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귀환 마교관
625화
쿠구구구구궁…!
흑성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콰아앙!
“우왓!”
바로 앞으로 떨어진 거대한 암석에 추량이 비명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돌더미가 마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생명력을 잃은 마계수는 그야말로 강철덩이나 다름없었다.
쿠궁! 쿵! 쿠웅! 콰르르르!
“총관님! 이쪽입니다!”
추량이 매설란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앞서 달리는 반묘를 따라 최대한 경공을 펼쳤다.
하지만 내상을 입은 데다 공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기에 평소만큼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반묘의 버프가 없었더라면, 무너지는 흑성 아래에 깔려 진작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순간.
- 크르러렁!
마침 반묘가 포효를 터뜨리더니 추량을 향해 휙 날아드는 게 아닌가?
‘반묘…?’
추량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
콰아앙!
- 캐애앵!
반묘가 떨어져 내리던 바윗덩이에 부딪치면서 비명을 터뜨렸다.
바윗덩이가 산산조각나면서 깨지는 바람에 추량과 매설란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반묘가 피를 울컥 토하면서 다리를 절었다.
“반묘!”
매설란과 추량이 동시에 소리치면서 달려갔다.
슈우우욱!
반묘가 순식간에 고양이처럼 작아지자, 추량이 얼른 안아들고는 품안에 넣었다.
“고생했다, 이제부턴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어서 가요!”
매설란이 추량을 이끌며 일어났다.
콰르르르르르!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흑성의 터를 가까스로 벗어났을 때.
쿠구구구구구구웅…!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면서 거대한 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쿨럭, 쿨럭!”
“콜록!”
두 사람이 기침을 하면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는 일어났다.
“휴우, 겨우 살았네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다들 어떻게 됐을까요?”
매설란의 걱정서린 말투에 추량이 손으로 먼지를 저으며 앞을 더듬다시피 걸었다.
마침내 언덕 위로 오른 그들의 눈앞에 적나라한 전장의 상황이 펼쳐졌다.
다행히 대마괴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랬다.
대마괴의 존재 자체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죽어간다는 표현보다는 무너져 간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다행히…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총관님.”
매설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입가에 모처럼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비강이 싸우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인지 더 이상의 격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요!”
“네, 총관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마족이 몰락하는 것을 보니, 없던 내력이 절로 솟아나는 듯했다.
마침 용암이 식으면서 바짝 굳어 버린 땅 너머로 검고 커다란 구체가 보였다.
“저건…!”
매설란과 추량은 그 검은 구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비강이 존야와 싸울 때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현상과 비슷했기에.
직접 보지 못했어도 익히 들은 적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마지막 싸움 중인가 봅니다.”
검은 구체 가까이에 다가선 매설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했다.
사비강을 믿는 것인지, 여기까지 작전대로 이끌고 온 군사를 믿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모두를 믿는 것인지.
그녀가 한쪽에 떨어져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기다리죠. 그가 모든 상황을 정리할 때까지.”
“그럼, 저는 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마지막까지 보태 봐야죠.”
추량이 눈치껏 빠져 주자, 매설란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하하! 별 말씀을요!”
말을 마친 추량이 몸을 훌쩍 날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매설란이 다시 검은 구체로 시선을 옮겼다.
‘기다릴 게.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
아들러는 소년에게 뭔가를 건네주더니 귓속말을 남기고는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한 사람.
사비강은 이곳이 타란트가 인간이었을 때의 세계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타란트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타란트의 사후 의식 세계.
이곳은 한 마디로 자신을 위한 시험 무대.
타란트의 말대로 여기에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그는 되살아날 수 없겠지만 자신의 미래가 바뀌리라.
사비강은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마침 고개를 든 소년과 사비강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소년은 조금 이색적인 옷차림을 한 사비강이 낯선 듯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짐승과도 같은 본능이 있기 때문인지 그는 곧 저돌적인 자세로 변해 사비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를… 방해하지 마!”
“타란트.”
“뭐…?”
생소한 이름에 소년이 미간을 좁혔다.
사비강이 그 앞에 섰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 한 줌의 내공이 맺혔다.
지금이라면…!
앳된 소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올려다보았다.
약간은 겁먹은 듯한.
주춤주춤 물러나는 소년.
사비강이 그 소년을 압박하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지금이라면 이 아이를 죽여서 중원에서 일어날 재앙을 미리 막을 수 있으리라.
악의 탄생.
돌이켜보면 간단하지 않은가?
인류 최대의 무기가 ‘공감력’이라고 했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감을 받지 못한 아이가 얼마나 큰 괴물이 되는지.
