자마자, 종남파로 찾아온 것 아닌가.
아마 그들을 보호해줄 그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 알겠다.”
다만.
“그런데 너는 어쩔 생각이냐.”
말이 조금 의아했다.
동생을 부탁한다니.
본인은 나름의 뜻이 있다는 말일까.
잠시 머뭇거리던 진희원이 말했다.
“저는 아버지의 유지를 잇고 싶어서요.”
“유지?”
“네, 저도 아버지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약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거든요.”
말을 하는 진희원의 눈빛이 단호했다.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보이는 단호함이었다.
청진은 문득 그녀의 등 뒤로 그의 사질이 겹쳐보였다.
‘그때 그 아이가 종남을 떠날 때에도 이 아이와 비슷한 눈빛을 했었지.’
부녀지간은 부녀지간이란 것일까.
이윽고 진희원이 그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을 하나만 더 드려도 될까요?”
청진의 입가에 저도 몰래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래. 말해보아라.”
한껏 너그러워진 표정의 청진을 향해, 진희원은 한 차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혹 종남산에 있는 약초들을 이용해도 괜찮을까요?”
“약초를?”
“네, 아버지께서 생전에 매진하시던 일이 하나 있는데, 그걸 제가 완성하고 싶어서요.”
“···그게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영약이에요. 아버지께서 생전에 만드시던 영약이요.”
***
금태산의 왼손이 갈고리처럼 할퀴어왔다.
슈욱-
종남신성 운공은 잠영보(潛影步)를 펼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추듯, 절제되고 현묘한 움직임.
금태산은 이번엔 목검을 쥔 오른손을 쭉 뻗어 바닥을 긁었다.
스윽-
그런데 하필, 그곳이 운공이 다음으로 발을 가져다 대려 했던 위치였다.
운공은 급하게 방향을 틀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콰아앙-
벼락이 치는 소리가 울리며, 땅에서 모래먼지가 일어났다.
진천공(振天功)이란 경신법의 묘리였다.
“금형, 손속이 무섭구려.”
말은 이처럼 여유롭게 하지만, 보법이 꼬인 것에 대해 내심 놀라고 있었다.
‘우연이겠지?’
당연히 우연일 테다.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그의 행동이 전부 읽히고 있다는 것일 테니까.
그런 일은 종남파의 장문인도 못 하는 일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금태산은 어느새 다시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뚜벅뚜벅.
운공은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특별한 보법(步法)도 경신법(輕身法)도 아니었다.
기기묘묘한 발의 움직임도 없었고.
특별히 몸이 가벼워보이지도 않았다.
헌데 왜 이리 무겁게 느껴지는지.
문득 처음 지도 비무를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금태산은 속된 말로 하품이 나올 정도로 움직임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점점 간극을 좁혀오더니, 지금은 내가 도망 다니는 지경이라니.’
처음엔 실력을 숨긴 걸까?
‘허허실실(虛虛實實)이었군.’
나름의 깨달음이었다.
일 장 앞에서 금태산이 우뚝 멈춰 섰다.
꼭 곧 공격을 할 테니,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운공은 저도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슈욱-
순간 공간을 가로지르는 금태산의 날카로운 찌르기.
잠영보를 펼쳐 몸을 공중에 띄우고 한 바퀴 빙글 회전시켰다.
펄럭펄럭.
어느덧 금태산의 등 뒤를 점하는 운공.
헌데.
슈욱-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금태산은 보지도 않고 팔을 휘둘러왔다.
그것도 정확히 명치 한 가운데로.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강하게 바닥을 걷어찼다.
콰아앙-
진천공의 굉음이 종남산에 메아리쳤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가는 금태산의 주먹.
아무리 자신이 이류 수준의 내공밖엔 사용을 안 하고 있다곤 하지만.
‘허허. 이게 말이 되나?’
지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보법과 경신법은 잠영보와 진청공이라는 종남파의 진산절기 아닌가.
장문인의 직전 제자나 되어야 배울 수 고절한 무공.
물론 운공도 종남신성이란 별호를 얻은 뒤에 장문인으로부터 어렵사리 배움을 얻은 무공이었다.
‘꼭 꿈을 꾸는 것 같구나.’
슬슬 이 지도 비무를 신청한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공 사용에 제약을 두었다는 점이 후회가 되었다.
호승심이 끌어 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그런데 그때였다.
