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일석사조
4화. 일석사조
달빛이 아스라이 스며드는 창고 안.
소령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괜찮아. 내가 해결할게.’
방금 전 공자님이 자신을 지나쳐가며 한 말 때문이었다.
이 말을 대체 몇 년 만에 들어보는 것인지.
문득 어릴 적의 공자님이 떠올랐다.
공자님은 어렸을 때 굉장히 주체적인 분이셨다.
금화표국의 현(現) 국주님인 대공자님처럼.
그래서 저런 말도 줄곧 하곤 하셨다.
다만 전임(前任) 국주님 내외께서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 망가지셨다 뿐이지···.
물론 요즘 많은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시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여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헌데 방금은 어릴 적의 영특했던 공자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보였다.
괜히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공자님···.”
이런 모습이라면, 표국 식구들도 다시 공자님에게 믿음을 주실 게 분명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아까부터 어쩐지 얼굴에서 빛이 나시는 것 같더라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본가에서 사람이 온다고 했지?’
소령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얼른 이런 공자님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도 알아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련하니 행복한 상상에 젖어들 때였다.
“너도 이제 철 좀 들어라.”
‘음?’
문득 들려온 공자님의 목소리에 순간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줄 알았다.
“네가 날 죽일 순 있겠냐?”
밖에 있는 사람은 분명 공자님과 흑구인데?
소령의 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흑구는 공자님의 친우들 중에서도 특히나 불량한 놈.
심지어 무공을 익혔고···.
‘그냥 술 안 마신단 이야기만 하시려는 줄 알았는데···.’
소령의 눈이 부릅떠졌다.
재빨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병상에 누워계셨던 공자님의 모습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공자님!”
***
예전부터 나는 이런 말을 참 좋아했다.
일석이조(一石二鳥).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마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대문 앞에서 건들거리는 흑구를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먼저 든 것은.
‘과거의 은원을 정리할 겸, 새로이 얻은 무공도 시험해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흑구는 기억 속에 있는 여러 악우(惡友)들 중, 드물게 무공을 익힌 사내였다.
하물며 자신을 벗겨먹기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놈이라,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계책을 세웠다.
“흑구,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냐?”
“미친놈. 뭘 잘못 처먹었나. 말투가 왜 그래?”
“죽다 살아났더니, 세상이 좀 달리 보이더라.”
“죽다 살아나긴 뭘 죽다 살아나.”
“정말 몰라서 그래?”
놈은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금화표국의 둘째 공자가 혼절한 일.
이 일대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하물며 혼절을 했던 장소도 놈이 소개한 향락동(享樂洞)이란 매음굴 아니었나.
그러니 놈은 알고도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네.’
순간 왜인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이 몸뚱이의 원 주인이 분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처음 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불쾌하더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또한 화가 치솟고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은 흑구를 진짜 친구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까놓고 보니, 친구가 아니라 기생충이었다.
전생의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식구라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해 천마신교에 납치를 당했던 일.
‘···네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구나.’
결국 지금 느껴지는 분노는 누구의 분노인지 명확치 않았다.
물론 큰 상관은 없었다.
이젠 내가 금태산이고.
금태산이 나이니.
무슨 상관이랴.
“됐고. 얼른 채비하고 나와라.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일관성 있어서 좋네.’
나는 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 이제 술 안 하련다.”
놈은 이내 자지러지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놈은 똥개가 똥을 끊지 네가 술을 끊겠느냐면서 깔깔대더라.
하지만 이후에도 내가 줄곧 태연한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자, 어느덧 웃음을 멈추었다.
“뭐야. 진짜냐?”
“그래.”
“에이 씨. 혹시 너네 표국 요즘 좀 어려워졌다던데. 그거 때문이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망한 거야?”
잠시 대화가 멈췄다.
나는 모르는 주제가 나왔기 때문이고.
흑구는 내심 당황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만약 놈의 말처럼 표국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소령을 통해 이야기가 들어왔을 터.
흑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나는 그 사이, 흑구의 무공 수위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삼류 초입인가?’
호흡이 고른 걸 보니,
불문이나 도가 계열의 심법을 익힌 것 같았다.
