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0
귀환 마교관
620화
푸욱!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마족 경비병이 털썩 쓰러졌다.
촤아앗!
매설란은 검을 한 차례 휘둘러서 피를 털어내고는 검집에 갈무리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서 수많은 마족 경비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임에도 불구하고 경계 상태가 철통같았다.
옆에서는 추량이 반묘의 등에 거의 업힌 상태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몇 명이나 상대하면서 내려왔을까?
계단은 끝이 없는 듯했다.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 이러다가 영원히 지상으로 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려가고 내려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다가 마침내 바닥이 나타났다.
“헉, 헉, 헉…! 만약 더 내려가야 했다면 전 아마 포기했을 겁니다.”
계단의 폭은 비교적 넓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수가 한꺼번에 덤벼올 만큼 넉넉하진 않았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 혈투를 벌여 가며 계속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엄청난 추위.
하지만 거듭된 전투로 인해 두 사람은 온통 땀 투성이었다.
매설란이 추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다 왔어요. 계속 갈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요! 이 정도로 제가….”
당당하게 말을 뱉던 추량이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만약 순간적으로 반묘가 버프해 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매설란이 피식 웃었다.
“무리하지 마요.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니까.”
“절대 무리 아닙니다. 저는 사부님께 특명을 받았습니다.”
“특명?”
“예! 반드시 총관님을 지키라는!”
매설란이 부드럽게 웃었다.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알려드릴게요.”
추량이 자세를 추스르고는 품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단숨에 들이켜고는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 남은 포션이었다.
어느 정도 힘을 비축한 추량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선이라… 이렇게라도 해야죠. 제 인생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든 걸 내려둔 녀석도 있는 걸요.”
흑귀를 두고 한 말이다.
처음 흑귀가 그간 쌓아온 무공을 모두 포기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강호를 위한 일이라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그의 각오에 경외감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늘 서로가 더 낫다며 티격태격했는데, 이젠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 왠지 씁쓸했다.
“안 올 거예요?”
매설란이 불쑥 외치는 소리에 추량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달려갔다.
“갑니다!”
두 사람은 석벽 한쪽에 네모반듯한 통로 입구에서 멈췄다.
“이 안에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군요.”
추량이 말을 받자, 매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경비병들이 계단을 지키고 있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반묘가 훌쩍 몸을 날리면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묘가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 그르르릉…!
나직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이 긴장한 채 모퉁이를 돌아섰다.
반묘는 어느 방 입구에 서서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문이 따로 있진 않았다.
“여긴…?”
매설란이 미간을 곱게 좁히고는 지하실 안쪽을 응시했다.
꿈틀꿈틀… 움찔움찔…!
너른 지하실 안쪽의 벽과 천장 군데군데 세워진 기둥이 연신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지하실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장기 같았다.
“여기일까요?”
“글쎄요. 들어가 봐야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커다란 기둥 때문에 시야의 범위가 좁았다.
그들은 기둥을 이리저리 끼고 돌면서 미로 같은 지하실을 한참이나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빽빽하게 솟은 기둥들이 사라지고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을 때.
“엇! 저기…!”
추량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에는 유독 크고 굵은 기둥이 있었는데, 마족으로 보이는 존재 하나가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마치 기둥에 부조로 새겨 놓은 조각처럼 전신의 절반 정도만 도드라져 나와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튀어 나온 촉수 같은 것은 커다란 기둥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저자가… 아들러…?”
대략 사비강으로부터 들은 인상착의와 비슷했다.
“듣던 대로 추악하게 생겼네요.”
추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설란은 마른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혹시 어디에서 뭐가 날아들지 몰라서 주변을 잔뜩 경계한 채.
추량 역시 기감을 한껏 끌어올리고는 마나검과 마나방패를 펼쳤다.
추량이 매설란에게 전음을 보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하는 걸까요?]
