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
귀환 마교관
613화
꽈다아앙!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비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다시 한 번 구덩이가 움푹 생겨났다.
“쿨럭!”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사비강이 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그가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쳐내고는 타란트를 노려보았다.
암담한 상황.
정면에 서 있는 타란트는 그야말로 넘지 못할 벽 아니, 깎아지른 산이었다.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무공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 중 단 하나도 타란트에게 위협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조소만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절망감이 깊어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자신이 무너지면 여기 있는 백만의 무인들은 전멸이다.
매설란도, 천멸대도, 신생조도.
사비강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타란트의 입가에 다시 한 번 조소가 서렸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몰랐나? 인간이 생각보다 미련하다는 것을.”
“생각보다? 아니. 너희 인간은 딱 생각만큼 미련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사비강이 조소를 하고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통하지 않는다면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그간 타란트를 상대하면서 수많은 상상 속 훈련을 해왔다.
그 상상 속에서 새로운 무공을 창출하기도 하고, 다른 무공을 섞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단기간에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고심하다가 만들어낸 최후의 한 수.
역시나 기존의 무공을 최대한 융합해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앞서 사비강이 사용한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앞서는 몇 가지 초식의 순서를 섞어서 연환식을 펼쳤다면, 지금 그가 사용하려는 방법은 초식을 모두 융합하여 하나의 초식으로 새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즉, 단 일 초에 섞인 초식들이 변초나 허초의 형태로 발동된다고 볼 수 있다.
저벅…!
사비강이 한쪽 발을 뒤로 빼면서 무게를 실었다.
처음에 시도할 것은 유성폭기검과 화산파의 절대 검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성추월검(流星追月劍)을 융합한 새로운 초식이다.
타란트가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또 새로운 시도가 남았나?”
“말했잖아. 인간은 생각보다 미련하다고.”
“그럼 내게 그 미련함을 보여라, 슈비츠.”
“거절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바닥을 차듯 달려 나가면서 검을 뽑아냈다.
짜르르르르릉!
단지 검을 뽑아내는 것에 불과한데도 천둥 치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베르타스가 빛살처럼 사선으로 날아올랐다.
촤아아아악!
꽈과과과앙!
그야말로 떨어지는 유성보다 빠른 속도로,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강기가 날아올랐다.
사비강은 타란트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다음 초식을 연환식으로 펼쳤다.
이번에 그가 펼친 초식은 패검연가의 파석비룡에 사천당가의 만천화우를 융합시킨 것이었다.
촤라라라라라락!
만천하에 꽃잎이 무수하게 떨어져 내렸다.
물론 이는 닿기만 해도 상처가 나고 중독될 수 있는 강기의 파편들이었다.
일전에 만독불침지체가 된 사비강은 현재 천해경의 끝자락까지 올라서면서 자유자재로 독공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였다.
타타타타타탕!
독기를 품은 강기의 파편들이 마구 터져 나가면서 검붉은 연무를 피워냈다.
동시에 파석비룡이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바닥까지 내려찍었다.
꽈자르르르릉!
벽력이 지상을 때린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그 바람에 주변을 감싸듯 흐르는 용암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춤을 추듯 했다.
“훅, 훅, 후욱!”
사비강이 숨을 몰아쉬었다.
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융합된 상승무공을 연환식으로 사용하다 보니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비강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연무 속을 응시했다.
걸렸을까?
사실 기대는 없다.
파석비룡을 펼쳤을 때, 손끝에 뭔가가 걸린 느낌이 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자면, 강기로 펼쳐낸 만천화우다.
푸스스스…!
검붉은 연막이 서서히 흩어질 때쯤,
슈우우욱!
갑자기 안개 속에서 손바닥이 휙 날아들었다.
“헛!”
사비강이 얼른 베르타스를 휘두르며 바닥을 찼다.
하지만.
까앙!
금속성과 함께 베르타스가 허공에 멈췄다.
타란트가 만들어낸 마력검이 베르타스를 막아낸 것이다.
대신 타란트의 손은 그대로 사비강의 가슴을 쳐냈다.
꽈아앙!
슈우우우욱, 꽈다아앙!
포탄처럼 튕기듯 날아간 사비강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면서 쓰러졌다.
‘제길!’
욕지거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동안 그토록 준비했건만 이렇게까지 밀리다니!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저벅저벅…!
타란트가 다가오는 소리.
하지만 조금 전의 일격에 당하면서 일시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은 사비강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애처롭군, 슈비츠. 조금은 더 잘 싸워 주길 바랐는데. 그래도 너는 지금껏 내가 흡수한 그 어떤 인간보다도 강하다. 아니, 그 어떤 마족보다도 강하다. 그리고….”
콰악!
“크읏!”
타란트가 사비강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축 늘어진 사비강이 타란트의 손에 매달린 채 시체처럼 들어 올려졌다.
타란트가 사비강을 들어 반투명한 막 너머로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게 했다.
“네가 준비한 제물들 역시 훌륭하고. 저걸로 너의 부족함을 위안으로 삼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타란트…!”
사비강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존심 때문일까?