도가 계열 특유의 느긋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면, 아마 거의 확실하게 불문 계열일 터.
구결이 고절해보이진 않으니, 어디 흑점(암시장) 같은 데서 우연히 구한 걸 익힌 모양이다.
또 근육의 모양이 제멋대로인 걸로 보아, 무기는 가리지 않는 것 같고···.
그래도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곤봉?
이 밖에도 이런저런 것들을 살폈다.
놈의 행동이 하나하나 추가될 때마다 정보가 누적됐다.
‘딱히 특이한 점은 없는 것 같네?’
과거 매음굴에 살 때 봤던 바람잡이를 하던 놈들과 비슷한 기세였다.
딱 기초까지만 제대로 배우고, 나머지는 되는 대로 막 익힌 모양새.
물론 체격은 좋아, 맷집 하나만큼은 훌륭해보였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수련용으로 쓰기 제격이겠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때리는 맛이 참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도발 수위를 조금 높여볼까?’
“흑구야.”
“왜?”
“너도 이제 철 좀 들어라.”
흑구가 나를 노려본다.
“미친놈. 네가 죽고 싶은 거지?”
나는 그런 흑구를 향해 말했다.
“네가 날 죽일 순 있겠냐?”
“네가 진짜 미쳤구나?”
“그래도 너 같은 기생충만 하겠냐?”
“하! 나 흑구야. 흑구! 한 번만 봐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자.”
놈의 표정으로 보아, 이제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겁나냐?”
흑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흑구가 허리춤에서 곤봉을 꺼내들었다.
나는 그 사이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군.’
모든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갔다.
애초에 흑구와 같은 놈들의 생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강자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굽실거리면서, 약자한텐 지독하리만큼 강한 척을 하는 놈들이지.’
흔히 세상은 이런 자들을 흑도 왈패라고 이야기한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핍박하여 그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놈들.
그리고 그런 놈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주변에 공포감을 조성하는 일.
그래서 놈들에겐 약자 앞에서의 자존심이 무척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상황에서라면 놈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비록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나는 일대를 주름잡는 금화표국의 직계이니까.
매음굴에 자발적으로 걸어가 술과 약을 하다, 혼절을 한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그러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발을 했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대중들 앞에서 싸워야할 구실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나와의 대화로 인해, 작금의 상황은 놈에게 단순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이젠 밥줄이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는 순간, 놈은 내게 겁먹은 꼴이 될 테니까.
‘거기다가 내가 유명한 호구인 것도 한 몫 하겠지.’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라 하겠다.
물론 이런 게 아니어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긴 했다.
흑구와의 관계정리.
방금 체득한 무학들을 시험해보는 것.
이것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사람을 향한 일종의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막 흑구를 향해 덤비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공자님!”
소령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소령은 당최 작금의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이해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피식 웃으며 소령을 향해 눈앞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려 할 때였다.
문득 소령이 흑구를 향해 획 몸을 돌리더니 선수를 쳤다.
“흐, 흑구 네 이놈! 감히 우리 공자님한테.”
‘···소령아?’
“다, 당장 안 돌아가면! 크, 큰일 날 줄 알아!”
···아무래도 일이 좀 꼬인 것 같다.
***
“흐아아압!”
“흑구야, 너무 느린 거 아니냐?”
조금 일이 꼬였지만, 문제없었다.
내겐 그걸 해결할 힘이 있었으니까.
소령의 앞을 막아선 채, 흑구를 향해 비웃음을 흘려주는 걸로 충분했다.
소령에게 향할 분노를 내게 돌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령이 그때 등장을 한 것은 오히려 내게 복(福)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비를 보호하는 늠름한 모습에, 주변에서 온갖 호의적인 시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일석이조를 노렸는데, 이러면 일석삼조인 건가?’
소령에게 고마워할 일이었다.
흑구의 곤봉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붕-
나는 고개를 숙여 피한 다음,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허리를 돌리며 놈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 주먹을 뻗었다.
쩍!
이 모든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절반쯤 성공한 환골탈태 덕분이리라.
흑구가 이내 코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타격감이 좋은 걸 보니, 코뼈가 뭉개졌으리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수라파천권도 쓸 만한데?’
아수라파천권(阿修羅破天拳).
