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5
귀환 마교관
575화
의자에 앉은 바리탄이 손바닥을 펼쳤다가 오므리길 반복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하운트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카르트의 악신을 흡수했다. 한데….”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셨습니까?”
바리탄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족끼리 전투를 하다가 심장을 뽑아 죽일 경우, 상대를 가호하는 악신을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흡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자신을 가호하는 악신과 우선 상성이 잘 맞아야 한다.
이 경우 세 가지 가능성이 생긴다.
가장 좋은 경우, 상대의 악신을 그대로 흡수해서 자신을 가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대의 악신을 흡수하되, 기존의 악신들의 힘이 보강되는 경우다.
비슷한 계열의 악신일 경우 이런 식으로 흡수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안 좋은 경우는 악신의 권능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되는 경우다.
이럴 경우에는 악신 간의 상성이 맞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상성은 흡수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기에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대입할 순 없다.
일단 시도해 봐야 알 일이다.
한데 자카르트를 가호하는 악신과 바리탄을 가호하는 악신 사이에 상성이 썩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겨우 악신 하나만 흡수했을 뿐이다.
나머지 악신은 소멸됐다.
그렇다곤 해도 현재 바리탄을 가호하는 악신이 여섯이나 되니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보통 공작을 가호하는 악신이 최대 여섯, 대공을 가호하는 악신이 최대 일곱이다.
그리고 마왕을 가호하는 악신은 열둘이다.
그러니 바리탄은 이미 웬만한 공작에 작위에 해당하는 권능을 가진 셈이었다.
하지만…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만큼 사비강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한다.
마족이 마왕을 제거하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하지만 사비강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이 나타나면 뜻밖에도 마왕을 제거할 수도 있다.
가끔씩 인간 중에서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렇게 막강한 드래곤과 드래곤이 서로 싸우면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지만, 엉뚱하게도 인간 중에는 그런 드래곤을 죽여 버리는 자들이 이따금씩 나타나곤 한다.
그 의외성이 인간이 가진 유일한 무기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의외성을 기대해볼만한 자가 바로 사비강이다.
그때 마족 기사 하나가 다가와 하운트에게 말을 전했다.
하운트가 이맛살을 슬쩍 구기더니 바리탄에게 말했다.
“사비강 그놈이 밀담을 제안해 왔습니다.”
“무슨 일로?”
“이번 밀담에 능운파가 참여한다는군요.”
“능운파가…?”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던 바리탄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인간의 권모술수란 참으로 신박하군. 그런 식으로 진행하겠단 말이지.”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을 그리 짜겠다면 같이 어울려 줘야겠지.”
**
휘이이잉!
한 차례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절벽 끝에 선 등부형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이 발 밑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스르르릉.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보았다.
칠흑처럼 검은 묵도였다.
왠지 ‘귀혼도’라는 이름마저 잘 어울리는 칼.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칼과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만약 얼마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칼을 보자마자 침부터 질질 흘렸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칼은 그냥 칼일 뿐이었다.
칼이 제아무리 귀해도 보물이 될 수는 없었다.
천하의 기물? 보도? 명도?
그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결국 사람을 해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빼앗는 칼자루가 아니던가?
칼이 어찌 보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참으로 덧없는 것에 집착한 듯하다.
휘이이이잉!
다시 바람이 불었다.
마치 등부형의 생각에 동의라도 하듯 바람은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불어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우우우웅.
순간 칼이 울었다.
도신이 진동하는 것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등부형은 움찔거리고는 다시 한 번 귀혼도를 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보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금껏 많은 보도를 만져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진한 울림을 주는 칼은 드물었다.
원래 명검이나 명도는 기를 조금만 주입해도 기분 좋은 울림을 전해 준다.
한데 기를 주입하지 않았음에도 칼날이 몸을 떨었다.
거기에 묘한 호승심까지 피어오르게 만든다.
손잡이를 잡았을 뿐인데, 당장 신명나게 이 칼을 휘둘러 무엇이든 베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든다.
등부형은 심호흡을 했다.
격동하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그리 매달리지 말아라. 우리 시원하게 작별하자꾸나.”
기이이이이잉…!
등부형의 말에 귀혼도가 다시 한 번 몸을 떨며 울었다.
마치 그의 말귀를 알아듣는 듯 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등부형도 내심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제 욕망을 버리기로 했다. 너는 정말이지 매력적인 아이다. 하지만 내겐 과분하구나. 누군가 좋은 주인을 만나길 빌어 주마. 하지만 나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나로선 좀 더 수양이 필요할 것 같다.”
키이이이잉!
이번엔 귀혼도가 신경질이라도 부리듯 격하게 울었다.
그럼에도 등부형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려 보일 뿐이었다.
“고맙다. 아쉬워해줘서. 우리 이곳에서 각자의 운명을 새로 시작하자.”
말을 마친 등부형은 먼발치 구름을 보았다.
그의 손에서는 여전히 귀혼도가 격하게 울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고맙소, 사 궁주. 당신은 내게 너무나 많은 걸 일깨워 주었소. 하지만 이 칼은 내게 과분한 것 같구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나 또한 새로 태어나고자 선택한 것이니. 당신이라면 내 선택을 이해해 주리라 믿소.”