‘음? 뭐지?’
문득 금태산 또한 자신처럼 움직임을 멈춘 게 보였다.
한창 공격을 해도 모자랄 판에.
“금형, 왜 그러나. 포기하는 건가?”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더욱이 금태산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절대 포기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공격을 멈춘 것이 의아할 수밖에.
그리고 그때였다.
“운공 사형, 청진 사조께서 찾으십니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의 사제인 운심이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느냐.”
“조금 됐습니다.”
“조금 됐다고?”
“예, 벌써 몇 번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벌어진 운공의 입으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
아무래도 비무에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새삼 금태산을 다시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줄이야.
그때 금태산이 말했다.
“아쉽지만, 비무는 여기서 끝내야 할 테지?”
운공이 금태산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이어서 하지.”
아쉬운 건 운공도 마찬가지였다.
***
청진의 부름에 다시 접객당으로 향하는 길.
나는 괜히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심지어 비장의 수로 남겨둔 비도술도 사용하지 않은 상황 아닌가.
물론 방금 못 다한 결판은 추후 다시 이어서 내기로 했다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나름 깨달음은 얻었으니까, 만족해야 하나.’
그래도 나름 얻은 게 있어 위안을 삼기로 했다.
입가에 저도 몰래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방금 전 운공과 비무를 하며 얻은 보법과 경신법에 대한 깨달음들이 머릿속을 부유했기 때문이다.
운공의 무학을 견식해본 결과.
종남의 무공은 가벼움[輕] 속에 무거움[重]을 담는 무학이었다.
동시에 무거움[重]으로 가벼움[輕]을 표현하는 무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보법과 경신법만 본 것이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지 않는가.
‘패도적인 내공 심법인 천마신공이랑도 잘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니 매우 흡족한 비무였다 하겠다.
물론 방금 본 보법과 경신법을 그대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 보법과 경신법은 종남파의 무공들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들일 터.
일종의 개량이 필요했다.
‘조금 고민해 봐야겠네.’
잡다한 무학이 아닌, 구파일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종남파의 무학이 아닌가.
분명 차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접객당 문 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청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공을 나지막이 꾸짖는 것 같았다.
이에 운공은 죄송하다며 깍듯이 사과를 하더라.
물론 청진도 그저 해본 말인 듯 크게 문제 삼진 않았다.
나는 그 사이, 방금까지 했던 비무에 대한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원래의 목적이었던 표행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어떤 식으로 대화를 풀어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이윽고 청진의 부름이 들려왔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진희원 소저?”
“···안녕하세요.”
내부에는 청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희원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리를 차지고 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 거지?’
표행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줄 알았거늘.
잠시 고민을 했다.
‘설마 논공행상을 하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청진이 분명, 마교도의 습격을 막아내고 그들을 척결한 것에 대해 나름의 보상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사실 이 상황은 달리 말하면, 진희원을 지켜낸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는가.
경우에 따라선 마교도를 척결한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한 것이라 치부될 수도 있었다.
‘···물론 마교도들은 진희원 소저를 직접 노린 건 아닌 걸로 보였지만 말이지.’
그들이 진희원의 존재를 알았다면, 금태천의 표행이 아니라 우리 표행단을 공격했을 테니까.
어쨌든 당장 내가 청진 앞에서 진희원과 함께 자리를 할 일이라고 해봐야 그게 전부였다.
일련의 생각을 마치자, 내심 긴장하고 있던 마음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설마 상을 주는 자리에서 표행 제안을 거절하거나 하진 않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남이 그렇게 경우 없는 문파는 아니라고 들었다.
하물며 아까 이야기를 나눠본 청진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청진의 입이 열렸다.
“우선 이 아이를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와준 것에 대해 한 번 더 감사를 표하겠네.”
시작은 우리 표국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내 자세한 사정을 들었네. 돈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아이들을 자네가 손수 나서서 표물로 받아줬다지?”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구나.
‘착한 일을 해서 복이 온 모양이군.’
잠시 선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대체로 이럴 땐, 돈을 주거나.
무기를 주거나. 영약을 준다고 들었다.
물론 세 가지 다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청진의 입으로부터 기대하던 말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약소하지만 보답을 주려고 하네.”
이윽고 품에서 무언갈 주섬주섬 꺼내는 청진.
나는 기대되는 얼굴로 보답의 정체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