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9
귀환 마교관
669화(외전 42)
푸욱!
“커억!”
아들러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심장을 뚫은 베르타스를 보았다.
베르타스의 검신이 검붉게 변했다가 은빛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자신의 피를 흡수해 가는 것이다.
“크읍…! 으아아악!”
아들러가 비명을 내지르며 성큼 물러났다.
구멍이 뚫린 아들러의 가슴에서 피와 검은 연기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크으읍!”
한쪽 무릎을 꿇은 아들러가 입을 벌리고는 숨을 헐떡였다.
“이런 빌어먹을! 이 계집년이…!”
쒸에에엑!
사비란은 더 이상 그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서컥!
매섭게 날아든 베르타스가 순식간에 아들러의 목을 베어냈다.
툭, 데굴데굴…!
잘려 나간 아들러의 머리가 한참을 구르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사비란이 몸뚱이만 남은 아들러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추잡하게 생긴 게 내뱉는 말도 더러워.”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선 그녀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
그녀가 베르타스를 번쩍 들어 올리고 외쳤다.
“마족을 죽였다!”
순간 마계수 근처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그런 한편 무아지경으로 싸우던 적들은 거짓말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시체였던 것들은 그대로 쓰러지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살아 있던 자들은 힘을 잃고 멸마궁 무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어 갔다.
사비란 역시 베르타스를 들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남은 적들을 야멸차게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쉬커커커컥!
“크아악!”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아들러의 존재가 이들에게 모종의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듯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한쪽 숲에서 무랑이 호신위들과 함께 나타났다.
“란아, 물러나라. 우선 저 마계수부터 막아야 한다.”
“네, 할아버지!”
사비란은 무랑을 평소처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무랑이 무랑전 제자들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백화단과 멸마궁 무인들은 아직도 대항하는 적들을 처리해 갔다.
대략의 진법이 형성되고 나자, 무랑이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이 땅에 다시는 그때와 같은 재앙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무랑전 도사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술을 읊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무랑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휙 날려서는 마계수에 쌍장을 날렸다.
콰과앙!
폭음과 함께 마계수가 흔들렸다.
마치 고통이라도 느끼는 듯 마계수는 연신 꿈틀거렸다.
이윽고 나무 기둥 중간에서 줄기가 자라나오면서 무랑의 두 손을 휘어 감기 시작했다.
“크읍!”
무랑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가 다시 한 번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여어업!”
꾸물꾸물!
구구구궁!
마계수가 연신 꿈틀거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꾸아아아앙!
마계수가 마치 비명을 터뜨리는 듯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기둥 복판에 악마 얼굴이 부조처럼 드러났다.
순간 무랑이 버럭 외쳤다.
“란아! 지금이다! 베르타스로 이 녀석을 찔러라!”
“네, 할아버지!”
타닷!
사비란이 빛살처럼 몸을 날려 베르타스를 내질렀다.
“하아앗!”
콰직!
뀌아아아아앙!
마계수가 꿈틀거리며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뒤늦게 내공을 끌어올린 몇몇 무인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솨솨솨솨솨아….!
마계수의 기둥을 따라 솟구쳐 오르던 모종의 기운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악마의 얼굴을 절반쯤 드러냈던 마계수 역시 껍데기가 허물어지면서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늘로 쏘아지는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하늘에 구멍을 뚫어 버릴 듯 붉은빛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바닥에 착지한 사비란이 무랑에게 물었다.
“이걸로 끝난 건가요?”
하지만 무랑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아니.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이대로는 문이 열리고 말겠다.”
“그럼, 어떻게 하죠?”
“저 빛을 막아야 하는데….”
“베르타스로 막아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무랑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베르타스는 피를 흡수할 뿐, 마나를 흡수하는 건 아니지. 기본적으로 마계수는 마나의 기운을 원천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들이 마공석을 그렇게 모았던 것이고. 거기에 제물까지 더해지면 차원의 문이 열리는 건 순식간이지.”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건 저 문이 열릴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때였다.
