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8
귀환 마교관
668화(외전 41)
생지옥이 펼쳐졌다.
어쩌면 흑영이 말한 대로 이제부터 제대로 된 지옥이 펼쳐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뱀처럼 생긴 괴물체를 집어삼킨 암천교도들은 놀라울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팔이 잘려 나가도, 다리가 부러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가 잘린 시체마저도 살아서 움직였다.
그야말로 기가 질리는 광경이었다.
그렇잖아도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백화단이었다.
한데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도 않았다.
괴물보다 더 끔찍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무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력의 문제였다.
만약 제때 멸마궁 무인들이 나타나주지 않았더라면, 이 싸움은 정말 위험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백화단이었다.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멸마궁에서 온 은갑대와 금갑대 그리고 섭랑단은 마족대전을 직접 겪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과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들답게 마계수와 암천교도의 괴이한 모습을 보고도 침착하게 싸웠다.
“란아, 괜찮으냐?”
어느새 달려온 염자량이 사비란을 보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정말 제때 와주셨어요.”
“잘 싸워 주었구나. 이 녀석들이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이야.”
염자량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적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삼십여 년 전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많은 강호인들이 목숨을 걸고 희생해서 지켜낸 강호였다.
한데 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이런 짓을 다시 저지른단 말인가?
게다가 차원의 문을 열어 그 악랄한 마족을 다시 부르려고 하다니!
“모두 물러서라!”
순간 염자량이 우렁차게 외치자, 전방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날아올랐다.
염자량의 특기가 무엇인지는 멸마궁 무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백화단도 마찬가지.
아군이 흩어지면서 공간을 확보하자, 염자량이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더니 기합성과 함께 흑패도를 내리쳤다.
“흐아아압!”
꽈르르르릉!
젊은 시절부터 그가 즐겨 사용했던 그라운드 웨이브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벽력풍파도(霹靂風波刀).
그 명칭답게 천둥 울리는 소리가 나면서 땅바닥이 마구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앙!
물결치는 땅과 함께 적들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괴성과 비명이 난무했다.
‘과연 사부님의 벽력풍파도는 언제 봐도 시원시원하네.’
사비란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적어도 그라운드 웨이브를 변형한 벽력풍파도에 한해서는 염자량을 능가할 자가 없으리라.
물론 만해경에 다다른 사비강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한 차례 적을 휩쓸어 버린 염자량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절벽 위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노인의 껍데기를 벗어낸 아들러의 시선과 정확히 마주쳤다.
“아들러!”
그가 막 경공을 펼쳐 날아오르려고 하자.
“사부님! 제게 맡겨 주세요.”
사비란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염자량이 돌아보자, 사비란의 표정이 단호했다.
“괜찮겠느냐?”
“애초에 이번 임무는 저희 백화단이 맡은 겁니다. 제가 마무리하고 싶어요.”
염자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올려 주마.”
그가 흑패도를 척 늘어뜨렸다.
도신의 옆면을 밟아서 튕기듯 올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사비란 역시 그 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라!”
“네!”
사비란이 도움닫기를 하고는 훌쩍 뛰어올라 도신의 옆면을 밟았다.
찰나.
“하아압!”
염자량이 기합성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사비란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사비란은 허공답보를 펼치면서 플라이 마법을 동시에 응용했다.
그녀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순식간에 절벽 위로 솟구쳐 올랐다.
휙!
절벽 위에 있던 아들러는 머리 위까지 솟아 오른 사비란을 올려다보고는 미간을 모았다.
“과연, 너는 그의 딸인가?”
탁!
절벽 끝에 착지한 사비란이 아들러를 빤히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래, 난 아빠의 딸이지. 당신에 대해서는 이따금씩 들었어. 생각보다… 훨씬 못 생겼네.”
사비란의 말에 아들러가 툴툴 웃었다.
“당돌하구나. 당돌해.”
“지금 나에 대한 평가를 할 때가 아닐 텐데. 당신의 목숨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지.”
“후후. 네 어미도 날 죽이지 못했다. 네가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원래 인간은 후세로 갈수록 점점 발전하게 되어 있거든!”
타앗!
사비란의 신형이 눈 깜빡할 사이에 아들러 코앞에 나타났다.
취리리릿!
연검이 꿈틀거리면서 아들러의 목을 베어 갔다.
파바밧!
아들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재빨리 피했다.
취취리리릿!
연검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수십 마리의 독사로 변한 연검이 계속해서 아들러의 요혈을 노려 갔다.
아들러 역시 전신에서 촉수가 자라나오면서 사비란을 공격했다.
따다다다다당!
검기와 촉수가 서로 뒤엉키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싸움.
사비란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여기서 조금만 방심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인이 아닌 것과의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일단 예측이 불가능하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어떤 초식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대응책을 모색하면 길이 보인다.
한 번 당했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기회는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대응책도 세울 수가 없다.
단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날아드는 촉수에서는 초식을 찾을 수 없고, 지면에서 뜬금없이 솟구쳐 오르는 넝쿨들은 감정 없이 움직인다.
그러니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응으로 대응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비란은 확실히 다른 무인들에 비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많은 사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 순간순간의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으로 여러 초식을 변칙적으로 사용했다.
촤촤촤아앗!
날아드는 촉수와 넝쿨을 연검으로 제거한 사비란이 순간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미끄러지듯 멈췄다.
만약 조금만 더 밀렸다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아들러가 툴툴 웃었다.
“과연 후세의 인간은 더 나은 모습이로다. 아마 네 아비도 그 나이 때는 너만큼 못했을 터.”
