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86화 (586/670)

# 586

귀환 마교관

586화

“텔레포트 스크롤?”

바리탄이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알아 둬라. 결코 네깟 놈 때문에 이걸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흥! 그깟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이면 애초에 당당하게 승부해라!”

파밧!

능운파가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간 검은 오러 줄기와 검이 바리탄을 마구 폭격했다.

찰나지간.

부우우욱!

바리탄이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어발겼다.

쿠콰콰콰콰콰콰쾅!

쿠구구구구구구궁!

오러 줄기와 검강이 폭사하자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푸스스스스스스!

먼지구름이 서서히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꾸라지 같은….”

능운파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빈자리를 응시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어디로 간 거지?’

**

“헉, 헉, 헉…!”

바리탄은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낮은 언덕을 오르는데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힘에 겨웠다.

꽤나 많은 마력을 내공으로 치환해서 소진한 데다 여기저기 입은 부상이 꽤 깊었다.

일전에 일살이 자신의 방에 침입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텔레포트 스크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결과는 그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능운파는 하운트를 죽이고 악신까지 흡수한 상태.

반면 자신은 비헤더즈를 상대하면서 깊은 부상을 입은 데다 마력을 꽤나 소진한 상태였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는 순간까지도 어디로 이동할 것인지 고민했다.

소환지로 이동해도 안전하지 않으리라.

그곳에도 마왕의 수족이 진을 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흑성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역시 그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바로 여기였다.

사비강이 말한 안전 구역.

위급한 상황 속에서 가장 최근에 들은 장소가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뒤늦게 존야가 머물던 그 꽃밭으로 채워졌던 분지를 떠올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쿨럭, 쿠웨에엑!”

바리탄이 허리를 숙이고 한 차례 피를 토해냈다.

붉은 핏물에 녹색 액체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힘겹게 언덕에 오르니 저만치 대나무가 빽빽한 죽림(竹林) 앞에 정자가 보였다.

사비강과 회담을 했던 장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자연스레 오래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 그날도 이렇게 천근만근의 발걸음을 옮겼었지.

차갑게 식어 버린 발터를 눈 속에 파묻은 날.

추격자들을 무아지경 속에서 섬멸했던 그날도 지금만큼이나 부상을 많이 입은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그날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버지와 발터의 혼이 자신을 지켜 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삼천 년을 벼르고 별러서 반역을 일으켰다.

전대 마왕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이유로 반역자가 되어 참수당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였다.

아버지는 복수 따위는 잊고 지내라 하였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굳이 아버지의 복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망가뜨려 놓은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날도 죽음을 직감했다.

감히 마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즉결 참수를 당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마왕은 자신을 바로 처단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소울비드에 봉인되어서 이계로 떨어질 수 있는 기회.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옥에 갇혀 지내느니, 바늘구멍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게 나았다.

바리탄은 바늘구멍에 운명을 걸었다.

자신의 육신은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둔 채 소울비드에 혼을 봉인했다.

그렇게 또 살았다.

화신은 존야였다.

운명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돌이켜보면 존야의 삶은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어려서부터 원인도 모른 채 만인에게 쫓겨 온 삶.

그래서일까?

존야와 호흡이 잘 맞았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됐다.

그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반역을 계획하고 하나씩 이뤄 갈 때 아니, 그전부터 용병 생활을 하면서 마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바리탄은 존야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그녀를 이용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리탄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저 유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그런 것치고는….

“또 이 모양이네….”

바리탄이 입술을 질끈 씹고는 정자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웠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꿈쩍하기도 싫었다.

‘지쳤나…?’

바리탄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하긴.

지칠 만도 하다.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또 이렇게 살아남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소멸의 위기를 겪으면서 살아남았던가?

아마도 마왕에게 반기를 들고도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유일하리라.

그 오래 전, 발터의 시신을 묻은 날부터, 반역을 일으켰던 날,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래, 악착같이 살아남으리라. 싸우고 싸워서 모든 것을 내 뜻 아래에 두리라!’

바리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휴식은 이만하면 됐다.

이제 다시 움직여야 할 때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난 바리탄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했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저 아래에서 누군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익숙한 기운.

바리탄이 쓴 웃음을 그렸다.

“마치 기다린 것 같군.”

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리자, 언덕을 올라선 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다렸지.”

그는 바로 사비강이었다.

바리탄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비강의 눈빛에서 투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바리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예상하고 있었나? 마왕이 날 칠 거라는 것을.”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탄이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가끔 사비강을 볼 때마다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종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바리탄이 호흡을 고르면서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우리에겐 제법 유능한 군사가 있지.”

“그 애송이를 말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 녀석은 지금 능운파에게 있을 텐데.”

“그렇지. 능운파에게 있지.”

“한데 어떻게…?”

