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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627화 (완결) (627/670)

# 627

귀환 마교관

627화

대마괴의 체액, 리자드맨의 발톱, 웨어울프의 피, 고블린의 침, 그 외에도 마공석과 마계수의 진액 등.

다양한 액체가 담긴 호리병이 방안에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마계수에 기생하여 자라던 버섯도 있었고, 마계화 된 지역에서 자라난 잡초나 나무 열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조합해서 만든 영단이 탁자 위에 가득했다.

그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만약상 노파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중원에서는 볼 수도 없는 것들이 널려 있군요.”

“이 정도면 만족하겠나?”

사비강의 말에 노파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생각보다 양이 좀 적은 감은 있습니다.”

“최상품만 모은 것이다. 내가 보증하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노파가 두 손을 맞잡고 비비며 입을 헤벌쭉 찢었다.

이것들은 당장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매우 귀한 재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원의 영약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천하제일의 영단을 만들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단을 만들 수도 있다.

평생 귀한 약재만 팔아 온 노파였다.

진백만큼 좋은 영약을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단을 만드는 문제라면 또 다르다.

사실 마족과 사투를 벌일 때만 해도, 그들을 물리치고 살아서 돌아만 갈 수 있길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은 여생을 욕심 없이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년이 아닌가?

평생 멸마궁에서 봉사하며 지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자 점점 그 각오가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녀는 사비강을 찾아갔다.

충성을 바쳤으니, 이제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사비강은 별로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약속한 대로 내어 줄 건 내어 주겠다는 반응이었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파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자,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이제 이걸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약을 제조할 생각입니다. 그도 아니면, 이게 필요한 자들에게 판매를 해도 좋겠지요. 어쨌거나 마계에서 건너온 약재 중에서는 최상의 상품을 우리가 보유하게 됐으니까요.”

사비강은 노파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녀의 눈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숨어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은 그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 기회가 많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훈련을 일절 하지 않은 채 욕망을 채우기만 하면서 달려온 자들은?

누구보다도 욕망에 찬 괴물이 된다.

만약상 노파가 바로 그런 자 중 한 명이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 또한 그녀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 지는 뻔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리라.

자신이 파는 물건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 지는 관심 밖이리라.

마족과도 거래를 할 자들이니 오죽하랴.

만약상 노파가 사비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럼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것들은 곧 저희들이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역시 시원시원하시군요.”

노파가 히죽 웃고는 돌아서려고 하자,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궁금하지 않나?”

“무슨….”

“내가 이렇게 망설임 없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너희들이 이걸 가지고 나쁜 일에 보탬이 되는 걸 교관으로서 용납하지 못할 텐데도.”

노파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건 아무래도 저희를 믿기 때문이 아닌지….”

“천만에.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사비강이 차갑게 웃자, 노파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하면 어째서…?”

“언제든 다시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야. 내가 원한다면, 중원 어디에서든 이것들을 다시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지. 물론, 이것 뿐만은 아니지만.”

노파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그녀는 사비강의 눈빛에서 다하지 못한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너희들의 목숨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

한 마디로 처신을 제대로 하란 뜻.

만약 귀한 물건을 가져가서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일조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새, 새겨듣지요.”

노파가 식은땀을 흘리고는 허리를 조아렸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직이 말했다.

“그래야 할 거야.”

**

“오늘로 논공행상을 모두 끝냈습니다. 전리품은 그 결과에 따라 공평하게 배분했습니다.”

구윤의 보고에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공평하게라. 아마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자들도 있을 거야.”

구윤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사비강의 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구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논공행상이었다.

아무리 정확한 기준과 잣대로 평가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서운함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과분함을 느끼리라.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그리고 받는 자들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적어도 마족에게 빌붙어서 동료에게 칼을 든 자들에 대한 벌은 확실해야겠지. 적어도 위험을 감수하며 이 강호를 지키려고 했던 자들이 박탈감은 느끼지 않도록.”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구윤이 허리를 깍듯하게 숙였다.

그렇잖아도 최근 마족의 앞잡이가 되었던 문파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많은 문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사비강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그 바람에 강호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됐지만, 정작 그들의 문파와 가문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비열하게 몸을 사리거나 마족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문파들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이번 참전으로 인해 힘이 약해진 문파들을 최대한 지원하고, 마족의 앞잡이가 되어서 강호 동도들에게 칼을 들이민 문파는 철저히 조사해서 벌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구윤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비강이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창밖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았다.

이 평화를 이용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또 생기리라.

아무리 정화하려고 해도 멸마궁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으리라.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야만 한다.

어쩌면 이 일이 마족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어려우리라.

문득 마왕 타란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사비강이 깊어진 눈으로 저만치 하늘과 맞닿은 산자락을 응시했다.

**

풍등 수백 개가 떠오르면서 밤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등마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멸마궁이 추모제를 지내는 날.

