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
귀환 마교관
640화(외전 13)
톡. 톡. 톡…
사비란이 창밖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녀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면 습관처럼 나오는 행동이었다.
“흐음.”
한참이나 생각에 잠긴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송백현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송백현이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점점 복잡해진다.
만약 사부들이 자녀를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한다면?
물론, 궁주의 명령이라고 하면 더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많다.
가령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호위를 암암리에 붙인다든지.
“고민이 많으신 것 같군요.”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등가휘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니 객점 일 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간 듯했다.
“아마 아빠가 날 일부러 이렇게 돌아다니게 한 건….”
“뭔가를 보고 배우길 바라셨겠지요.”
“그래. 그거야. 그리고 지금 그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단계를 앞두고 있지.”
“송백현의 두 가문을 두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래. 부모님은 내가 그분들을 화해하도록 만들길 바라실 거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시험일지도 모르지.”
등가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 앙숙으로 지낸 두 가문입니다. 하루아침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진 않을 겁니다.”
“그럼 곤란한데. 우리가 두 사람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생길 거야.”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변할 지도 모르지. 아빠는 특목반이었던 천멸대와 혈사련의 신생조를 변화시켰으니까.”
“그건 궁주님이니까 가능한 겁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요.”
사비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래서 나는 그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렵지 않을까….”
“아니. 방금 길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았어. 담진우(曇眞友)를 불러 와.”
“알겠습니다.”
등가휘는 더는 말하지 않고 물러갔다.
잠시 후 담진우가 왔다.
그는 바로 멸마궁 부군사인 담우기의 아들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단주님.”
“그래. 네가 우리 백화단에서 가장 똑똑하니까 조언을 듣고 싶어서.”
“음. 제가 가장 똑똑한 건 사실이니까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어딘지 재수 없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분명 아버지의 유전이리라.
하지만 사비란은 그의 그런 태도가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 있는 모습 때문에 머리를 쓰는 일이라면 더욱 그를 신뢰하기도 했으니까.
사비란이 송백현의 사정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담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단주님은 그 두 가문을 화해시키고 싶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사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자신에게 임무를 주었다.
강호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찾아 섬멸해야 하는 임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런 일이라면 백화단이 나서는 것보다 부모님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깔끔하리라.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일을 맡기고 과거 인연들을 일일이 찾아가게 한 것은 분명 또 다른 속뜻이 있으리라.
사비란은 이 과정을 하나의 시험 무대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 시험에 통과하면 아버지가 베르타스를 내게 넘겨주실 지도.’
생각만 해도 설렌다.
등가휘를 보면서 부러운 게 딱 하나가 있다.
바로 그의 허리춤에 패용된 귀혼도.
마계에서 넘어온 신병이기 중 하나.
강호 십대 병기를 뛰어넘어, 강호 이대 특수 병기다.
등부형은 등가휘가 성인이 되는 날 아무 조건도 없이 귀혼도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사비강은 아직 베르타스를 내어 주지 않았다.
아직은 사비란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베르타스는 특별한 검이다. 단순히 무공만 뛰어나다고 해서 다룰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세상을 좀 더 깊이 알고, 많은 경험을 통해 깨우침을 얻어야 베르타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거다. 그 전에는 너에게 이 검을 넘겨줄 수 없다.”
사비강의 말이었다.
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버지였는데, 베르타스만큼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
담진우가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신 방법은 있습니까?”
“한 가지 있어.”
“뭡니까?”
“아버지와 같은 방식이지. 상식적으로 대응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야. 하지만 상식을 파괴하는 방법이라면….”
“지름길이 될 수 있단 뜻이군요.”
“그래.”
“그게 어떤 방법입니까?”
사비란이 자신이 생각한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여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담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효과가 있을 법도 하군요. 하지만 뭔가 부족하네요.”
“그래서 널 부른 거야. 어때? 좋은 방법이 있을까?”
“잠시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좋아.”
“저는 생각할 땐 늘….”
“여기 가장 비싼 술로 시켜 줘.”
사비란이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등가휘에게 말했다.
담진우가 씨익 웃었다.
“역시 단주님은 최곱니다.”
“어설픈 아부는 그만두고 더 좋은 방법을 말해 봐.”
잠시 후 술이 나왔다.
확실히 향부터 달랐다.
담진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술을 한 잔 들이켜고는 말했다.
“단주님이 말씀하신 계획은 아주 훌륭합니다. 여기에 양념만 조금 가미하면 일석이조, 일거양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양념이 뭐야?”
“구강룡 숙부님을 친 그놈들을 불러내는 겁니다.”
“그놈들의 정체도 모르는데 어떻게?”
“어디에 있는지 모를 물고기를 낚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끼를 던진다?”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그 미끼는 정보가 되겠지요.”
“정보라….”