사비강은 말을 뱉어내면서도 그 말의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대로 끝나지 않으리란 어렴풋한 희망만 되새길 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
근거 없는 자신감?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타란트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전장을 보여준 것이 오히려 희망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지금껏 패색에 젖어 절망했다면, 오히려 대마괴에 당해서 죽어가는 백만 무인들을 보면서 묘한 희망이 생겨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희망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인지는 사비강도 알 수 없었다.
타란트가 피식 웃었다.
“미련하군. 확실히 생각보다 미련한 건지도. 보아라. 이것이 너희 인간의 운명이다. 죽어가는 자들이 보이는가?”
“시끄러….”
“너 역시 내가 만든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확실히 사비강으로서도 그건 충격적이었다.
자신을 일부러 과거로 회귀하도록 내버려두었다니.
하지만….
“말했잖아. 인간은 생각보다… 미련하다고!”
쑤아아아아앙!
사비강이 내력을 다시 끌어올리며 베르타스를 휘둘렀다.
그렇게 그는 꺼져 가던 불씨를 가까스로 다시 되살렸다.
**
치이이이이익…!
만년한철로 된 두꺼운 금속 장치를 열자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앞에 모인 신수각의 대장장이들은 저마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인류의 희망을 담을 그릇이 만들어지는 순간.
조신량은 벌도 날아 들어갈 만큼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얀 연기가 희미하게 사라지는 순간, 조신량은 금속 틀에서 모습을 드러낸 투명한 기기를 확인했다.
그가 금속 집개를 들어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길고 둥근 원통형에 바늘처럼 생긴 것이 솟아나 있었다.
“드디어 기공압입기가….”
조신량의 목소리가 떨렸다.
완성됐다.
기공압입기는 중원인들이 보기에는 무척 생소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처음 이 물건의 도면을 그렸을 때는 과연 통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진백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진백은 이 장치를 ‘주사기(注射器)’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조신량은 ‘기공압입기’라는 이름으로 정정했다.
어쨌거나 마공석을 연공하여 만든 기공압입기가 온전한 형태를 갖춰 나오자, 신수각의 대장장이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됐다! 됐어! 드디어 완성이다!”
“이걸로 궁주님을 도울 수 있겠어!”
“와아! 정말로 그 마공석을 연공해서 이렇게 만들어 내다니! 이제 정말…!”
“다들 조용!”
조신량이 버럭 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서 바슈크의 해머를 가지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각주님!”
누군가 대답하더니 얼른 달려가서는 바슈크의 해머를 들고 왔다.
일전에 사비강이 거상으로부터 어렵사리 찾아서 건네준 그 해머였다.
조신량이 기공압입기를 찬물에 한 번 담갔다가 금속판 위에 올려두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찌나 무거운지, 근방의 제자들이 하나 같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침내 조신량이 바슈크의 해머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하아앗!”
그가 기합성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바슈크의 해머를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조신량의 눈동자가 한 번 더 커졌다.
그제야 그의 입에서 모두가 기다렸던 말이 터져 나왔다.
“됐다…!”
“와아아아아아!”
신수각의 대장장이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다들 기도나 하고 있어라. 나는 이제 그곳으로 가겠다.”
조신량이 품에서 마지막 남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이걸 사용하면 더 이상 중원에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가 이동할 좌표는 무랑이 술법을 통해 정확히 알려 주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들어 올리는 조신량을 향해 대장장이들이 어울리지 않는 포권을 취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각주님! 다녀오십시오!”
그들 주변으로는 용광로에서 뜨거운 불길이 연신 뿜어지고 있었다.
**
“희망의 불씨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선 가망이 보이지 않는군요.”
천리경을 내린 구윤이 착잡한 심정으로 읊조렸다.
“이익!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직접 나섭시다!”
“그럽시다! 더 이상은 지켜볼 수가 없구려!”
“강호 동도들이 죽어 나가고 있소. 여기서 우리가 구경만 해서야 되겠소?”
이젠 구윤도 은기륭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사비강이 죽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공압입기라는 것을 만드는 데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
무랑 역시 착잡한 심경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마침내 연강백이 말했다.
“구 군사. 모든 계획이 어찌 생각대로만 돌아가겠소? 우리의 뜻을 부디 막지 말아 주시오.”
“그렇소. 우리 역시 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차선책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소? 더 이상은 강호 동도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 없소.”
“우리가 강호의 운명을 구할 수 없더라도 최후의 발악은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구윤은 가만히 전장을 응시했다.
확실히 강호 명숙들이 이렇게 지켜만 보는 것은 인력 낭비다.
그렇다고 이들이 당장 뛰어들어 전세를 역전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이들도 죽을 것이다.
이들은 그저 지켜만 보는 것 자체가 힘들 뿐이다.
싸우다 죽을지언정 비겁하게 살아남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구윤이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그때였다.
파짓! 치지지짓!
갑자기 허공에서 기의 파장이 일어나더니 거짓말처럼 누군가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한 남자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호오, 과연 신기한 기물이로다.”
감탄하듯 중얼거린 사람은 다름 아닌 조신량이었다.
그의 손에는 영롱한 빛깔을 품은 기공압입기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