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7
귀환 마교관
667화(외전 40)
사비란이 떨어진 자리가 움푹 파여 분화구처럼 구덩이가 생겼다.
주변으로는 그 기파를 이기지 못해 휩쓸리듯 날아간 무인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칫, 힘들게 날아올랐더니. 진작 내려오던가?”
사비란이 혀를 차고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그나마 이 정도 상처에서 그친 것은 반묘의 버프가 받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립인 흑영은 사비란을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그가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그의 딸답군. 훌륭하다.”
“칭찬하길 좋아하는 모양이네. 뭐, 그런 건 좋은 부분이야.”
사비란의 말에 흑영이 입매를 비틀었다.
“소문으로 듣던 그자의 성격과 네 성격도 닮은 모양이군.”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니까.”
“과연. 그럼 그 피 맛 좀 봐야겠다.”
“어디 그럴 수 있다면.”
사비란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흑영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과연 그녀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 무공을 펼치려는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건 흑영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하는 기수식 역시 정파나 사파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독특한 자야.’
생각을 삼킨 사비란이 어느 순간 바닥을 차고 움직였다.
타앗!
휘리리리링!
연검이 굽이치며 흑영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따당!
흑영이 순간 연검을 쳐내고는 몸을 낮게 숙이며 사비란의 옆구리를 베어 갔다.
정말이지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도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사비란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검신을 피했다.
쒸이이잉!
검기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니, 단전이 서늘해졌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어!’
과연 절벽 위에서 관망만 하던 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정말 강하고 나쁜 놈들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니까.
타앗!
이번에는 흑영이 먼저 몸을 날려 왔다.
쒸이이잉!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든 검이 그녀의 얼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하마터면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가 남을 뻔했다.
“너무하네. 여인의 얼굴에 칼질을 하려 들다니!”
“말이 많은 아이구나.”
“누구 말대로 아빠를 닮아서 과묵한 편이 아니지.”
사비란이 대답하면서 그대로 반격했다.
따다앙!
취리리릿!
검신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 연검이 뱀처럼 흑영의 검신을 감아 가며 손목을 노렸다.
차차앙!
흑영 역시 그대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의 공방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따다다앙!
쩡! 쩌저엉!
두 사람의 합이 이루어질 때마다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흑영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이따금씩 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자가 생기면, 적아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베어 버렸다.
마치 자신을 방해하면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마계수 근방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의 무공은 단연 돋보였다.
두 사람 모두 예측 불허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무공을 고루 익힌 사비란은 타고난 적응력으로 흑영과 검을 섞어 갔다.
흑영은 애초에 강맹한 공격으로 시작해서 공격의 주도권을 계속 자신이 가져갔다.
처음부터 계산한 방식이었다.
사비란의 기수식을 보면서 그녀에게 주도권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단연 자신의 싸움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익숙한 방식의 싸움이 낯선 방식에 적응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검을 섞었을까?
대략 이백 합까지 이어지는 동안 둘은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했다.
사비란의 어깨가 베이면, 흑영의 허벅지에 상처가 생겼고, 흑영의 옆구리가 베이면, 사비란의 팔뚝에 상처가 남았다.
그야말로 박빙.
하지만….
“이제 슬슬 알 것 같은 걸? 그 정도로 날 이길 수는 없을 거야!”
사비란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파앗!
그녀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마침내 그녀의 검봉이 흑영의 목 줄기를 뚫었다.
아니, 뚫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르릇!
‘사라져?’
흑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연검이 허공을 베고 지나가자.
“내 생각은 다르군.”
서늘한 목소리가 사비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재빨리 몸을 뒤틀면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따다다당!
연검이 길게 늘어지면서 그녀의 몸을 똬리 틀 듯 감쌌다.
이는 석탄강이 개발한 독문무공이었다.
원래 사슬낫으로 감싸는 것이지만, 검의 길이가 짧은 그녀는 강기와 마법을 섞어서 응용했다.
방어에 성공한 그녀가 재빨리 혼돈뇌정 초식을 펼쳐 갔다.
화라라라라랑!
검신이 격하게 떨리면서 파도처럼 밀려갔다.
재빠른 반격에 흑영도 당황했는지 헛바람을 삼키고는 얼른 물러났다.
투콰콰콰쾅!
검기가 바닥을 휩쓸면서 파편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사비란은 그대로 일파열신겸 초식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취리리리리릿!
연검의 강기가 굽이치듯 날아가면서 흑영의 단전을 노렸다.
지금 사용하는 일파열신겸 초식에는 매설란이 가르쳐 준 사사검법의 초식까지 녹아 있었다.
그야말로 정사를 어지럽게 넘나드는 무공.
상상도 못할 변초와 허초가 난무했다.
정신없이 뻗어 오는 검봉을 보면서 흑영이 버럭 소리쳤다.
“어림없다!”
그가 몸을 비틀며 연검의 강기를 강하게 내리쳤다.
따앙!
쿠차앙!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강기 때문에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흑영은 몰랐다.
일파열신겸 초식이 바로 이 순간을 노린다는 것을.
파편 하나하나에 강기가 더해져 비수나 다름없는 상황.
