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1
귀환 마교관
641화(외전 14)
연설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도 그녀는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꼼짝없이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방을 에워싼 기척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에 누운지 꼬박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이제야 자신의 방 근처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어느 정도 경계를 푼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호위무사이지, 그들은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야밤에 몰래 장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치된 감시자들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연설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벌써 며칠 째 장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석검영과 평화회담을 준비하겠다는 말에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셨다.
그날로 연우경은 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목단화는 그런 연우경을 말리기는커녕 한 술 더 떠서 호신위들에게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일렀다.
결국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고 만 셈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한때 동고동락하면서 전우애를 다지셨다는 분들이 어쩌면 저리도 원수처럼 변해 버렸을까?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 않는가?
무려 삼십 년이다.
그 정도면 사람의 마음이 수십 번도 더 바뀔 수 있으리라.
갈대와 같은 것이 또 사람 마음일 테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대로 방안에 처박힌 채 갇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앞뒤 꽉 막힌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다.
그 후의 일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석검영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만나기로 한 날짜가 지났음에도 자신에게서 연락 한 통 받지 못했으니, 그 답답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누구보다 석검영에게 너무 미안했다.
‘오늘은 반드시 빠져나가서 석 공자님을 만나야겠어!’
스르르.
그녀는 정말이지 귀신처럼 움직였다.
목단화에게서 배운 보법이니, 그 신묘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빠르고 깔끔한 동작.
그녀는 얇은 연검 한 자루를 패용하고는 창문을 천천히 열었다.
비스듬히 열린 창밖으로 저만치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장원에서 번을 서는 무인 중 한 명이리라.
이 방을 나가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신속하게 빠져나가서 석검영을 만나 사정을 전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흑천도가에서 석검영을 어떻게 불러낼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곧이어.
스륵…!
창문이 열린 줄도 모르게 금방 닫혔다.
이미 그녀의 신형은 창문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나간 그녀는 낭하를 따라서 빠르게 달렸다.
지붕 위에서 번을 서는 자들이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몸을 날렸고, 건물 사이로 오가는 무인들이 잠깐 기둥 뒤편으로 사라진 틈을 이용해서 표홀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외벽까지 달려간 그녀가 단숨에 경공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파바박!
휘리릭, 탁!
허공에서 제비를 한 바퀴 넘은 그녀가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후우!”
참았던 숨을 내뱉은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냈다! 드디어 벗어났어!’
그렇게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흠칫!
연설연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기척…!
아니나 다를까.
슈슈슈슉!
그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연설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중년의 사내가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딜 가십니까?”
중년의 사내는 연설연을 감시하는 호위대주, 장려심(張麗心)이었다.
“비켜요.”
연설연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장려심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의 명입니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싫어요.”
“그럼 결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실례하죠.”
차아앙!
연설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간다면 부모님은 또 노발대발하면서 자신을 더욱 가둬 두려고 할 것이다.
어차피 들켰다면, 한 번이라도 석 공자를 만나고 싶었다.
연설연의 기세가 날카로웠기에 호위무사들이 저마다 흠칫거리고는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차마 소가주인 그녀에게 검을 들이밀진 못했다.
그렇다고 고분고분 물러나지도 않았다.
장려심이 깊은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용서하십시오.”
그가 천천히 기도를 끌어올렸다.
과연 목단화가 가장 믿고 있는 호신위답게 막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눅들 건 없다.
해볼 만하다.
어차피 이들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지 못한다.
기껏해야 맨손으로 싸우면서 혈을 점하는 정도이리라.
게다가 자신에게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비장의 한 수가 있다.
그렇다면 역시….
“검을 든 내가 유리하겠죠!”
파바밧!
연설연이 보법을 밟으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러면서도 혼자 생각해왔던 것을 처음으로 실전에서 펼쳤다.
‘통할까?’
아직 부모님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검술이었다.
쉬이이잇!
그녀의 기세는 사뭇 매서웠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정말 맨손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래봬도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공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요!’
과연 그녀는 아버지 연우경의 검법과 어머니 목단화의 검법을 동시에 발현하고 있었다.
보법은 섬광벽력검의 방식인데, 검로는 패룡단천검에서 가져왔다.
그러다 보니 패룡단천검보다는 표홀했으며, 섬광벽력검보다는 힘이 넘쳤다.
‘정말 된다!’
그녀는 선공을 펼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두 검법의 단점이 보완되면서 엄청난 위력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쒸이잉!
연설연의 검이 장려심의 얼굴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정말 까딱했으면 장려심은 남은 평생을 코가 없이 살았어야 하리라.