사비강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이잇!”
타앗!
소년이 사비강을 치고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랐다.
아니, 놀랄 정도로 빨랐다.
아마도 아들러가 그에게 마력으로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만해경에 이른 사비강을 따돌리기는 어려운 일.
사비강은 소년의 뒤를 쫓았다.
한참을 달린 소년이 마침 왕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의 난간에서 멈췄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소년은 자신을 쫓아오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며 멸시했지만, 이렇게 집요한 살의를 가진 자는 없었기에.
그저 눈에 보이면 괴롭히는 정도였다.
한데 낯선 외모에 이상한 옷차림을 한 저 남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살의를 보내오고 있었다.
게다가 끝까지 자신을 쫓아왔다.
뒷걸음질을 치던 소년의 허리가 난간에 턱 걸쳤다.
뒤를 돌아보니 왕국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곳곳에 불이 밝혀진 왕국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포근해 보였다.
“내게 동정이라도 원했던 건가? 타란트.”
어느새 자신을 바짝 쫓아온 사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년은 도대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잘 아느냐?”
소년이 흠칫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딱 나쁜 짓을 하려다가 들킨 아이의 표정이었다.
잠깐 시선을 내리고 머뭇거리는 아이에게 사비강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난 너를 막을 수밖에 없다.”
그러자.
“도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거죠?”
“…….”
“저들과 나는 태생이 다르다고요! 모두가 나를 경멸한다면, 나 역시 그들을 경멸해 주겠어! 짓밟고 망가뜨려 주겠어! 내 삶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들고 소리치는 소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사비강은 그런 소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째서인가?
존야도 그랬고, 능운파도 그랬다.
절대 악을 처리할 때면 늘 기분이 찢어지도록 좋을 줄 알았건만.
악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자화상을 관찰하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사비강이 한 걸음 다가섰다.
소년이 무심코 물러서려다가 등이 난간에 부딪치자 얼른 품에 손을 넣고 뭔가를 꺼냈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것을 보았다.
라겔의 주머니.
‘과연 아들러가 건네 준 것이었나?’
소년이 라겔의 주머니에서 데블 파이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이걸 터뜨려버릴 거야.”
사비강이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지독한 고독과 슬픔, 소외, 절망 등 온갖 어두운 감정들이 녹아 있었다.
소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인간들의 몰살이었다.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 절망의 끝자락에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자신의 백성을 무더기로 바친 녀석, 사사로운 욕망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힘을 취한 자, 너처럼 모든 이에게 소외되어 세상을 증오하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던 소녀. 확실히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이 가진 오욕칠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 그것은 양날의 검. 네가 가진 그 감정이라는 검을 어찌 쓰는가는 너에게 달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는 그걸 잘못 다루고 있다. 너의 무기가 아닌, 자해의 도구로.”
“후후. 하하하!”
소년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웃기지 마라! 사비강! 과연 교관이라서 그런가? 마지막까지 계도하려드는구나! 하지만 그것이 너의 패착이다! 이제 나의 승리다!”
타란트의 목소리였다.
소년이 광기 들린 웃음을 짓더니 라겔의 주머니를 들고 휙 들어올렸다.
이제 돌아서면서 주머니를 뿌리는 순간, 수많은 데블 파이어가 창공에 흩뿌려질 터였다.
타닷!
사비강이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잇!
순간, 자신을 덮쳐 오는 사비강을 보면서 소년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나를 죽여라, 사비강!’
그런데 다음 순간.
“……!”
라겔의 주머니를 든 소년이 퀭한 눈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동상처럼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뭐…?”
사비강이 소년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알아주지 못해서.”
사비강의 무겁고 딱딱한 목소리가 소년의 심장을 찔렀다.
소년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내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슨 짓이냐! 나를 죽이란 말이다! 사비가아앙!”
하지만 사비강은 더욱 힘주어 소년을 끌어안았다.
진심을 다해서.
툭…!
소년의 손에서 라겔의 주머니와 데블 파이어가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비강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너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래봬도 내가 교관이기 때문이다.”
사비강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소년이 울먹이더니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나를… 죽이란… 말이야….”
소년은 서럽게 흐느꼈다.
목이 마를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슈르르르르!
소년의 몸이 잿더미처럼 변하더니 서서히 바람결에 휘날렸다.
주변을 가득 채운 이계의 전경도 그렇게 희미해지면서 사라져 갔다.
사비강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고개를 들었을 때, 매설란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설란….”
그의 부름에 매설란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끝났어?”
사비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
“고생했어.”
“당신도.”
두 사람이 천천히 가까워지며 서로를 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라이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