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6
귀환 마교관
626화
멸마궁으로 들어오는 수레가 줄을 지었다.
만리장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기나긴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멸마궁 정문에서는 담우기가 혜수각 지자들과 함께 수레에 담긴 물건들을 일일이 살피며 기록하고 있었다.
마침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오. 이렇게 많은 전리품이 생길 줄은 몰랐소.”
그를 힐끔 본 담우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성 자체가 전부 중원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허어, 그런데 실은 그 금속도 ‘마계수’라는 식물이라지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마계수가 자라날 때의 광경을 직접 본 무인들은 그 무서움을 쉽게 떨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긴. 나도 이미 만들어진 흑성을 보았지만, 그때도 입이 딱 벌어졌었소. 한데 그렇게 크고 높은 성이 살아 있는 것처럼 점점 자란다고 생각하면 놀랍고 무서울 만도 할 거요.”
“그래도 이젠 다 끝났으니 후일에 영웅담으로 남길 수 있을 테지요.”
“물론이오. 이게 다 궁주님 덕분 아니겠소?”
담우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
사비강 덕분이다.
하지만 사비강은 분명 모두의 덕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담우기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모두를 바꾼 것이 바로 사비강이었으니까.
고여 있던 썩은 물을 정화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 오래 전, 특목반을 신설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햇수로 따지면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공이 뒤틀려 있던 토이산에서 삼 년을 수련했던 천멸대원이라면 꽤나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만도 하리라.
“그런데… 어느 문파에서 오신 분이신지?”
상대가 생각보다 젊다는 생각에 담우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침 호탕하게 웃은 사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초면이나 다름없는 것 같소. 나는 신생조원이오.”
“신생조…?”
“그렇소. 부군사께서 천멸대원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부군사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신생조에서는 머리 꽤나 쓰는 편이었다오.”
담우기가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신생조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한데 눈앞의 이 사내는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신생조원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 있을 때, 대충이나마 훑어본 적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한 번 본 것을 잘 잊지 않는 담우기였다.
한데 처음 보는 얼굴이니 아무래도 미심쩍을 수밖에.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 챈 것인지 사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부군사께서는 천멸대원이었지만 실제로 귀영단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래서 나도 부군사의 얼굴을 잘 모르고 있었다오. 참고로 내 이름은 ‘등자경’이라고 하오.”
“등자경….”
담우기가 더욱 표정을 구기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조차 낯설다니.
한편 그의 반응에 등자경은 점점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조차 존재감이 없다는 거냐? 너무 하잖아!’
담우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신생조원 명단은 이미 훑어봤는데. 내가 기억을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이봐! 그러니까 진짜 이상하잖아!’
잔뜩 조바심이 난 등자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담우기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잖아도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서러웠건만!
마침내 담우기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내가 본 걸 잊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신생조가 맞습니까?”
‘허어, 이젠 대놓고 자신의 기억력보다 내 존재를 의심하는 건가?’
등자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소. 내 비록 존재감이 미미하긴 하나, 틀림없는 신생조원이오. 부군사께서 날 그리 의심하니 솔직히 좀 불쾌하오.”
“흐음.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명단에 이름이 빠졌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군. 아, 마침 저기 궁주님이 오시는구려.”
두 사람이 사비강을 보고는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궁주님.”
“그래, 고생이 많다.”
“별 말씀을요. 전쟁에서 이기고 얻은 전리품을 쌓는 업무 아닙니까? 이런 일이라면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할 것 같습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물었다.
“구 군사는?”
“초환당에 계실 겁니다. 등 교관님이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셨습니다.”
“그렇군. 나도 가봐야겠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몸을 막 돌리려는데.
“그럼, 들어가십시오.”
옆에 선 등자경이 꾸벅 인사를 올렸다.
사비강이 멈칫하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등자경의 표정이 상기됐다.
‘역시! 궁주님은 날 알아보시는구나!’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그런데… 넌 누구냐?”
“…….”
“…….”
담우기가 나서며 물었다.
“궁주님도… 모르는 자입니까?”
“글쎄. 처음 보는군.”
“신생조라고 하던데요.”
“얘가?”
“예.”
담우기의 대답에 사비강이 턱을 매만지며 등자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아… 모르겠다.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야.”
사비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가 버렸다.
담우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역시 이상하다 싶었소. 당신, 누구요?”
“그러니까 내 이름은 등자경이고, 신생조….”
“끝까지 우기시는군. 최근 마족과 전쟁을 치르면서 쥐죽은 듯 조용히 숨어 있던 무인들이 전리품을 노리고 설쳐댄다던데, 당신도 그 부류인가보군.”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난 분명히 신생조….”
“닥치시오! 수문장!”
담우기가 소리치자, 수문장이 얼른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부군사님.”
담우기가 등자경을 빤히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함께 가 주셔야겠소. 조사를 해야 할 것 같군.”
“아니, 잠깐! 난 정말 신생조라니까! 신생조원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냐!”
