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0
귀환 마교관
590화
구윤은 절벽 아래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마병들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켰어야 할 자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을 잃은 채 괴물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남편이었을 테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그들이다.
누군가의 아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딸, 또 누군가의 어머니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겐 오로지 강함을 추구하고, 약자를 짓밟고자 하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언제 적인가 지금처럼 구윤이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나?”
능운파가 불쑥 물었다.
구윤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불쌍하다는 생각보단…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흥! 쓸데없는 감정이군.”
“마족이 된 맹주님은 그게 쓸데없는 감정일지 모르나, 인간인 저로서는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는 감정이겠지요.”
“한 마디 하자면, 저들을 저리 만든 건 자네도, 나도 아니다. 마족도 아니지. 그저 저들 자신일 뿐. 저들 심연에 숨어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결국 인간의 심연에 악한 욕망이 있어서 저렇게 되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저는 인정할 수 없군요.”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돌아보았다.
“어째서?”
“인간은 누구나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 충동과 욕망을 조절하는 것은 평생의 숙제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서로 돕고 견제합니다. 서로가 충동과 욕망을 잘 절제할 수 있도록. 하지만 마족들은 인간의 그런 마음을 이용해서 마병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악한 마음보다, 그 악한 마음을 이용하는 행동입니다.”
능운파가 구윤을 가만히 바라보자, 구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나 성인군자가 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되지요.”
“하지만 이 세상엔 노력도 안 하는 자들이 많지. 그리고 본인은 노력했다고 착각하는 놈들도 많고.”
구윤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 봐야 이견이 좁혀지진 않을 것이다.
능운파는 결국 공감력을 상실한 마족일 뿐이니까.
모든 생각이 자신의 기준에서만 결정되리라.
마침 저만치 아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구윤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마병들 중 몇몇이 시비가 붙었는지 싸우고 있었다.
단순히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몹시 격한 싸움이었다.
결국 마병 하나가, 다른 마병 하나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나서야 싸움이 멈췄다.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
괜히 마음만 착잡해진 구윤은 몸을 돌리고는 숲속의 낡은 집으로 향했다.
능운파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었다.
능운파가 거처를 떠난 지는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는 비헤더즈와 함께 바리탄을 제거하러 나섰다.
지금쯤 어떻게든 결판이 났으리라.
아마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리라.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구윤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또 마병들을 보고 있었나?”
능운파였다.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것인지, 옷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구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예, 잠시 바람 좀 쐬었습니다.”
“그 쓸데없는 감상은 언제쯤이나 집어치울 수 있겠나?”
“신경 쓰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다녀오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어떨 것 같은가?”
능운파의 표정과 말투만 봐도 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바리탄의 악신을 흡수하지 못하셨군요.”
“놈이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건…?”
구윤이 모른 척 묻자, 능운파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말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하더군.”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면….”
“공간이동을 말하는 거다.”
“아…!”
능운파가 구윤을 보며 눈살을 가늘게 여몄다.
“사비강과 함께 지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도 할 텐데. 전혀 모르는 눈치군.”
“아직 마계 도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군사가 모르는 것도 있군.”
구윤이 쓴 웃음을 짓고는 답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바리탄을 찾아내기만 하면….”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를 놈을 어떻게 찾아낸다는 건가? 부상을 입은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는데.”
“비헤더즈는 어찌 되었습니까?”
“전멸했다.”
“아….”
구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예상대로다.
그때, 능운파가 구윤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바리탄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바리탄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별로 놀란 눈치는 아니더군.”
구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 땀을 느꼈다.
능운파는 분명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순간 구윤은 갈등했다.
지금 자칫 잘못 대응했다간 능운파가 단숨에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능운파의 전신에서는 감추지 않은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윤이 애써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바리탄이라면 그 정도 대비는 해두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가? 언제적인가 자네가 한 말이 있지.”
“어떤….”
“군사는 추측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정확한 근거에 의한 확신이 있을 때만 행동한다고.”
“…….”
구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능운파는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오늘따라 자네는 추측을 많이 하는군. 자네답지 않게.”
“…….”
“이왕 추측하는 것, 바리탄이 어디에 있을 것 같나? 자네 추측이 그리 정확하니, 이번에도 왠지 맞출 수 있을 것 같네만.”
우웅. 우우웅. 우우웅.