파바밧!
장려심이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코끝이 아린 느낌이다.
찰나지간 검풍이 스쳤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 놀랐다.
분명 패룡단천검이나 섬광벽력검 중 하나를 펼칠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 펼친 것은 둘 다 아니다. 아니, 둘 다 맞다.
아닌가?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 섞였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이 쉽지, 실제로 다른 무공 두 가지를 섞어서 더 나은 무공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데 연설연이 그걸 해낸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 연우경이나 목단화가 있었더라면, 입을 딱 벌리고 놀랐으리라.
‘어떻게 두 개의 무공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여내신 거지? 설마….’
사고의 유연함.
그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쩌면 사파에 속한 석검영과 만나면서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물론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목단화와 연우경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칠 것이다.
한편 연설연도 자신의 발전에 내심 놀랐다.
‘역시 통한다! 해낼 수 있겠어!’
자신감을 얻은 그녀가 한 차례 검을 휘둘러 주변을 물리치고는 곧장 장려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쒸이이이잇!
절대로 피할 수밖에 없는 공격.
이 검공을 그가 피하는 순간, 그대로 퇴로를 확보하고 달려 나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쑤우우욱!
“앗!”
연설연은 깜짝 놀라면서 검을 거두었다.
‘이게 무슨…!’
어이없게도 장려심은 오히려 그녀의 검봉을 향해 몸을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그대로 검을 뻗었다면, 장려심은 십중팔구 죽은 목숨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검을 걷어내자.
파바밧!
장려심이 순식간에 그녀의 품을 파고들면서 손가락을 뻗었다.
탁탁탁!
“헉!”
순간 연설연은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점혈을 당한 것이다.
장려심이 힘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 검을…?”
“제가 차마 검을 겨누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도 차마 절 죽이진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지요.”
“그런….”
그랬다.
장려심은 소가주인 연설연이 자신의 목숨을 끊을 정도로 독하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잠깐의 망설임을 보이는 사이, 어렵지 않게 그녀를 점혈로 제압한 것이다.
“비겁해….”
장려심이 피식 웃었다.
“싸움에는…!”
찰나, 그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휙 돌아섰다.
쒜에에엑!
어둠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가 날아들었다.
따앙!
장려심이 얼른 검을 휘둘러 비수를 쳐내자,
쉭! 쉭! 쉭!
연이어 세 자루의 비수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호신위들을 노린 것이었다.
어찌나 빠른지 세 명의 호신위가 동시에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크억!”
“악!”
목숨을 잃을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모두 마혈을 당한 것인지 쓰러진 채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장려심이 살기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웬 놈…!”
하지만 그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쉬이이이잇!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 나온 그림자.
과연 상대는 눈으로 그 움직임을 쫓기도 힘들 만큼 빨랐다.
상대의 검이 곧장 연설연을 향했다.
“어딜!”
장려심이 재빨리 검을 뿌려 공격을 튕겨냈다.
따앙!
다음 순간.
“헛!”
장려심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상대는 연설연을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낚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쉬이이익!
푹, 푹, 푹!
검봉이 뱀대가리처럼 빠르게 날아들면서 전신의 요혈을 찔렀다.
“커억!”
장려심은 자신이 무슨 검법에 당한 것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어찌 보면 정공인 듯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공인 듯했다.
그야말로 해괴한 무공이었다.
“네놈은… 대체…!”
장려심은 두 눈동자의 핏줄이 터질 것처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흑의 무복을 입은 사내는 복면을 쓰고 눈만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워서 그조차도 잘 볼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이 무심히 다가오더니 혼혈을 점했다.
장려심이 의식을 잃자, 연설연이 쓰러진 채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넌 누구냐?”
“쉿.”
그제야 복면인이 검지를 복면 쪽으로 가져가더니 다른 한 손으로 명패를 들어보였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그것은 멸마궁의 백화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백화단…? 백화단이 여기엔 왜…?”
이상한 일이었다.
백화단이라면 과거 청산을 위해서 친마 세력의 후손들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데 강호를 지킨 섬검목가에 무슨 볼 일로 왔단 말인가?
마침 복면인이 복면을 벗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싸움에는 비겁한 게 없어. 이미 검을 뽑아든 순간, 비겁해지기로 작정한 거지. 그런 의미에서 검을 뽑고도 상대의 목숨을 걱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저 위협만 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검을 뽑지 말았어야 해.”
복면을 벗은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연설연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정도였다.
“자, 이제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지?”
말을 마친 사비란이 연설연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