“그러니까 알 수 있었지. 널 제거하라는 마왕의 명령을 능운파가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 어떻게 왔지?”

“아…!”

바리탄이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거다.”

사실 사비강 스스로 생각해도 구윤의 계책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를 구하고 군사로 삼기로 결정할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데 작금의 상황이 전부 구윤이 세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가?

능운파를 만나러 가기 전, 구윤은 자신을 찾아와 말했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스크롤을?”

“제가 맹주님 곁에 있으면서 수시로 궁주님께 보고를 드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될 듯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때문에 사비강은 군말 없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구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며칠 전, 구윤은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해서 멸마궁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순간이동을 체험한 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연 기물은 기물이군요. 놀랍습니다.”

그러더니 사비강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왔다.

“조만간 맹주님이 바리탄을 칠 겁니다. 비헤더즈와 함께 바리탄을 제거할 계획입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는군.”

“이번에 루시달 공작이 전사하면서 흑성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바리탄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적당히 시간을 끄시고 그에게 안전 가옥에 대해서 알려 주십시오.”

“안전 가옥?”

“일전에 바리탄과 밀담을 나눴던 그 정자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거기에 무랑 도사님이 술법으로 타인의 접근을 불허한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럼 바리탄도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구윤이 고개를 저었다.

“잊으셨군요?”

“무슨…?”

“궁주님께서 일살의 몸에 빙의되었을 때, 텔레포트 스크롤을 한 장 가지고 가셨지요.”

“아…!”

사비강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일살은 그곳에서 죽고, 자신의 혼만 귀환한 것이니 텔레포트 스크롤은 그대로 바리탄의 방에 남았으리라.

그렇다면 그 텔레포트 스크롤을 바리탄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구윤이 말을 이었다.

“바리탄은 그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자입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서 그곳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저는 바리탄이 궁주님을 만나는 날에 맞춰서 능 맹주님을 움직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왕이면 비헤더즈도 확실한 정황을 포착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좋을 테니까요.”

“만약 능 맹주가 바리탄을 압도적으로 제거하게 된다면?”

구윤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인가?”

“생각하신 것처럼 맹주님은 바리탄의 악신을 흡수할 계획입니다. 그러니 비헤더즈의 손에 바리탄이 죽길 바라지 않지요. 그렇다면 결국….”

“묘한 싸움이 되겠군. 결국 틈은 벌어질 테고….”

“그 틈을 바리탄이 놓칠 리가 없지요. 안전 지역으로 이동하고 나면 궁주님이 확실히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

그날 사비강은 구윤의 계략에 내심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앞에는 바리탄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여자였을 줄은 몰랐군.”

“그게 중요하더냐?”

바리탄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결코 이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지난 수천 년간 참 질기게도 목숨을 연명하며 지내왔다.

위기의 순간에 늘 바늘구멍을 돌파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그 작은 구멍을 뚫고 지나가리라.”

바리탄이 나직이 읊조렸다.

사비강이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인간이 하는 가장 흔한 착각 중에 하나가 바로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결국 마지막 우연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조차 잊어버리거든.”

바리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인간이기에 그런 것. 나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벼락처럼 날아갔다.

쉬이이이잇, 쩌어엉!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금속성이 터졌다.

동시에 기파가 사방으로 훅 퍼져나가면서 대나무들이 우수수 잎을 떨어뜨리며 우는 소리를 질렀다.

솨아아아아아아아!

대나무 잎이 휘날리면서 사비강과 바리탄 사이를 지나쳤다.

바리탄은 흩날리는 대나무 잎에 지나간 세월의 기억들을 실어 날려 보냈다.

둘의 시선이 잠깐 얽힌 후.

촤촤촤촤촤촤촤촤앗!

두 자루의 검신이 빠른 속도로 오가면서 공방을 이뤄 갔다.

신기한 것은 난잡할 정도로 검신이 서로 섞이는 데도 마찰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주변을 흩날리던 이파리만이 무수히 잘게 쪼개지고 있었다.

금속성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 명이 요혈을 노리고 검을 내지르면, 다른 한 명이 그 검을 마주쳐 가면서 방어한다.

하지만 먼저 공격했던 자는 검로를 비틀어 다시 요혈을 공격한다.

이에 방어하던 자가 또 한 번 검로를 틀어 상대의 요혈을 먼저 선점하거나, 다시 검봉을 마주쳐 방어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서로가 검을 부딪치지 않으면서 무수한 살검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싸움의 연속.

솨아아아아아아!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들은 계속해서 잘게 쪼개져 갔다.

바리탄은 이 소리 없는 공격과 방어에 모든 혼을 실었다.

사비강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분명 어려운 상대였다.

기억의 편린처럼 잘려 나간 이파리들이 가루처럼 흩날릴 때.

쉬이이이잇!

사비강의 공격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검이 바리탄의 급소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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