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628화 (외전) (628/670)

# 628

귀환 마교관

628화(외전 01)

아름다운 꽃을 보면 대개의 인간은 그것을 꺾어서 소유하고 싶어진다.

그 순간 꽃의 생명이 다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깐의 아름다움을 홀로 소유하고자 한다.

천일문(天一門)의 장문인 여태범(呂太範) 역시 그랬다.

그는 눈앞의 여인에게서 시종 눈을 떼지 못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만고절색(萬古絶色), 침어낙안(沈魚落雁)….

그 어떤 미사여구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도 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라.

크고 맑은 눈과 오뚝한 코,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단정한 자태.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다움.

‘꺾고 싶다….’

여태범은 그렇게 생각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빙그레 웃음 지었다.

“합비(合肥)에 무관을 세우고 싶다고?”

“네. 이곳에 무관을 열려면 귀문에 먼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 딱 부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여인을 보면서 여태범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누가 그런 되도 않는 소문을….”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여태범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 눈길만으로도 여태범은 호흡이 가빠질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꺾고 싶은 꽃이다.’

그는 음흉한 속내를 숨기면서 짐짓 수염을 쓸며 근엄하게 말했다.

“본문은 그저 이곳에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려는 자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려는 것일 뿐일세.”

“그렇군요. 그럼 제가 제대로 찾아온 거군요.”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네. 본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무관을 열려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할 텐데.”

“어느 정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여태범이 찻잔을 내리고는 옆에 선 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총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신하게 다가와서는 서류를 들고 읽어 내려갔다.

“정착비로는 은자 십만 냥, 치안유지비로는 매달 은자 오백 냥, 무관유지비가 일 년에 일만 냥, 과실면책비가 일 년에 이만 냥입니다. 총 십삼만 냥에서 치안유지비를 일 년치 선납하면 십삼만오천 냥으로 조정해드립니다. 만약 십년 치를 선납하면, 이 모든 혜택을 백만 냥으로 영구 보장해드립니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금액이었다.

백만 냥이라니…!

여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생각보다는 침착한 반응이었지만, 여태범은 그런 그녀의 당혹감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뛰쳐나온 암고양이로고.’

여인이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입을 열었다.

“치안유지 같은 경우는 본관이 알아서 할 수 있을….”

“아니 될 말이지. 자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이 강호는 매우 험난하다네. 섣불리 뛰어들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지. 반드시 본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안일세.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그 뒷일을 책임질 수 없으니 무관 개관을 도울 수 없다네.”

말이 좋아 돕는다는 표현을 쓴 것이지, 한 마디로 치안유지비를 강제로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즉,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관 개관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

여태범을 물끄러미 보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면 과실면책비는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자네의 무관이 어떤 실수나 과오를 저질렀을 때, 본문이 그것을 잘 수습해 주겠다는 뜻일세.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

“본관의 잘못을 어떻게 귀문이 수습할 수 있는 거죠?”

“허허, 자세히 말하기에는 조금 곤란하이. 다만 본문은 여러 수완을 두고 있다네. 해서 본문에 이러한 상납금을 내는 문파는 그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큰 문제없이 잘 넘어갈 수 있다네.”

“어떤 문제든 말입니까?”

여인의 질문에 여태범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문제든.”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곳 합비의 왕은 바로 나다. 그러니 내게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하라.

천일문이 합비에서 권세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삼십 여 년 전부터다.

그 전까지만 해도 천일문은 그저 그런 중소 규모의 문파였다.

한데 삼십 여 년 전부터 중원에 마족이 출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혼란의 시대가 천일문에게는 오히려 기회를 주었다.

강호 영웅들이 마족을 물리치기 위해서 헌신하는 동안, 천일문은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은밀히 마족을 지원하기도 하고, 마족의 요구에 따라 강호인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련산에서 마족과의 최후 대전이 벌어지던 날, 합비의 명망 높은 문파의 수장들은 선천지기까지 소진했고, 그로 인해 각 명문은 급속도로 쇄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강호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영웅들을 위해 멸마궁이 최대한 힘을 썼지만, 그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영향이 미치지는 못했다.

대신 마족의 앞잡이가 되어 활동하다가 한껏 웅크리고 있던 천일문은 그때부터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문파가 쇠락의 길을 걷는 틈을 타서 그들은 빠르게 성장해 갔다.

그리고 오늘날, 지금 합비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대문파가 되어 있었다.

한편, 여태범 곁에 선 총관은 여인의 눈치를 가만히 살폈다.

이상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사람 보는 눈만큼은 탁월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만큼 눈치가 빠르다는 뜻이다.