[글쎄요. 이 구역을 마계화해서 마족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중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 저렇게 집중하고 있을 때, 확 날아가서 단숨에 목을 그어 버리죠?]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목을 긋는다고 해서 상대가 죽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겉모습만 보더라도 기둥과 하나가 된 것처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만 볼 수도 없는 노릇.
매설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칠 테니, 엄호해 줘요.]
[맡겨 주십시오!]
추량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매설란이 막 바닥을 박차려는 순간.
“손님이 왔군.”
탁한 목소리가 아들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매설란과 추량이 움찔거리고는 기둥을 보았다.
기둥에 절반쯤 파묻혀 있는 아들러가 마침내 눈을 뜨더니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인간이 오다니… 과연 강호인들은 놀랍군.”
매설란이 미간을 구겼다.
“손님이 온 걸 알았으면 이제 접대를 해야지?”
아들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야겠지만 보다시피 내가 좀 바쁘다네.”
“그럼 죽어야지.”
팟!
순간 매설란이 바닥을 차고는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츄츄츄리리리리릿!
느닷없이 바닥과 천장, 벽과 기둥에서 수백 개의 촉수가 튀어 나오면서 매설란을 향해 날아드는 게 아닌가?
“헛!”
- 크르러렁!
깜짝 놀란 추량이 매설란에게 달려가면서 마나검과 마나방패를 휘둘렀고, 반묘가 포효를 터뜨렸다.
쑤아아아앙!
후아아아앙!
쉬커커컥!
따다다다당!
매설란의 연검과 추량의 마나검에 촉수들이 잘려 나가고, 마나 방패에 의해 또 다른 촉수들이 튕겨 나갔다.
한 차례 공방이 끝나자, 아들러가 빙그레 웃었다.
“과연. 훌륭하다. 그렇게 접대를 원한다면 바쁜 중이라도 해드려야지.”
“직접 나설 생각은 없나 보군.”
매설란이 차갑게 말하자, 아들러가 입가를 치켜 올렸다.
“이래 봬도 이 공간이 곧 나와 다름이 아닐세. 나는 이것들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 그러니 나라고 생각하고 즐겨 주시게.”
그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자.
꾸물럭… 꾸물럭…!
두 사람을 에워싸며 주변 바닥에서 점액질이 솟구쳐 올라오며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추량과 매설란이 자연스럽게 등을 지고 섰다.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뒤는 걱정 마시고, 마음껏 싸우십시오.”
“추 호위 뒤도 걱정 말아요. 내가 지켜줄 테니.”
매설란의 대답에 추량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감, 감사합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추 호위’라고 불러준 것이.
게다가 총관이 직접 그렇게 부르니, 정말로 호신위로 인정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
‘지금까지는 늘 혹 같은 기분이었는데. 크흡. 목숨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한편 두 사람을 에워싸면서 나타난 여덟 개의 형상은 모두 아들러 백작을 꼭 닮아 있었다.
“분신인가…?”
눈살을 구기고 중얼거리는 매설란에게 아들러가 말했다.
“너희들이 아는 분신과는 다르다. 저것들은 곧 나 자신이나 다름없으니.”
“그렇다면 더 잘 됐군.”
“과연 그 생각이 얼마나 이어질지 보지.”
“잔말 말고 덤벼!”
그녀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여덟 명의 아들러가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사방팔방에서도 수백 개의 촉수가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하아아앗!”
기합성을 터뜨린 매설란이 그대로 쌍검을 휘두르며 날아갔다.
취취취리리리링!
연검 두 자루가 춤을 추었다.
허공에 뿌려진 섬광은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마구 날아드는 촉수들을 무자비하게 썰어 버렸다.
싹둑싹둑 잘려 나간 촉수들은 그대로 땅바닥에 질척하게 녹아들면서 사라지곤 했다.
추량 역시 마나검과 마나방패를 휘두르며 아들러와 촉수들을 상대했다.
만약 누군가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수백 가닥의 촉수를 상대하면서도 열덟 명의 아들러를 물리치는 두 사람.