능운파의 손바닥 위에서 시커먼 마력이 원반 형태로 맺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날아와서 구윤의 목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구윤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려는데,
“주군! 보고 드립니다!”
문득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구윤 옆으로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구윤은 그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창신단주 이자준이었다.
“바리탄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다만….”
“무엇이냐?”
능운파가 쌀쌀한 목소리로 묻자, 이자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바리탄이 사비강에게 당했습니다.”
순간 능운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먹잇감을 놓친 것에 대한 분노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했다.
그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구윤을 돌아보았다.
“…라고 하는군. 어떻게 생각하는가? 군사.”
구윤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물었다.
“사비강 궁주님이 거기에 있었습니까?”
“…….”
능운파가 어디 한 번 떠들어 보라는 듯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구윤이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사비강 궁주가….”
찰나.
“나를 우습게 보는가!”
쾅!
능운파가 주먹을 내려치자, 탁자가 산산조각 나면서 부서져 나갔다.
곧이어 구윤의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휙 날아갔다.
콰악!
“크읍!”
능운파의 손가락이 구윤의 목 줄기를 파고들었다.
구윤은 금방이라도 목이 뚫려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컥… 컥! 맹, 맹주…님…!”
“자네를 마지막으로 믿겠다고 했지. 하지만 자네는 이번에도 내게 실망만 주는군.”
“커억…!”
“자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할 텐가?”
구윤은 더 이상 변명이나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능운파의 눈빛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컥…! 큭! 사,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슈우우욱, 콰다앙!
한쪽 구석까지 날아간 구윤이 잡기들을 부수면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끄윽…! 쿨럭, 쿨럭! 허억!”
구윤이 목을 쥐고는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뱉어낸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목이 부은 탓인지 호흡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얼른 내공을 운기해서 목의 붓기를 최대한 뺐다.
무공이 높은 경지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 응급처치는 할 수 있었다.
능운파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구윤을 보았다.
“말하라.”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목소리.
구윤은 겨우 호흡을 고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여기서 자신의 계략이 통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겠지.’
구윤이 심호흡을 하고는 능운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위기에 처했던 사람 같지 않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제 계략이었습니다.”
구오오오오…!
능운파의 전신에서 사악한 기운이 휘몰아치듯 일어나고 있었다.
분노가 그대로 마력이 되어 버린 듯했다.
“계속.”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바리탄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리탄과 비헤더즈를 제거한 것이 사비강 궁주님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유는?”
“맹주님이 사비강 궁주를 죽여야 하니까요.”
“내가 사비강을 죽인다?”
“지금쯤 마왕은 맹주님을 의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루시달 공작에 이어서 비헤더즈까지 죽었다.
그리고 바리탄은 사비강이 죽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마왕이 자신의 배신을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맹주님이 사비강 궁주의 시체를 들고 흑성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구윤이 얼른 말을 붙였다.
“물론, 진짜로 사비강 궁주를 죽이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위장이지요.”
“위장을 한다면?”
“사비강 궁주님께는 ‘사령환’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을 복용하면 죽은 시체와 다름없어집니다.”
“계속.”
“사비강 궁주의 시체를 들고 간다면, 맹주님의 충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는 것과 동시에, 마왕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도는 해볼만 하군. 마왕이 순순히 속아 줄지 의문이지만.”
“마족은 중원의 영약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들이라고 전지전능하진 않다는 걸 맹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긴.”
능운파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족이 전지전능하진 않다.
어쩌면 사령환이 통할지도 모른다.
구윤의 눈빛이 반짝였다.
“더구나 마왕이 속든지 안 속든지, 시체를 한 번 보긴 할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면서도 아무런 방해 없이 마왕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지요.”
말을 마친 구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자신의 운명을 정말 하늘에 맡겨야 한다.
아니, 능운파의 손에 맡겨야 한다.
여기까지 얘기했음에도 능운파가 자신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
감정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능운파의 시선이 구윤에게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숨 막힐 듯한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능운파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던 마력이 희미해지더니, 그의 입이 열렸다.
“더 이상은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쉰 구윤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맹주님은 하나만 확실히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사비강 궁주와 함께 마왕을 급습하는데 성공한다면, 반드시 중원을 떠나 주시는 것 말입니다.”
능운파가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건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그럼 다음 작전은 언제 시행할 건가?”
“조금만 기다리면 멸마궁에서 먼저 연락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