“제가 막아 볼게요.”
여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스쳤다.
사비란과 무랑이 동시에 돌아보니, 옹수령이 그곳에 두 손을 꼭 모아 쥐고는 서 있었다.
무랑이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일전에 진백과 함께 그녀의 몸을 치료한 적이 있었기에.
“너는… 옹기승의 딸이 아니더냐?”
“맞아요, 어르신. 저라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막는다는 말이냐?”
“제 몸으로 직접 막아 보려고요. 어르신이 그러셨죠. 저는 체질상 평생 마나를 흡수해 줘야만 한다고요. 하지만 지금 저 기운을 제 몸에 전부 갈무리 할 수 있다면….”
“안 된다! 네 몸이 버텨 내지 못할 게다.”
“확실한가요?”
옹수령이 무랑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랑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확실하진 않다. 네 체질의 특성상 내공이 계속해서 마나를 삼켜 갈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네 몸에서 중화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환골탈태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엇이든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법. 그 결과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부정적인 요소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나쁜 결과는….”
옹수령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거죠.”
그녀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옹수령이 다시 한 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할 수 있어요. 버텨 볼게요. 어차피 이제 마공석도 없잖아요? 이대로 살아가더라도 고통의 연속일 거예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죠. 그러니… 어쩌면 제게는 기회일지도 모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습니다.”
무랑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뱉는 옹수령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실소를 머금었다.
“허참, 언제 이리 컸누? 너는 네 부모와 꼭 닮았구나.”
그러고 보면 세월이 참 빠르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어눌한 발음으로 할아버지를 찾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녕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의미 없는 질문이라 여기면서도 무랑은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았다.
“네,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
사비란이 무랑을 보았다.
무랑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령아의 말대로 해보자꾸나.”
“어떻게 하면 되죠?”
“말 그대로 저 빛을 령아의 몸으로 막아야 한다.”
사비란이 옹수령에게 물었다.
“혹시 경공 사용할 수 있어?”
“죄송해요.”
옹수령이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무성!”
그녀의 부름에 곡무성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단주님!”
“전에 했던 것 한 번 더 해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에 했던 것’이란, 사비란을 절벽 위로 던져 올린 것을 말했다.
사비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옹수령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꽉 잡아. 이제 하늘을 날게 될 테니까.”
“네!”
옹수령이 사비란의 팔을 꽉 붙들었다.
“간다!”
말을 마친 사비란이 곧장 경공을 펼치면서 도움닫기를 시도했다.
“오십쇼!”
곡무성이 우렁차게 외쳤다.
마침내, 사비란이 곡무성의 손을 밟는 순간.
“으라차차!”
곡무성이 요란한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두 사람을 번쩍 들어 던져 올렸다.
쑤아아앙!
쏜살같이 날아간 사비란이 플라이 마법과 경공을 동시에 펼치면서 마계수 꼭대기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옹수령의 손을 놓아 주었다.
손을 놓는 순간,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 짧은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반드시 버텨서 나와 함께 강호를 유랑하자.’
‘네, 언니!’
마침내 옹수령의 전신이 붉은빛 기둥으로 삼켜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
붉은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옹수령은 그 상태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한편, 사비란은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휘리릭, 탁!
이제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마계수가 쏘아올린 붉은빛 기둥과 그 복판에서 온몸으로 빛을 받아내는 옹수령.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옹수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빛이 터뜨리는 소리가 너무 컸기에 옹수령이 비명을 지르는지, 신음을 흘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이 절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했다.
마계수가 쏘아올린 빛은 옹수령의 몸에 작렬하면서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대신 강맹한 기운이 주변으로 자욱하게 흩어지면서 짙은 노을이 낀 것만 같았다.
쏴아아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이 솟아오를 것만 같던 붉은빛 기둥도 서서히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하늘에 잔뜩 모여 있던 먹구름 역시 천천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사비란을 비롯한 무인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마계수의 힘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마지막 빛줄기가 쏘아졌을 때.