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사망자가 수십만 명이었다.

강호의 역사가 세워진 이래 가장 많은 무인이 희생당했다.

때문에 추모제는 시종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혹자는 입술을 꾹 깨물었고, 혹자는 엉엉 목 놓아 울기도 했다.

그 흐느낌이 전염되다시피 번져 갔다.

그들의 눈물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마침내 승리했다는 환희, 마족에 대한 분노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그리움….

“무슨 생각하니?”

풍등을 올려다보던 목단화가 옆에 선 설서린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뻔한 대답일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그리워할 설수민은 자신을 지키려다가 죽었기에.

‘미안해….’

목단화는 가만히 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설서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제… 그만 놔주어야겠지?”

어딘지 슬픔이 묻은 그 목소리를 듣자, 목단화는 목구멍에 뭔가가 콱 걸린 것만 같았다.

설서린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누군가 그러더라. 풍등으로 추모를 하는 건… 그 사람을 정말로 하늘 높이 놔주는 거라고. 그러니 이제 너도… 그만 놔도 돼.”

결국 목단화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뭐냐고… 갑자기 왜 날 울리는 거냐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설서린이 그렇게 생각해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은 아마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리라.

설서린이 눈가에 이슬을 머금고 물었다.

“그럴 수 있지?”

“노력해볼게.”

“노력하지 말고 놔주라고.”

“…응?”

“이제 그만 놔주라고. 제발 그만 떨어지라고. 어엉?”

어느새 설서린의 표정이 불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목단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설서린이 입매를 비틀었다.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이제 그만 낭군님을 떠나보내라고. 낭군님은 내꺼야.”

‘하… 이 미친년… 또 시작이구나….’

“내 말 안 들려? 풍등까지 날렸으면 이제 그만 놔드려야 할 것 아냐!”

“어휴, 잠깐이나마 감상에 젖은 내가 바보지! 풍등 날리면서 왜 궁주님 타령이냐! 이년아!”

“왜긴! 네 풍등에 궁주님 이름을 내가 몰래 적었거든.”

설서린이 히죽 웃자, 목단화가 버럭 소리쳤다.

“이 미친년! 왜 남의 풍등에 장난질이야!”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세상 진지하거든!”

발끈하며 소리치는 설서린을 두고 목단화가 고개를 저으며 풍등을 올려다보았다.

‘저… 죄송해요. 역시 얘하고는 절친이 될 수 없나 봐요.’

**

“어느새 저 둘은 절친이 되었군.”

궁주실에서 창밖을 보던 사비강의 말에 곁에 선 매설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참 좋아 보여. 때론 부러울 정도로.”

“부러워? 나로는 부족한가?”

“가끔은.”

“이런… 서운한데?”

“욕심이 많으시네요, 궁주님.”

“그럼, 욕망의 화신이지.”

사비강이 장난처럼 매설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매설란도 장난기 서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마왕도 이런 식으로 안아 주었어?”

“이렇게는 아니지.”

“누구도 모를 거야. 당신이 마왕과 포옹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말하니 어감이 영 이상한 걸?”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비강은 그녀에게 타란트의 사후 의식 세계에 들어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소년이었던 타란트를 안아 주었던 사실까지.

매설란이 사비강을 빤히 바라보며 가녀린 손길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때… 당신이 마왕을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마왕을 죽이긴 했지.”

“사후 의식에서 그 소년을 말하는 거야.”

“그랬다면 아마도….”

확실한 건 없다.

다만 추측컨대, 그 순간 자신은 타란트의 뒤를 잇게 되리라.

“내가 마왕이 되지 않았을까?”

“정말?”

매설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단지 느낌이다.

당시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타란트가 쳐놓았던 마지막 덫은 바로 자신을 마왕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어쩌다 안아 줄 생각을 다 했어?”

“글쎄… 만해경에 이르면 좀 순수해진다고 할까? 오욕칠정에 좀 더 단순하게 접근하게 돼.”

“알 듯 말 듯하네.”

“왜? 내가 마왕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놀랐어?”

“아니, 뭐 그보단….”

“그보단?”

“뭔가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다 싶어서.”

“뭐?”

사비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매설란이 살며시 웃음 지었다.

“뭔가 멋있을 것 같잖아? 당신이 마왕이라면.”

“뭐야? 하하하!”

모처럼 사비강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사비강이 매설란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인간의 아이를 낳아 주지 않겠어?”

“뭐야, 정말 짓궂게. 고백이라면 정말 멋없네.”

“미안. 나는 말보단 행동파라서.”

사비강이 매설란의 입술을 덮쳤다.

매설란은 천천히 사비강을 안았다.

창밖으로 둥실 떠오른 풍등이 환한 불빛으로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그리움과 사랑이 넘치는 밤이었다.

[귀환 마교관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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