“이제 제대로 알았나보군.”
“하지만 아이야. 그게 다 누구 덕인지 아느냐?”
사비란이 미간을 찡그리고 노려보자, 아들러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너희가 이만큼 나아졌으리라 생각하느냐? 오히려 퇴보했을 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서 강호를 침략해 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라는 거야?”
“적어도 인정할 건 인정하란 거다. 너희들이 이만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우리 마족 덕분이지 않느냐? 보아라. 저 문이 열리면 너희들은 또 한 번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터. 그 기회를 내가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스스로를 제어할 줄 모른다. 그러니 우리 마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게다가 너희들은 꼴에 희생을 미덕이라고 여기지 않느냐? 내가 너희들을 제물로 삼아 새 시대의 문을 열어 주마.”
“제물…? 그럼 설마 일부러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거야? 제물로 삼기 위해서?”
“당연한 것을. 여긴 하나의 제단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이 이리 쉽게 나를 발견했을까?”
아들러가 이죽거리자, 사비란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너는 날 두 번 기분 나쁘게 만드는군.”
“흐음?”
“먼저 네놈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짓을 마치 우리를 위해 헌신했다는 식으로 포장한 것. 정말이지 형편없을 정도로 비겁한 변명이야. 두 번째로, 넌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 우리를 제물로 이용하려고 한 게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이제 깨닫게 될 거야.”
“맹랑한 것.”
츄리릿!
아들러가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촉수를 날렸다.
사비란이 몸을 비틀면서 피한 다음 아들러의 품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그녀의 검봉이 막 아들러의 심장을 뚫으려는 순간.
피츗! 피츗!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넝쿨 줄기가 오히려 사비란의 가슴을 찔렀다.
따다앙!
한데 금속성이 울리면서 넝쿨 줄기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은빛 비늘 같은 것이 반짝였다.
‘용린갑…!’
아들러가 흠칫거리자, 사비란이 피식 웃었다.
“엄마한테 물려받았지. 그 정도도 예측하지 못했어?”
“어린 것이 세치 혀만 놀려대는구나!”
다음 순간, 또 한 번 아들러의 전신에서 촉수가 마구 뻗어 나왔다.
사비란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촉수를 정신없이 쳐내고 막아냈다.
휘리리리링!
연검이 연신 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를 향해 뻗어 오던 촉수가 강철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따카앙!
“큿!”
검과 촉수가 부딪치면서 강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휘링, 휘링…!
연검이 연신 휘청거렸다.
그 순간 사비란은 연검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서 넝쿨이 쑤욱 자라면서 연검을 휘어 감자.
빠지직…!
연검에 실금이 새겨지더니 이내 와장창 부서졌다.
“큿!”
사비란이 손잡이를 놓고 얼른 물러나자, 아들러가 촉수를 뻗으며 쫓아왔다.
“네 아비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안겨 주마!”
수백 가닥의 촉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서 그녀의 전신을 베어 들어왔다.
그 순간.
쒸이이이잉!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날아들더니.
콰자악!
한 자루의 검이 수십 가닥의 촉수를 단숨에 잘라내면서 바닥에 깊이 꽂히는 게 아닌가?
우우웅…!
바닥에 꽂힌 검이 연신 공명하면서 몸을 떨어댔다.
사비란은 그 검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베르타스…!”
그녀뿐만 아니라, 아들러 역시 베르타스를 알아보고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자가…!’
아들러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비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사비란이 베르타스를 뽑아 들고는 심호흡을 했다.
“후으읍, 후우우!”
과연 베르타스에서 강맹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피를 보고 싶다는 목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그 충동이 어찌나 심한지 자해를 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실제로 그녀는 오 년 전, 베르타스를 잡았다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만약 사비강이 제때에 나서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베르타스를 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로 사비강은 절대로 베르타스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사비강이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사비란은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을.
아빠는 자신이 완전한 위험에 빠지지 않는 이상 나서지 않으리라.
그저 어디에선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시리라.
다시 한 번 깊이 심호흡을 한 사비란이 천천히 눈을 뜨고 눈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아들러를 노려보았다.
“어딜 보는 거야? 한 눈 팔 여유는 없을 텐데.”
아들러가 흠칫거리고는 사비란을 보았다.
그는 베르타스를 든 사비란에게서 사비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비란을 마주한 후 처음으로 공포심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검 하나 바뀌었다고 상황도 변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아들러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열 손가락을 쭉 뻗었다.
츄리리리릿!
손가락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촉수가 되어서 매섭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주변의 땅바닥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넝쿨들이 사비란에게 빠른 속도로 뻗어 왔다.
순간 사비란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뿜었다.
곧이어.
“하아아아앗!”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그녀의 몸이 돌풍처럼 회전했다.
촤촤촤촤촤아악!
그녀를 향해 뻗어 오던 수십 가닥의 촉수와 수백 줄기의 넝쿨이 조각조각 잘려 나가면서 흩어졌다.
“크읍!”
신음을 삼킨 것은 사비란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고 일격을 가하니 이전처럼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휩쓴 것이다.
피에 굶주린 베르타스를 다스리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검을 쥔 이상 이 세상 무엇이든 단칼에 베어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기분에 취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패망의 결과는 자신이 가져가게 되리라.
“후우우우.”
길게 호흡을 내쉰 사비란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이 강한 이유는… 본능보다 이성으로 사고하기 때문이지!”
사비란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 듯 앙칼지게 외치며 아들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들러는 다시 한 번 사비란에게서 사비강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