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4
귀환 마교관
604화
칼바람에 맞서며 한 남자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가을이었지만, 기련산은 뼛속까지 시린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저벅저벅…!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꾸준히 움직이는 사람은 바로 등부형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귀혼도가 매여 있었는데, 이따금씩 웅웅 우는 소리를 내지르곤 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
그가 고개를 들고 언덕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저 위에 올라선다면 뭔가 보이리라.
아까 전부터 강렬한 기운이 저 언덕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마침내 그가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였다.
후우우우우웅!
“와아아아아아아!”
마주치는 바람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함성이 들려오면서 마족들과 어울려 싸우는 무인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장과 여기까지는 거리가 제법 됐지만, 사람들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이곳까지 생생하게 그 기운이 전해지고 있었다.
먼발치 먹구름이 가득한 곳에는 흑성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마왕이 머무는 곳…!’
그때.
우우우웅! 우우우웅…!
귀혼도가 격렬하게 몸을 떨어댔다.
등부형이 귀혼도를 힐끔거리고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결국 네놈 때문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곧 네놈이 마음껏 활개를 치도록 해주마.”
정말이지 귀혼도는 등부형의 손에 꼭 맞았다.
그간 보도에 대한 집착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귀혼도는 등부형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가 베고자 마음먹으면 베었고, 그가 기운을 일으키고자 마음먹으면 그 이상의 강기를 발현시켰다.
그랬다.
강기가 발현됐다.
지금까지는 검기만을 형성하던 그였는데, 귀혼도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어느 순간 검강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등부형은 격렬하게 떨어대는 귀혼도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다음 순간.
스르르르릉!
그가 검을 뽑아 들자, 매끄러운 검신이 시린 빛을 발하며 예기를 뿜었다.
“이제 한바탕 설쳐 보자꾸나!”
파밧!
등부형이 바닥을 차고는 언덕을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갔다.
**
비명과 피비린내가 자욱한 전장.
“시건방진 인간들! 모조리 쓸어버려라!”
마족 기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쓸어버리니 마니 한단 말이냐!”
우렁차게 외치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곡보옥이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마족 기사를 향해 그대로 손을 뻗었다.
따앙!
놀랍게도 마족 기사의 검이 곡보옥의 팔에 맞으면서 튕겨 나갔다.
“아니?”
마족 기사는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곡보옥을 보았다.
곡보옥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사비강 궁주님을 사사한 몸이란 말이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꽈아앙!
곡보옥의 주먹이 그대로 마족 기사의 투구에 날아들었다.
투구가 그대로 깨져 나가면서 마족 기사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저 돼지 새끼를 족쳐!”
어느새 근처에 있던 마족 기사들이 곡보옥을 향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포위를 당한 곡보옥이 혀를 찼다.
“칫! 이제야 이 몸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나보구나.”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포위를 당하니 조금 막막하긴 했다.
한 명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마족 기사가 둘 이상이면 조금 버거워진다.
한데 넷, 다섯… 여덟…
무려 아홉이다.
‘조금은 난감한데.’
그때였다.
휘이이익!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가 싶더니, 곡보옥의 곁으로 한 사람이 내려섰다.
“어이, 내 친구보고 돼지 새끼라고 부른 게 누구야?”
바로 조문탁이었다.
마족 기사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보았다.
포위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누구도 막지 못했다는 시실에 당황하는 듯했다.
찰나.
파바바밧!
마족 기사들이 일시에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쒸에에에엑!
시커먼 마력이 폭사되는 그 순간.
“하아아앗!”
조문탁이 기합성을 터뜨리자, 그의 허리춤에 빼곡하게 박혀 있던 검은 돌기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피피피피피피피융!
투퍼퍼퍼퍼퍼퍼퍽!
강기로 똘똘 뭉친 돌기는 그대로 마족 기사들을 관통하면서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잠시 후.
촤라라라라라락!
검은 돌기들이 거짓말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조문탁의 허리춤에 박혔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던 마족 기사들은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멈춰 버렸다.
이윽고.
“끄으윽…!”
신음을 흘린 마족 기사 하나가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더니 바닥에 이마를 쾅 찍고 말았다.
곧 다른 마족 기사들도 전신에 뚫린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더니 털썩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휴우, 좀 무리했더니 어지럽군.”
조문탁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하자, 곡보옥이 버럭 소리쳤다.
“인마, 겨우 한 번 써먹고 그러면 어떡해? 또 내가 업고 다녀야 하는 거냐?”
“야,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그 정도 못해 주냐?”
“그럼 뭐하냐? 매번 내가 널 다시 구해줘야 하는데!”
“거참, 까다롭게 굴지 말자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안 그래?”
“으이그! 말이라도 못하면!”
“헤헤. 등 좀 빌릴 게.”
“꽉 잡아라. 떨어져도 안 줍는다.”
“걱정 붙들어 매셔.”
말을 마친 조문탁이 몸을 훌쩍 날리더니 곡보옥의 등에 찰싹 매달렸다.
남이 보면 무척이나 이상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전장에서 늘 이런 식으로 싸우곤 했다.