파짓! 파지짓!
마계수 꼭대기에서 파장이 일어나더니 빛기둥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길 반복했다.
사람들의 표정에 환희가 드러났다.
“막, 막은 건가?”
“엇! 저기!”
누군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빛이 사라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옹수령이 있었다.
그녀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령아!”
사비란이 얼른 경공을 펼쳐 날아올랐다.
그녀는 옹수령을 가볍게 받아내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옹수령은 알몸이었다.
칠흑처럼 검었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 있었다.
한데 피부가 백옥처럼 하얬다.
마침 곡무성이 달려와 장삼을 벗어 옹수령의 몸을 덮어 주었다.
무랑 역시 얼른 다가와 맥을 짚었다.
모두가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하다는 말이 나오길.’
‘모든 게 잘 됐다는 말이 나오길!’
마침내.
“다행이다.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흐른 것 같다.”
“아아!”
사비란이 가장 먼저 안도의 탄성을 터뜨렸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곡무성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옹 소저! 정말 고생하셨소. 고맙소. 이번엔 당신이 강호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소.”
옹수령이 가까스로 눈을 뜨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제가… 솟아날 구멍이 된 거네요.”
“크흡! 물론이오! 물론이오!”
무랑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떠냐?”
“좀 지친 느낌이지만… 몸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아요.”
“다행이다. 아무래도 네 체질이 개선된 것 같다.”
“아아, 정말요? 부모님과 숙부가…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옹수령은 그 말을 끝으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무랑이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 이 와중에도 부모와 숙부부터 생각하느냐?”
한편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마계수는 이제 천천히 잿더미처럼 부서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을 온통 거뭇하게 물들였던 기운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죽어 가던 풀잎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바짝 말랐던 고목이 차츰 수분을 되찾아 갔다.
그렇게 숲이 점차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위의 검은 웅덩이.
그곳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잠시 후 검은 웅덩이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꾸물럭…!
웅덩이 표면에서 뭔가가 불쑥 올라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차츰 사람의 외형을 갖춰 갔는데, 바로 아들러였다.
다소 수척해진 모습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그였다.
그가 절벽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쯧… 실패인가…? 뭐, 서두를 필요는 없지.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오랜만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
아들러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단정한 차림에 반듯한 외모의 사내.
아들러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비강…!”
“네가 살아 있을 줄 알았지. 너는 쉽게 죽는 녀석이 아니니까.”
아들러의 표정에 처음으로 공포가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 알 텐데. 마계가 아닌 이상에야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불사의 악신에게 축복을 받은 몸. 마왕을 만든 것도 나란 사실도 너는 잘 알 테지.”
“알다마다. 그래서 죽일 생각은 없어.”
“뭐? 그럼….”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오래전에 너와 비슷한 노파가 있었지. 죽여도, 죽여도 자꾸 살아나더군. 그래서 죽이길 포기했지. 대신 가둬놓기로 했다.”
“무슨…!”
“가서 만나면 둘이 영원히 싸워 봐. 누가 이길지 나도 궁금해지는군.”
말을 마친 사비강이 한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쉬쉬쉬쉬쉭!
공간이 수십 개로 쪼개졌다.
말 그대로 공간에 빗금이 그어지면서 그대로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공간은 그대로였다.
대신 아들러의 전신이 조각조각 썰린 채로 갈라졌다.
“어…!”
아들러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조각조각 부서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만해경의 경지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뒤늦게 깨달았다.
사비강이 품에서 라겔의 주머니를 꺼내고는 주둥이를 열었다.
다음 순간, 조각조각 나눠진 아들러의 파편이 라겔의 주머니로 휙휙 날아들었다.
주머니 입구를 봉한 사비강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와 딸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나? 어림없지.”
말을 마친 그가 라겔의 주머니를 품에 넣고는 절벽 끝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옥처럼 변했던 숲이 봄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봄 속에 자신의 딸과 아끼는 사람들이 어울려 있었다.
사비강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을 해야겠군. 너희들 덕분에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