등자경이 수문무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크게 소리쳤다.
**
병상에 비스듬히 앉은 등부형은 창밖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너무 좋았다.
얼마 만에 이렇듯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보는 걸까?
‘사비강 궁주가… 결국 해냈구나.’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그 용암이 흐르는 강을 건넜는지 모르겠다.
과연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까?
피식.
아무렴 어떤가?
자신은 해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만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하다.
우우웅. 우우웅.
마침 침상 곁에 세워 둔 칼자루가 공명을 일으키며 울었다.
등부형은 부드러운 눈길로 칼자루를 보았다.
귀혼도.
제 주인을 끝까지 따르는 성질을 가진 녀석.
오래전이었다면 저런 칼을 받고선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으리라.
그리고 얼마 전이었다면 저 귀혼도를 떼어내지 못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저 친구 같구나.’
소유의 대상이 아닌, 그저 친구를 보는 느낌이다.
아마 저 귀혼도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사비강이 두고 간 것이리라.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과 노인이 들어섰다.
“저어… 혹시 여기에 등부형 대협이 계시는… 어?”
조심스레 말을 꺼내며 들어서던 여인이 등부형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본 등부형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분명….”
“아… 등부형 대협?”
“유은설… 소저….”
등부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 이름이 한 번에 떠올랐을까?
그녀는 바로 마지막으로 귀혼도를 자신의 품에 돌려주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잠깐의 동행이었지만 말이 잘 통했고, 워낙 고운 자태였기에 다시 인연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은설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등부형 대협이 맞군요. 동명이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는데.”
“소저께서 여긴 어떻게…?”
“아버지와 저는 이번에 멸마궁에서 일하게 되었거든요. 마침 등부형 대협의 영웅담을 듣고서 이렇게 찾아뵈러 왔답니다.”
“영웅담이랄 것까지야….”
등부형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유은설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살며시 웃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보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신 분 같지가 않아요.”
“허허, 엄청난 일은 아니오. 그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한 일이었소. 다시 하라면 자신 없소.”
“그래도 아마 하실 거예요. 등 대협이라면.”
유은설의 말에 등부형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들뜨다니. 나도 아직 수양이 멀었구나.’
한데 자신의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것이 그녀의 말 한 마디인지, 그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고 나서도 유은설은 등부형과 조금 더 담소를 나누었다.
확실히 얘기가 잘 통했다.
시종일관 칭찬만 하는 유은설에게 등부형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유 소저, 사실 나는 보기와 다른 구석이 많소. 난 소저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오. 나는 과거에 많은 잘못과 실수를….”
“마찬가지예요.”
“예?”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 뿐만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완전무결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러니 지나간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마세요. 저는 지금 제가 보는 등 대협이 중요하답니다.”
“…….”
등부형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유은설을 바라보았다.
워낙 뚫어지게 바라보니, 유은설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사랑해도 되겠소?”
“네?”
유은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다가 자신의 목소리에 다시 놀라 얼른 입을 가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문 닫힌 병실에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말을 꺼낸 등부형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더니 이내 홍시처럼 변했다.
‘으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뜬금없이!’
정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 나온 말이었다.
자신을 향해 조곤조곤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본능적으로 훅 내뱉은 말.
등부형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아, 미안하오. 그게 그러니까 내 말은 그저… 흡!”
등부형이 말을 내뱉다 말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은설이 어느새 다가와 입맞춤을 하는 게 아닌가?
짧은 입맞춤 끝에 유은설이 살짝 떨어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보기와 다른 구석이 많죠? 죄송해요. 기쁜 마음에… 꺅!”
순간 등부형이 유은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길게 입을 맞췄다.
창밖에서 스며든 햇살이 두 사람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
쿵쿵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사비강을 본 진백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었다.
“왜 벌써 내려오는가? 등 교관은 깨어 있을 텐데. 얼굴 보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흥! 너무 팔팔해서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사내새끼들이란 깨자마자….”
“뭔가 화 난 것 같은데?”
“화요? 제가 왜요?”
사비강이 필요 이상으로 소리치자, 진백이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래서 어딜 가나?”
“설란 보러 갑니다!”
“매 총관을?”
“예, 지금 당장 보러 갈 겁니다!”
그렇게 사비강이 쌩하니 나가 버리자,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적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진백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네. 자네는 무슨 일인가?”
“아, 등부형 교관이 깨어났다기에 병문안 왔습니다.”
“그래, 다친 사람에겐 위로가 최고지.”
“그럼.”
적무린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쿵! 쿵! 쿵! 쿵…!
적무린 역시 거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씨근거리는 게 아닌가?
“흥! 위로는 무슨…!”
“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어, 방금 문병 와놓고 어딜 급히 가나?”
“홍묘 님 보러 갑니다!”
“지금?”
“예, 지금 당장 보러 갈 겁니다!”
적무린이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진백이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다들 좋을 때구먼.”
그래, 참 좋을 때다.
이보다 좋은 때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