한편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연우경과 염자량이 서로 등을 진 채 마족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열둘.”
연우경이 말하자, 염자량이 피식 웃었다.
“겨우 열둘? 나는 열여섯이다.”
죽인 적의 숫자다.
연우경이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기사만 센다.”
“당연한 말을.”
“흥! 곧 따라잡아 주지!”
말을 마친 연우경이 바닥을 차면서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순간 마족 기사들이 연우경을 향해 검을 휘둘러 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달려들자.
휘리리리릭!
연우경의 몸이 회전하면서 돌풍처럼 날아올랐다.
패룡단천검의 초식 중 하나인 승룡대천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승룡대천과는 차원이 달랐다.
검을 둘러싼 기운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 한기.
연우경이 만들어낸 것은 빙룡(氷龍)이었다.
승룡대천과 청빙검의 기운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제 그는 청빙검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퀘레레레레렝!
빙룡이 승천하자, 그 기운에 휩쓸린 마족 기사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크읍!”
“조심해라!”
하지만 이미 승룡대천에 휩쓸렸던 마족 기사들은 한기의 영향을 받아 몸이 상당히 둔해진 상태.
연우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어서 파석비룡을 펼쳤다.
쉬카아아앙!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린 빙룡이 바닥에 낮게 깔리듯 날면서 전방의 마족 기사들을 휩쓸어 갔다.
쉬쩌저저저적!
“크으읍!”
강기의 줄기에 얻어맞은 마족 기사들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몸이 굳어 갔다.
“자량!”
연우경이 소리치자, 염자량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렇잖아도 이 몸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버럭 소리친 염자량이 그대로 흑패도를 땅에 내려찍었다.
“그라운드 웨이브!”
어김없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이었다.
흑패도의 힘에 실린 그라운드 웨이브 마법이 전방으로 거침없이 뻗어 갔다.
쿠콰콰콰콰콰콰콰!
얼어붙었던 땅바닥이 연신 출렁거리면서 파도를 일으켰고, 그 위에 선 마족 기사들은 강기가 섞인 마법에 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크아아악!”
“우아아악!”
마족 기사 사이에 섞여 있던 몇몇 마물들은 아예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산산조각 나면서 터져 나갔다.
퍼퍼펑!
한 차례 격전이 끝나자, 염자량과 연우경이 서로를 보면서 동시에 소리쳤다.
“내가 죽인 거다!”
“내가 죽인 거다!”
연우경이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다냐?”
“무슨 소리! 뭐든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지!”
“이제 보니 지금까지 네가 죽였다는 놈들은 다 이런 식이었구나!”
“웃기지 마! 지금까진 제대로 내가 처음부터 죽였다고!”
“그럼 이번엔 제대로 된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거군!”
“무, 무슨 소리! 내가 죽인 건 사실이지!”
두 사람이 옥신각신할 때였다.
뿌우우우우우!
마침 후방에서 긴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퇴각 신호!
구윤이 작전을 알려 온 것이다.
“칫! 다음엔 네놈과 절대로 협공하지 않을 거다.”
“누가 할 소리!”
두 사람이 서로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홱 돌리고는 달렸다.
**
쏴아아아아!
마치 썰물이 빠지듯 무인들이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곧 협곡을 따라 달렸다.
제법 너른 규모의 협곡이었기에 수십만에 달하는 무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도 딱히 비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후방의 언덕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마지막 순간, 신호를 보내도록.”
“네, 군사님.”
비령이 대답을 하고는 품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
가장 선봉에 섰던 매설란은 호신위들과 함께 제일 마지막으로 협곡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삐이이이익, 파앙!
후방에서 신호탄이 쏘아져 올라왔다.
뿌우우우우!
곧 이어진 뿔 나팔 소리!
샤샤샤샤샤샥!
순간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쏴라!”
단리정이 명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활시위를 놓았다.
패애애앵!
쒸쒸쒸에에에엑!
그 직후 궁수들이 동시에 활시위를 놓자, 하늘이 시커멓게 매워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인간들을 뒤쫓던 마족들은 하늘에 가득 드리워진 화살 떼를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그들이 미처 후퇴할 틈도 없이.
쿠콰콰콰콰콰콰아앙!
폭음이 들리면서 천지가 격동했다.
궁수들의 화살촉에는 폭렬단을 가공해서 만든 폭약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뿌우우우우!
다시 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양쪽 절벽 위에서 또 다른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저마다 뭔가를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툭, 투두두둑…!
솔방울 같은 것을 꺼내 던진 무인들이 저마다 절벽 위에서 달아나듯 흩어졌다.
잠시 후.
꽝! 꽈아아앙! 꽈과아앙!
연신 폭발이 일어나면서 폭렬탄이 터져 나갔다.
그 바람에 절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
쿠쾅쾅쾅콰앙!
양측 절벽이 무너지자, 그 사이에 있던 마족들이 그대로 함몰되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
무인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물론 이걸로 적을 섬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일차 공방전에서는 승리를 취한 셈이었다.
그때였다.
투콰아아앙!
저만치 보이는 흑성에서 갑자기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림자 셋이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바로 마왕 타란트와 능운파 그리고 사비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