상대의 눈빛과 호흡, 작은 표정의 변화.

이러한 것들만 봐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한데 눈앞의 이 여인은 도무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연하다.

물론 조금 전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어딘지 의식적인 반응처럼 느껴졌다.

여태범의 음흉한 시선이 다시 한 번 여인을 훑어 내렸다.

“어떤가? 백만 냥이면 이곳 성도에서 평생을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다네.”

마치 큰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여태범이 말했다.

아주 잠깐 여인의 눈빛에 가소로움이 스쳤지만, 여태범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그 곁에 선 총관만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기에는 여인이 너무 젊었다.

여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아. 생각보다 금액이 너무 많이 드는군요.”

“뭐, 일시불이 아니어도 괜찮네.”

“그렇다고 해도 좀….”

여인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찌 보면 여인은 시종 차가운 표정이었는데, 지금의 저 모습만큼은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다.

여태범이 눈짓을 하자, 총관이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여태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쉽지 않지. 원래 세상사가 그렇다네. 나는 자네처럼 어린 무인이 섣불리 강호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다칠까 봐 걱정이 된다네. 그래서 더욱 자네를 지켜 주고 싶네. 내 딸 같아서 하는 말일세.”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생각보다 침착한 반응에 여태범은 이채를 띤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

곤란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

저 당당함을 보니 오히려 더욱 꺾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여태범이 천천히 여인의 등 뒤로 다가가서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초면의 여인에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의 동작은 늘 그랬던 것처럼이나 자연스러웠다.

“왜 없겠나? 세상사가 어렵지만 그만큼 헤쳐 나갈 방법과 길은 다양하지.”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여인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서 앞만 응시한 채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노기까지 서려 있었지만, 여태범은 느끼지 못했다.

아니, 그는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본능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태범의 손길이 어깨를 쓸면서 여인의 목을 어루만졌다.

“자네 정도 나이면 잘 알 텐데.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쓰지.”

여태범의 손길이 이젠 옷깃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정말이지 과감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합비에서만큼은 그가 바로 왕이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도 그를 거스를 수 없다.

이미 막대한 재력을 축적했고, 수많은 강호 고수들을 고용한 그였다.

그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려울까?

이 한 떨기 꽃은 오늘 자신의 손에 꺾일 것이다.

이미 그녀가 이 방안으로 들어온 순간 정해진 일이었다.

분명 그럴 진데….

“이제 그만 손 떼지? 죽기 싫으면.”

여태범의 손길이 흠칫 굳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맞나,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칼날보다 예리한 눈빛을 보자니 가슴 한편이 절로 서늘해졌다.

“안 들려? 손 떼라고.”

여태범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기세에 눌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노망이 난 거야? 귀가 어두운 거야?”

여인이 차갑게 말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범은 기가 찼다.

저 어린년이 미쳐 돌지 않고서야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순간 여인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슈슈슈슈슉!

천장에서 그림자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면서 여인을 에워쌌다.

여인이 곁눈질로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놈들도 한꺼번에 나오라고 해. 어차피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뭐? 무슨….”

“천일문주 여태범. 합비에서 그동안 뇌물 수수 등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권세를 악용한 죄. 아니, 그전에 마족 앞잡이 노릇이나 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으니 전 재산을 몰수하고, 그간 온갖 악행으로….”

“뭐, 뭐라는 거야? 이년이!”

“아, 됐고. 넌 여러 가지로 현행범이니까 즉결 심판하겠다.”

“이런 미친년… 네년이 뭔데….”

“나? 멸마궁 백화단주(白化團主) 사비란이다.”

그제야 여태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백화단주…!”

그제야 여태범은 자신이 제대로 걸렸다는 걸 자각했다.

쉽게 말해 멸마궁의 백화단은 과거청산 조직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깨끗하게 되돌린다 하여 ‘백화단’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여태범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가 물었다.

“이곳엔 자네 혼자 온 것인가?”

“보다시피.”

사비란이 입매를 살짝 비틀며 대답했다.

여태범의 입매도 말려 올라갔다.

“그렇군. 하하하!”

여태범이 파안대소했다.

확실히 아직 어려서 겁이 없는 모양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홀몸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마침 그의 귓가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 장원에는 다른 삼자가 없다는 보고였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저 건방진 여자를 처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다.

증거만 깨끗하게 없애면 된다.

적어도 이곳 합비에서는 그럴 만한 능력이 된다.

여태범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년을 쳐라!”

순간 사비란의 입매가 비틀렸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래야 내가 좀 더 마음 편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

다음 순간, 사비란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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