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
귀환 마교관
660화(외전 33)
천신무관은 백화단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단체 손님을 맞이한 천신무관은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천신무관주 맹가숙은 사비란과 백화단을 위해서 이른 저녁부터 연회를 열었다.
값비싼 술과 귀한 음식이 자리마다 놓여 있었고, 한쪽 단상에는 악사들이 감미로운 음악까지 연주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적무린과 서래향 등 다수의 사부들이 생도들을 인솔하여 연무기행을 떠났다는 점이었다.
맹가숙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비란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이렇게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저야 늘 잘 지내지요. 맹 사부님도 잘 지내셨죠?”
“말도 마라. 요즘 애들 어쩌면 이리도 말을 안 듣는지. 우리 어렸을 때는 생각도 못하던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가요? 대부분 착해 보이던데.”
“아서라, 스승을 놀리는 것도 모자라서 따돌림을 하거나 괴롭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
사비란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빠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사부님들 대부분이 골칫덩이 제자였다고….”
“커험, 험! 지나간 일을 꺼내서 뭣 하겠느냐? 자, 마시자꾸나.”
맹가숙이 얼른 잔을 들어 올리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좋구나! 내가 험한 꼴 보기 전에 얼른 술이나 먹고 일찍 죽어야지.”
“방금 세상의 삼대 거짓말 중 하나를 하셨네요.”
“허허, 그런가? 하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란다.”
사비란이 빙긋 웃었다.
“네,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도 똥칠은 하지 마시고요.”
“오냐, 오냐!”
맹가숙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추량 사부님이 안 보이시네요.”
“그는 내일이나 돌아올 게다. 마침 볼일이 있어서 나간 참이거든.”
“아, 네.”
두 사람이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백화단도 푸근한 마음으로 연회를 즐겼다.
그 모습을 둘러보던 사비란은 어디선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란아!”
“아… 방각 사부님!”
“그래, 란아!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하하하! 정말 반갑구나. 아주 꼬맹이였을 때 봤는데,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었구나.”
“반가워요, 사부님.”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열심히 흔드는 사람은 바로 방각이었다.
한데 그의 등에는 쌍도가 아닌, 장창이 매여 있었다.
원래 그는 쌍도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자였다.
사비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기가 바뀌었네요?”
“너도 보다시피 우리 관주님 연세가 오늘 내일 하시잖느냐? 그래서 내가 저 영감님 대신 창술을 가르치고 있단다. 뭐,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사부님은 여전히 혼자이신가요?”
“어허, 오랜만에 보면서 뼈 때리는 질문을 던지는구나. 그래, 아직 혼자다. 그래서 말인데 어디 참한 노처녀 좀 없느냐?”
“글쎄요, 요즘은 임무에 바쁘다 보니….”
사비란이 어색하게 웃어넘기자, 맹가숙이 혀를 끌끌 찼다.
“아, 글쎄, 노처녀는 노총각이 알아서 찾아야지! 왜 자꾸 남한테 소개를 시켜 달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남한테 의존하는 버릇을 못 버리니까 여태껏 혼자 사는 거지!”
“쳇, 영감님은 보자마자 또 잔소리요?”
“저, 저, 말버릇 좀 보게. 그만큼 공석에서는 관주님이라 부르라고 했거늘!”
“수십 년 입에 붙은 버릇이 어디 하루아침에 바뀌겠소?”
“하루아침? 이 무관을 차린 게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이놈아!”
“아, 예에, 예에. 관주님. 제가 아주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요. 목 씻고 기다리겠습니다요.”
방각이 입을 삐죽 내밀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맹가숙이 헛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여기가 천신무관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살며시 웃는 사비란에게 방각이 말했다.
“다른 사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연무기행을 떠나는 바람에 못 보게 됐구나. 그들이 널 보면 무척 반가워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모두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에요.”
“하하, 너는 우리 걱정일랑 말고 네 몸만 생각해라.”
그때였다.
“란이 왔구나.”
또 다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비란이 돌아보니 이번에는 조문탁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조 사부님!”
“오냐, 잘 지냈느냐?”
“그럼요.”
사비란이 반색하며 다가가려다가 멈칫거리고는 조문탁을 보았다.
그의 다리 뒤에 두 꼬마가 몸을 살짝 숨기고 있었는데, 조문탁을 꼭 닮은 모습이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저 아이들…?”
“허허, 내 아들딸이다. 둘이 꼭 닮았지?”
“네, 쌍둥이군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 조문탁이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정말이지 두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다.
머리가 길고 짧은 정도의 차이랄까?
물론 아직은 어려서 성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 녀석들을 얻으려고 날마다 물 떠다 놓고 빌었다. 하하. 하늘도 감동한 것인지 쌍둥이를 늦둥이로 선물해 주시더구나.”
“정말 귀여워요.”
“아들 녀석은 비랑(飛狼), 딸래미는 비연(飛姸)이라고 한다. 이 녀석들아 뭐하느냐? 어서 인사해야지?”
조문탁의 말에 두 아이가 쭈뼛거리며 나와서는 동시에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안녕하세요, 언니.”
“그래, 안녕.”
사비란이 생긋 웃으며 대꾸하자, 조비랑이 얼굴을 붉히고는 말했다.
“누나, 엄청 예뻐요.”
“그래? 고마워.”
“언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오셨다면서요?”
“응, 맞아.”
“그럼, 나도 따라가도 돼요? 언니?”
그러자 조비랑이 불쑥 끼어들었다.
“안 돼! 내가 따라갈 거야!”
“싫어. 내가 갈 거야. 너는 집에서 어머니를 지켜.”
“야! 오라버니한테 너가 뭐냐?”