권법에 화기(火氣)를 싣는 천마의 무공 중 하나.
이 또한 천마신공과 더불어 강불해가 내게 분석을 요청했던 무공 중 하나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강권(强拳)에 해당하는 권법으로 연계를 노리기보단, 일격필살의 성격이 짙은 무공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천마신교의 무공임에도 외부로 마기(魔氣)가 노출되지 않는 무공이고.’
앞으로 내가 종종 사용할 무공이라고 보면 되겠다.
비록 현재는 내공이 부족해 총 3개의 초식 중 하나도 제대로 시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만큼 고강한 무공이었다.
물론 빛이 있는 곳엔 항상 그림자가 존재하듯. 이 무공도 단점은 존재했다.
고개를 내려 흑구의 코를 때린 주먹을 봤다.
어느새 새빨갛게 변한 자신의 주먹.
강권의 숙명과 같은 단점이었다.
상대에게 전해지는 충격량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
···물론 내겐 큰 의미가 없는 단점이었지만.
‘일단동체와 금귀방탄공의 조화도 쓸 만하군.’
곧 주먹의 색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금귀방탄공이 일단동체의 도움을 받아, 붉게 변한 주먹을 회복시킨 것이었다.
일단동체란 단전과 몸이 하나란 의미.
금귀방탄공의 요상결이 몸 곳곳에 퍼져있단 뜻이었다.
이는 신체의 어느 곳에서건, 즉각적으로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단 말이었고.
한 마디로 나는 아수라파천권의 장점만 취할 수 있다는 것.
결국 나만큼 이 무공에 적합한 사람은 또 없을 것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뭐, 애초에 천마의 무공이니, 익히는 사람도 몇 없을 것이긴 했다.
물끄러미 쓰러져 있는 흑구를 봤다.
‘완전 대자[大]로 뻗었네.’
심지어 실금도 한 것 같다.
오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일석이조를 노렸는데.
소령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 일석삼조를 이루었으니.
이보다 좋은 결과도 없을 테다.
‘아니, 흑구가 일자리를 잃게 생겼으니, 일석사조(一石四鳥)인가?’
빳빳하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구경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평소 이 몸을 막대하던 몇몇 사람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다른 몇몇은 감탄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금화표국의 미래가 다시 밝아질 것 같다는 말도 종종 들려왔다.
이윽고 나는 쓰러져 있는 흑구를 일별하곤 몸을 돌렸다.
“소령아, 사람들 불러서 저놈 저거 치워라. 냄새난다.”
“네! 공자님.”
그날 그렇게 많은 것이 바뀌었다.
***
다음 날.
“태산아, 너 괜찮은 거 맞냐?”
“네가 흑구 때려눕혔다며. 동네에 소문 쫙 났어.”
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있는 안가로 찾아왔다.
덕분에 이 몸에게도 진실한 친구가 몇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렸을 때 어울렸던 이들이 그랬다.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나 멀쩡하니까.”
물론 개들 중엔 종종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건네는 이들도 있긴 했다.
“근데 너 흑구한테 이길 정도면, 이제 동생한텐 안 맞겠네?”
동생한테 안 맞을 거라니.
“아니야. 얘 동생 얼마 전에 영약 구했다던데? 예전보다 더 강해졌을 걸?”
“그래? 그럼 태산이 큰일 난 거 아니냐?”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보니까. 종종 맞았던 것 같네.’
어째 이 놈의 몸뚱아리는 까도 까도 흑역사가 나오는 것 같다.
절레절레.
하지만 어쩔쏘냐.
이제 이게 난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나하나 바꿔 가면 될 터였다.
바꿔 가는 재미도 나름 쏠쏠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얘들아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웬 일이냐? 네가 술이 아니라 밥을 먹자고 하고?”
“태산이 진짜 철들었나 보네.”
돌아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
괜히 눈이 침침했다.
노을에 비친 그들의 뒷모습이 후련해 보이는 건, 내 감정이 투영된 탓일까?
모르겠다.
흑구와의 일이 있은 지, 보름 후.
내가 머물고 있는 금화표국의 안가로 형님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다.
“공자님, 국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금화표국의 본부로 찾아갈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