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2
귀환 마교관
662화(외전 35)
어두컴컴한 공동.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
그 곁으로 흑립인이 다가서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교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오랜 기다림.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이런 시간이 오긴 올지 의심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마침내 온 것이다.
‘교주’라 불린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특유의 회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교주가 천천히 입매를 말아 올렸다.
“드디어… 때가 된 건가? 그간 수고했다. 흑영(黑影).”
“모든 것이 교주님 덕분입니다.”
교주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흑영을 슬쩍 보았다.
“너는 이 일을 왜 하는가?”
흑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계대전은 강호의 역사를 백년 이상 앞당겼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늘 지금보다 나아지는 걸 꿈꾸니까요.”
“꿈이라…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그 꿈을 이뤄야지. 가자.”
마침내 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돌아서자 장삼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어둡고 긴 통로를 따라서 한참 걸어가니 저만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교주와 흑영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밝은 곳으로 나오니, 저만치 절벽 아래로 커다란 도화나무가 복사꽃을 활짝 피운 채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도화나무 주변으로 장삼 차림의 무인들과 검은 옷을 갖춰 입은 주술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 모두 절벽 위로 교주의 모습이 드러나자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우렁찬 외침이 천지를 격동했다.
인근 숲에 숨었던 새떼가 그 소리에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노인은 새까맣게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교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동안 너희들 모두 수고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새로 얻게 될 힘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거듭나리라.”
“암천(暗天)! 암천! 암천!”
교도들이 이구동성으로 교명을 외치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한 차례 격동이 지나가자, 교주는 회색빛 눈동자로 교도들 사이에 우뚝 솟은 도화나무를 보았다.
마침 곁에 있던 흑영이 절벽 아래의 누군가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잠시 후, 무인 몇 명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수레에는 금속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스무 상자였다.
그들이 상자를 하나씩 들어 도화나무 앞에 나란히 옮겨 두었다.
그곳 바닥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의식을 위해 미리 준비된 것이었다.
금속 상자의 덮개를 열자 형형한 빛을 뿜어내는 마공석이 드러났다.
한 상자에 열 개씩, 모두 이백 개!
교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시작하라.”
잠시 후, 도화 나무를 중심으로 도열한 검은 옷차림의 주술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재도열하더니,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묘한 주술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구만타재(求萬墮災) 지다간흑(地 多幹黑) 알부타이(頞浮陀以) 사라만다(死拏萬多)….”
흑의 주술사들 사이에서 사이한 기운이 끊임없이 도화나무로 흘러갔다.
그렇게 한참이나 주술을 읊고 나자,
꾸드드득…! 우드득…!
마침내 도화나무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무뿌리에서부터 시커먼 기운이 서서히 차오르는가 싶더니, 복사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한데 분홍빛 복사꽃잎은 떨어져 내리면서 시커먼 재처럼 변해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드드득…!
도화나무가 고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전신을 떨어댔다.
마침 주변에 있던 몇몇 무인들이 흠칫거리자, 교주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요하지 마라.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그의 격려에 주술사들이 계속해서 주문을 읊어 갔다.
이제 도화나무는 껍질이 썩어 가면서 탈피를 시작했다.
쩌적…! 쩌억…!
딱딱하게 마르고 상한 나무 껍데기가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복사꽃이 완전히 떨어진지는 오래였다.
뿐만 아니라 도화나무 주변의 땅마저 거뭇하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츠츠츠츠츠…!
나뭇가지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길게 자라면서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땅에 닿은 나뭇가지들이 거미줄처럼 서로 엉키면서 마공석을 향해 뻗어 나갔다.
츠츠츠츠츠츳!
마치 수백 마리의 뱀이 바닥을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나뭇가지 끝이 쩍 벌어지니, 끈적한 점액질이 침처럼 늘어졌다.
곧이어 뱀이 구슬을 삼키듯, 나뭇가지들이 마공석을 단숨에 꿀꺽꿀꺽 삼켜 갔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속에서 구슬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교주는 전율하듯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백 개의 구슬이 나뭇가지가 울룩불룩해지면서 구슬을 삼켜 이동시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침내 마공석이 나무 기둥의 중심부에 다다랐다고 생각되는 순간.
우드드드드득…!
나무가 거침없이 자라기 시작했다.
“오오…!”
“시작됐다!”
무인들이 저마다 시커멓게 변해 버린 도화나무를 올려다보며 들뜬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한데.
드드득! 쿠드드득…!
대략 십여 장까지 순식간에 치솟은 나무가 더 이상 뻗어 오르지 못한 채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뭔가 좀 더 힘을 받아서 기운을 분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런… 역시 부족했던 건가?’