“나이도 똑같으면서 무슨 오라버니람?”
“그래도 내가 먼저 나왔잖아!”
“그래도 키는 내가 더 크잖아. 누나라고 불러.”
“우씨, 뭐야?”
두 아이가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을 본 사비란이 풋 웃어 버렸다.
문득 자신도 형제자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꺅!”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 모두 고개를 돌렸다.
마침 쟁반 가득 요리를 담아오던 시녀가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지려고 했다.
찰나.
쉬이이잇!
두 줄기 바람이 불어 가는가 싶더니.
탁! 탁탁!
어느새 달려간 조비랑과 조비연이 시녀가 놓친 접시를 하나씩 안전하게 받아내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사비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굉장하네요.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직접 가르치셨어요?”
“뭐, 이따금씩 가르치긴 했다만, 나도 궁주님처럼 내 자식의 정식 사부는 아니다. 혹여나 후에 족보가 꼬일 것 같아서 말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이대로 잘 크면 훗날 강호 제일의 경공 고수가 될 것 같아요.”
“허허, 그렇게만 커준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지.”
조문탁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한편 넘어진 시녀를 곁에서 부축하며 일으켜 세워 주는 사람은 바로 화려함으로 치장을 한 등등등이었다.
“괜찮소?”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분이 앞에 나타나셔서….”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등등등의 아버지, 등자경이었다.
등자경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분명 내가 먼저 여기 서 있었는데, 자네가 날 못 보고 부딪친 걸세.”
“어머, 정말요? 왜 못 봤을까?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녀가 연신 굽실거리자, 등자경이 손을 저었다.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니 가던 길 가시게.”
시녀가 연신 사죄를 한 다음 자리를 뜨자, 등자경이 등등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화려하게 꾸미는 이유다. 이 치욕, 이 수모, 이 굴욕만큼은 네가 절대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아버지… 저는 다른 치욕, 다른 수모, 다른 굴욕을 느끼고 있다고요.’
물론 이런 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등등등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대신 다시 한 번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그래도 연회만큼은 평범한 차림으로….”
“안 될 말! 많은 사람이 모인 연회니까 더욱 화려해야지!”
“하아… 네….”
마침 방각이 양손을 활짝 펼치며 다가왔다.
“오오, 내 수제자! 어서 오너라. 오늘도 넌 어김없이 화려하구나. 참, 두 사람은 구면이라지?”
등등등을 데려온 방각의 말에 사비란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방각이 맹가숙을 보며 으스대듯 말했다.
“영감, 그래도 내가 제자 하나는 확실히 키우지 않았소? 내가 영감님 위해서 창술까지 연구하면서 말이오!”
“흥, 아직 멀었다. 내가 가르쳤다면 벌써 입신의 경지에 올랐을 게다.”
“그 입신은 신발 말하는 건가?”
“뭬야?”
맹가숙이 버럭 소리치자, 방각이 헤실헤실 웃으며 다른 말을 이었다.
“뭐, 아무렴 어떻소? 오늘 이렇게 기분 좋은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 기회에 내 수제자의 창무를 한 번 감상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방각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특히 등자경이 불쑥 나서서는 열렬히 동의했다.
등등등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아주 좋은 생각이오, 방 사범! 이 녀석의 창술은 가히 으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옳은 말씀이오. 뭘 좀 아시는구려. 그런데… 귀하는 뉘신지? 등아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시오?”
결국 등자경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이 아이의 아비요!”
“헉, 그렇소? 등아, 왜 그동안 아버지가 계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늘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 어머니가 언제 재혼을 하신 거냐?”
그러자 등등등 뒤에서 백미령이 다가오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혼은 아니지만, 늘 재혼한 기분으로 살고 있죠. 그게 저이의 매력이죠.”
“아….”
이쯤 되자 등자경도 도저히 못 참겠는지 소리쳤다.
“너와 난 같은 신생조 출신이다! 이놈아!”
“……!”
그 말에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방각이 흠칫거리고는 등자경을 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자, 그럼 내 수제자의 창무를 한 번 감상해 봅시다. 모두 박수 한 번 주시오!”
방각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헉…! 방금… 나 무시당한 건가…?’
등자경은 허탈한 심정이 되어 멍한 눈길로 등등등을 보았다.
등등등은 영 나서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마지못해 연회장 복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내 아들이라도 주목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등자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등등등을 보았다.
포권으로 간단히 예를 차린 등등등이 곧 악기 연주에 맞춰서 창무를 추기 시작했다.
과연 입은 옷이 화려한데다 휘황찬란한 창 때문에 동작 하나하나가 무척 우아하게 보였다.
그의 창무를 감상하던 사비란 곁에 단리혁이 다가왔다.
“정말 저 친구를 데려갈 생각이야?”
“그래야지. 소집 명단에 있으니까.”
“진심이야?”
“그럼?”
“아무리 소집 명단에 있다고 해도 저건 좀 심하잖아. 너무 화려하다고. 우리 임무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저 휘황찬란한 옷차림새가 걸림돌이 될 거야. 보아하니 순해 빠져서 아버지 말이라면 거역도 못하는 것 같은데.”
“화려한 만큼 화려하게 해치울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럴 리가.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의외로 꽉 찬 수레일 수도 있지.”
“흐음… 좋아, 그럼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사비란이 단리혁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 장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어쩌려고?”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자질을 시험해 보는 거지!”
말을 마친 단리혁이 탁자를 짚더니 훌쩍 넘어서 연회장 복판으로 나아갔다.
그가 창무를 추던 등등등을 보며 말했다.
“유별나게 화려한 창무도 그렇게 혼자 추고 있으니 좀 심심해 보이네. 내가 같이 어울려 주고 싶은데.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