그들의 손발은 눈으로 쫓기도 힘들 만큼 빨랐다.
그리고 반묘가 커다랗게 포효하면서 연신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적을 물어뜯어 갔다.
츄츄츄츄츄츗!
콰콰콰콰콰콰!
- 크르러렁!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꽈르르르르르릉!
갑자기 천둥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바닥과 천장이 격하게 떨렸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을 향해 쉴 새 없이 퍼부어지던 촉수들도 주춤거렸고, 협공을 하던 여덟 명의 아들러도 잠깐 중심을 잃었다.
한편 기둥에 파묻히듯 흡수되어 있는 아들러는 두 눈을 번쩍 뜨면서 허연 동공을 드러내고는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크읍…!”
아들러가 잠깐 신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마왕 타란트는 열두 악신을 모두 몸에 녹여서 격변하는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들러가 만들어낸 기운을 최대한 끌어당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들러는 그만큼의 힘을 갑자기 빼앗긴 상태.
그리고 매설란은 그런 아들러의 변화를 눈치 채고는 재빨리 사사검법을 펼쳤다.
“하아아앗!”
기합성과 함께 두 자루의 연검이 허공을 할퀴었다.
곧이어.
츄카카카카칵!
변형된 사행기검이 바닥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뱀이 여덟 마리… 아니, 여덟 마리가 열여섯 마리로 나눠졌다.
그리고 다시 서른두 마리에서 예순 네 마리….
급기야 총 백이십팔 개의 강기가 각각의 방향을 구불거리며 뻗어 갔다.
반묘의 버프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촤촤촤촤촤촤촤아악!
강기에 난자당한 촉수와 아들러의 분신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쓰러져 갔다.
매설란이 소리쳤다.
“추 호위! 지금이에요!”
“알겠습니다!”
- 크르러러렁!
추량이 바닥을 차며 화살처럼 날아갔고, 거기에 맞춰 반묘가 커다란 포효를 울렸다.
매설란이 그 뒤를 이어 날아올랐다.
마침내 허공으로 도약한 추량이 마나검을 내질렀다.
“죽어어엇!”
쒸아아아아앙!
마나검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뻗어 나갔다.
그런데….
“헛!”
쒸이이이이익!
추량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촉수를 보았다.
아니, 촉수라기에는 쇠붙이처럼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었다.
아들러의 이마에서 자라난 그것은 추량의 마나보다도 길고 빨랐다.
‘당한다…!’
위기를 감지한 추량이 재빨리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푸우욱!
워낙 빠른 속도로 자라난 가시였기에 추량은 미처 피할 수 없었다.
“크아악!”
쇠붙이 같은 가시가 그의 가슴을 관통하며 지나가자, 뒤이어 달려들던 매설란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추 호위!”
“저보단 놈을…!”
바닥으로 추락하면서도 추량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아들러를 죽여야 한다.
저 징그럽게 생긴 놈에게 수십만 강호인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매설란이 이를 악물고 그대로 연검을 뿌렸다.
퀴리리리리리리릿!
두 자루의 강기가 그대로 아들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아들러의 얼굴에서 수백 개의 돌기가 툭툭 불거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츄츄츄츄츄츄우웃!
무수한 가시가 되어서 그대로 뻗어오는 것이 아닌가?
츄카카카카카카카각!
마력으로 뒤덮인 가시는 강기마저 깨트리며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매설란의 몸을 덮쳤다.
푸푸푸푸푸푸푸푹!
“아아아악!”
“총관님!”
쓰러진 추량이 잔뜩 커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들러의 얼굴에서 자라난 가시는 그대로 매설란의 온몸에 박히면서 기둥까지 밀어냈다.
콰자아악!
“커어억!”
기둥에 처박힌 매설란의 입에서 피가 울컥 토해졌다.
아들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너희 인간의 절망만큼이나… 나를 기쁘게 하는 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