“칫!”
흑영이 혀를 차고는 날아드는 파편들을 마구 쳐냈다.
콰콰콰콰콰콰아!
강기를 입어 흉기로 변해 버린 돌덩이 따위가 마구 부서지면서 자욱한 먼지로 변했다.
그러는 사이.
쑤우욱!
먼지를 뚫으면서 사비란이 불쑥 나타났다.
‘흥!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구나!’
순간 흑영은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자신이 파편을 쳐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먼지를 뚫고 기습을 펼친 것이겠지만 통하지 않은 것이다.
“하앗!”
흑영이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그대로 사비란을 베어 올렸다.
한데
스르릇…!
‘사라져…?’
흑영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눈앞에서 달려들던 사비란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자신이 환영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역시 내 생각이 맞잖아. 날 이길 수 없을 거라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더니.
촤아아앗!
한기를 가득 머금은 연검이 회오리치듯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흑영의 가슴이 대각선으로 쩌억 갈라졌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흑영이 날아갔다.
사비란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비장의 한 수는 연우경으로부터 배운 승룡대천 초식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마법의 기운을 가미하고, 유송령에게 배운 거신패도법(巨神敗刀法)을 응용했다.
사비란은 거기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타앗!
그대로 몸을 날려 연검을 마구 뿌렸다.
이번에는 매설란에게 배운 사사검법이었다.
취취리리릿!
은빛 뱀 수십 마리가 순식간에 수백 마리로 늘어나면서 서로 마구 뒤엉켜 날아갔다.
촤촤촤촤촤아악!
“아아악!”
전신을 난자당한 흑영이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콰당탕!
한참이나 바닥을 구른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비란을 보았다.
“조금 전 그건….”
마지막으로 사용한 무공을 묻는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순간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사비란이 씨익 웃었다.
“블링크. 그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게 당신만은 아니지.”
사실 흑영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는 사비란 역시 당황했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블링크를 펼치는 사람은 사비강을 빼고 본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흑영과 검을 섞으면서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상당 부분이 바로 마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무공에 비해 마법에 능하며, 싸움 도중에 그 마법을 섞으면서 교란을 일으킨다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간단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면 된다.
사비란 역시 딱 블링크까지 익혔다.
블링크는 사비강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마법이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블링크만은 반드시 익히도록 해라. 강호에서는 오래 살아남는 게 장땡이다. 블링크는 그걸 가능하게 해줄 거야.”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사비강의 말이었다.
처음에는 마법을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싫었다.
그녀는 활동적이었다.
맘껏 검을 휘두르면서 뛰어다니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마법은 학문에 가까웠다.
매일 같이 방안에 처박혀서 외우기도 힘든 어려운 말들을 달달 읊어야 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다?
그녀는 반대로 생각했다.
손발이 둔하면 머리가 고생이다.
한데 손발이 둔하지도 않은데 그런 걸 익히는 건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역시….
“이래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나봐.”
싸우는 도중 블링크를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을 이용해서 전세를 완전히 역전할 수 있다면 시도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리고 다행히 성공했다.
피투성이가 된 흑영이 입술을 쿡 씹고는 소리쳤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 펼쳐질 테니까!”
“글쎄. 지옥에 가서 구경해 봐. 그 지옥보다 여기가 정말 더 지옥 같은지.”
말을 마친 사비란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할 때였다.
투두두둑!
갑자기 시커먼 땅에서 촉수 같은 것이 길게 자라 나오더니 순식간에 흑영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스르르릇!
마치 뱀처럼 보이기도 한 그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흑영의 입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커억!”
흑영조차도 뱀처럼 생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꿀꺽 삼켰다.
당황하긴 사비란도 마찬가지.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훌쩍 물러났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모두 조심해!”
사비란이 소리치는 순간, 땅속에서 솟구쳐 오른 그것이 그녀에게도 달려들었다.
“어딜!”
쒸에에엑!
촤악!
그녀가 재빨리 연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들던 녀석을 두 동강 내버렸다.
치이이익!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금세 녹아 없어졌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백화단이 일제히 그것들과 싸우는 동안, 암천교도들은 멍하니 서서 그대로 뱀처럼 꿈틀거리는 것들을 삼켜 갔다.
‘설마…?’
사비란이 고개를 번쩍 들어 절벽 위를 노려보았다.
“……!”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절벽 위에 선 노인.
그의 안면에서는 수십 줄기의 촉수가 길게 늘어지면서 절벽과 닿아 있었다.
그리고 절벽의 표면을 따라 검붉은 기운이 핏줄처럼 꿈틀거리면서 뻗어 내려와 사방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마치 이 시커먼 땅과 노인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노인의 얼굴에서 늘어졌던 촉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더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암천교주 철군악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더니.
쩌어어억…!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면서 갈라지는 게 아닌가?
끈적한 점액질을 늘어뜨리며 얼굴이 양 갈래로 갈라서자, 돌기가 돋은 새로운 얼굴이 그 속에서 드러났다.
그는 바로 아들러였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전세가 기울면 안 되지. 이제야 시작인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쪽 숲에서 기합성과 함께 멸마궁 무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