“현 강호에서 가장 정보가 빠르고 정확한 자들은 누굴까요?”
“그야 멸마궁의 귀영단이지.”
“그럼 간단하죠? 귀영단이 슬쩍 정보를 흘립니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미끼로. 그리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면….”
“마공석.”
“바로 그겁니다. 게다가 멸마궁이 하사한 마공석이니 아주 특별하죠.”
담진우가 술잔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의 임무와 연관성이 있는지도 모르니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담진우! 너는 정말 총명해!”
“아닙니다. 궁주님이 세우신 계획에 저는 양념만 친 거죠.”
“음식은 언제나 양념 맛이지!”
“그건 그렇죠. 양념이 없으면 요리라고 할 수 없지요. 핫핫.”
‘음… 역시 좀 재수 없긴 해.’
물론 사비란은 그 생각을 속으로만 삼켰다.
대신 등가휘를 불렀다.
“부단주, 홍 단주님에게 연락해야겠어.”
현재 귀영단주는 홍염이었다.
원래 일영이었던 그는 대략 십 년 전부터 귀영단을 맡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등가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이는 저잣거리.
초로의 사내가 좌판을 벌여 놓고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흑립을 깊이 눌러 쓴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바로 공동에서 회색빛 눈동자의 사내와 대화를 나누던 자였다.
그가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잡동사니를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로의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은 지금 많은 대화를 남모르게 나누고 있었다.
[물건을 찾았다고?]
흑립인의 전음에 초로의 사내가 전음으로 대답했다.
[예, 총 스무 개의 마공석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수거하면 필요한 양이 다 채워집니다.]
[확실한 정보인가?]
[귀영단에서 새어 나온 정보입니다. 신뢰도는 팔 할 이상입니다.]
귀영단이라는 말에 흑립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과연.
그렇다면 적어도 확인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마공석 스무 개!
최근 마공석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물론, 단 한 군데를 제외한다면.
바로 멸마궁.
멸마궁은 중원에서 가장 많은 마공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멸마궁에 잠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던 차에 이런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섬검목가에 열 개, 흑천도가에 열 개입니다. 멸마궁에서 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잘 됐군. 적어도 멸마궁을 터는 것보다는 백 번 낫지.]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뿐이다. 최대한 서두르되 실수 없도록.]
[존명.]
은밀한 대화가 끝나자, 흑립인이 노리개 하나를 들고 일어났다.
“얼마요? 아니, 이거면 충분하겠지.”
그가 은자 한 냥을 손가락으로 튕기듯 주었다.
초로의 사내가 연신 굽실거렸다.
“아이고, 나리. 감사합니다요. 복 받으십시오! 복 받으십시오!”
흑립인은 그렇게 인파에 파묻혀 조용히 거리에서 사라졌다.
**
휘영청 달이 떠올랐다.
석검영은 나뭇가지 위에서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장원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계속 지켜보던 방에서 불이 꺼졌다.
벌써 며칠 째 그는 이렇게 이곳에 올라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연설연의 방이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은 서로 은밀하게 만나서 평화회담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부모님께 부딪쳐 좌절되고 말았다.
더욱이 연설연은 그날 이후로 아예 외출이 금지되었는지, 장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이따금씩 그녀가 호위 무인과 다투는 듯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아마도 통제 받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가진 모양이었다.
‘연 소저…!’
석검영은 아련한 눈길로 불 꺼진 그녀의 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째서 연정을 품으면 안 될 상대란 말인가?
정말이지 지금의 상황을 보면, 과거 부모님이 섬검목가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는 게 허황된 전설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긴, 마족대전에서 공을 세운 이유로 멸마궁이 두 가문에 마공석을 하사한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니리라.
길게 한숨을 내쉰 석검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달빛이 시리다.
그는 나뭇가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버지가 눈치 채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자신이 몰래 빠져나온 걸 알게 되시면 노발대발하면서 사슬낫이 날아들 것이다.
가볍게 경공을 펼쳐 이동하던 그가 순간 우뚝 멈췄다.
슈슈슈슈슉!
그의 주변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누구요?”
“그녀를 만나고 싶다면 따라오시오.”
밑도 끝도 없는 말.
하지만 석검영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바로 연설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미간을 팍 구겼다.
“웬 놈들인데 입을 함부로…!”
“멸마궁, 백화단이오.”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온 사내가 무뚝뚝하게 말을 뱉었다.
유독 눈빛이 날카로운 사내는 바로 백화단 부단주 등가휘였다.
그가 증명이라도 하듯 명패를 들어 보였다.
틀림없이 멸마궁 백화단을 상징하는 명패였다.
“백화단이 어째서…? 그녀는 어디에 있소?”
석검영의 음성이 누그러졌다.
등가휘가 시선을 저만치 장원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지금쯤… 빠져나오는 중일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