절벽 위에서 지켜보던 흑영이 미간을 팍 구겼다.
쿠드드드득…!
크게 자란 나무가 다시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흑영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하지만 교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대답 대신 겉옷을 벗어던졌다.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아니. 충분하다.”
타앗!
말을 마친 그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나무 앞으로 다다른 그가 손을 현란하게 놀리더니 쌍장을 앞으로 뻗으며 나무 기둥에 푹 꽂아 넣었다.
곧이어.
“흐아아압!”
그가 기합성과 함께 나무 안으로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와락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구구구구구…!
마침내 거대한 나무가 다시 기운을 받아 자라기 시작했다.
이윽고.
쿠아아아아아아앙!
지진처럼 땅이 흔들리던 끝에, 나무 꼭대기에서 검붉은 기운이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쿠구구구구구구!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붉은빛 기둥 주변으로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었고, 그 중심은 시커먼 암흑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오오오!”
무인들과 주술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쑤욱…!
나무 기둥으로부터 양손을 뽑아낸 교주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흑영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교주가 손을 들어 올리고는 조금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흑영이 고개를 꺾어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해내셨군요!”
“너희들이 해낸 거다.”
“차원의 문이 열릴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 하루면 충분하지.”
대답을 마친 노인의 회색빛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뿜었다.
**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호수를 커다란 배 한 척이 건너가고 있었다.
사비란은 그 배의 측면 난간에서 저만치 보이는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섬에 도착할 터였다.
마침 단리혁이 그녀 곁으로 다가오더니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야?”
“뭐가?”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느냐는 거지.”
“맞아. 반묘가 이쪽으로 가려고 했으니까.”
사비란의 시선이 저만치 뱃머리에서 추소혜와 장난을 치는 반묘에게 향했다.
귀여운 고양이 모습을 한 반묘는 추소혜의 가슴 품에 파고들었다가 도망을 치기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여섯 나이에 접어든 추소혜는 반묘와 어울려 노는 게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반묘를 안았다.
“그렇게 파고들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한편 그 모습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단리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음탕한 고양이가 정말 강호를 구하는데 일조했단 말인가?”
“그랬대.”
“확실히 의심스럽단 말이야. 뭐, 좀 신기하게 생긴 녀석이긴 하지만, 대단한 영물 같진 않은데.”
“발기하면 엄청 커져.”
“그거야 나도 뭐… 아, 그런 뜻이 아닌가? 아무튼! 커험! 믿어지지가 않는군.”
“정 궁금하면 가서 칼로 푹푹 찔러 봐.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다.”
“하하… 사양하겠소.”
말을 마친 단리혁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반묘에게 다가갔다.
마침 추소혜의 품에서 달아난 반묘가 단리혁 앞에 흠칫 멈췄다.
- 니야앙.
“흐음….”
단리혁이 반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턱을 괴고는 말했다.
“네가 정말 영물이냐?”
- 니야앙.
반묘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하품을 길게 했다.
단리혁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너 괜히 배 한 번 타고 싶어서 머리 쓴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의심스럽단 말이야. 그렇다고 정말 칼로 푹푹 찌를 수도 없고.”
그때였다.
일순 반묘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더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게 아닌가?
단리혁이 흠칫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뭐냐?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거냐?”
다음 순간.
- 크르러러렁!
반묘의 덩치가 갑자기 커지면서 천둥 같은 포효를 울리는 게 아닌가?
“우왁!”
깜짝 놀란 단리혁이 그대로 넘어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하, 농, 농담한 걸로 뭐 이렇게 정, 정색을 하고 그, 그래?”
하지만 반묘는 단리혁을 보는 대신 휙 돌아서서는 섬 쪽을 노려보았다.
마침 사비란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이 녀석이 갑자기 흥분해서 잔뜩 발기해가지고는… 뭐,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때, 추소혜가 불쑥 말을 뱉었다.
“저기. 뭔가 일어나고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반묘를 따라 섬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쏴아아아아아!
섬 복판에서 붉은빛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하늘을 뚫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붉은빛 기둥 주변으로 먹구름이 자욱하게 몰려들면서 울음을 내질렀다.
쿠르르르릉…!
“맙소사, 저, 저게 뭐지?”
“정말로 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거겠지.”
단리혁의 말에 사비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순간.
촤아아아아아!
“우왓!”
“꺅!”
갑자기 배가 들썩이더니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호수에 격랑이 일어났다.
잠시 후.
뀌아아아아앙!
듣기 싫은 괴성과 함께 수면 위로 굵고 기다란 연체 괴물이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녀석이 갑판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앙!
“우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난간 쪽에 있던 백화단 무인 몇몇은 중심을 잃고 호수로 빠지고 말았다.
“다들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