말을 마친 그가 귀혼도를 들었다.
키이이이이이잉!
귀혼도가 다시 격하게 울었다.
하지만 등부형은 망설임이 없었다.
휘이익!
마침내 그의 손에서 귀혼도가 떠났다.
귀혼도는 순식간에 멀어지면서 구름을 뚫고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만큼이나 가슴이 후련했다.
욕심을 버린 자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
등부형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
경공을 펼쳐 단숨에 산을 내려온 등부형은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도시가 나타날 터였다.
그때 마침 관도를 따라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등부형이 길옆으로 비켜 주었더니, 그 옆을 지나던 마차가 저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등부형이 가까이 다가가자, 마차 문이 열리면서 투실투실 살이 찐 사내가 내렸다.
그가 등부형의 행색을 살피더니 대뜸 물었다.
“혹시 강호인입니까?”
“그렇소만.”
“아, 잘 됐습니다.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살이 찐 사내가 마차 지붕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 칼 좀 뽑아 주십시오!”
“칼?”
등부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보다가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마차의 지붕 위에는 귀혼도가 수직으로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등부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 칼이 왜 저기에…?”
“그러게 말입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절벽에서 칼을 집어던진 것인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지 뭡니까? 정말 식겁했습니다! 마차 안에서 낮잠을 자다가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마침 대협이 강호인이라고 하시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 흉흉한 물건을 제 머리 위에서 치워 주십시오. 사례는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 칼도 드리겠습니다.”
“허어. 직접 뽑으셔도 될 것 같은데….”
“그게 이상하게도 아무리 용을 써도 칼이 뽑히질 않습니다. 무슨 바위에 박힌 것 마냥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등부형이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알겠소. 그럼 내가 뽑아 드리리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등부형이 단숨에 마차 지붕 위로 날아올라 귀혼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쑤우욱!
귀혼도는 우스우리만큼 쉽게 뽑혔다.
‘이걸 뽑을 수가 없었다고?’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한 어린 아이도 약간의 힘만 주면 뽑아낼 수 있을 수준이 아닌가?
우웅. 우웅. 우웅…!
귀혼도가 마치 반갑다는 인사라도 하는 듯 울어댔다.
순간, 등부형이 멈칫거렸다.
문득 사비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귀혼도는 귀신처럼 주인을 따르는 성질이 있소.”
‘설마 그게 이런 뜻이었나?’
그 생각에 긍정이라도 하듯 귀혼도가 윙윙 울어댔다.
한편 등부형이 쉽게 칼을 뽑아내자, 마차 주인은 얼른 달려와 연신 굽실거렸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 이렇게 쉽게 뽑아내시다니요! 감히 대협의 고명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허어, 난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관일 뿐이오.”
“아,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이군요. 여기 사례금입니다.”
“필요 없소.”
등부형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사내는 끝가지 등부형에게 두둑한 돈주머니를 찔러 넣어 주었다.
결국 그렇게 돈을 받은 등부형은 마차가 제 갈 길을 떠난 후, 자신의 손에 들린 귀혼도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나를 따라오느냐?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렇게 매달려도 소용없단 말이다. 우리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 이젠 정말 깔끔하게 헤어지자.”
말을 마친 등부형이 숲을 향해 귀혼도를 던졌다.
쉬이이이익!
가볍게 던졌는데도, 귀혼도는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갔다.
그 모습에 등부형이 잠시 감탄을 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가자.’
**
멸마궁 남쪽 소환지의 석실.
단상의 권좌에 앉은 루시달 공작은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그의 곁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르르 나타나더니 보고했다.
“말씀하신대로 능운파와 바리탄을 감시한 결과, 그들이 멸마궁과 밀회를 가진 정황이 파악됐습니다.”
순간 루시달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뿜었다.
“과연.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단 말이지. 바리탄은 진작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능운파는 의외로군.”
그의 표정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반쪽짜리 마족은 배신의 인자가 박혀 있기라도 한 건가?
헬무트는 그래도 수백 년을 마왕에게 충성했는데, 능운파는 이제 마족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나?
하여튼 인간이라는 족속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림자가 말했다.
“그들이 손을 잡고 여길 치고 들어온다면 당장 막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흑성에 이 사실을 알리시는 것이 어떤지요?”
루시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린다.”
그는 자만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멸마궁을 섣불리 치기 이전에 계속 남쪽 소환지에 머물면서 바리탄과 능운파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리탄과 능운파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들의 진정성이 확인된다면 그때서야 멸마궁을 칠 작정이었다.
한데…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들키는군.’
가소로운 표정을 지은 루시달이 입을 열었다.
“당장 흑성에 보고하고, 배신자들을 모조리 처리할 지원 병력을….”
그때였다.
석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마족 기사 하나가 달려왔다.
“보고 드립니다! 현재 멸마궁이 이곳 소환지를 급습했습니다!”
“뭣이?”
루시달이 눈살을 찌푸리자, 다시 마족 기사 하나가 더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보고 드립니다! 바리탄 후작과 능운파가 기사단과 십만 마병들을 이끌고 소환지를 습격했습니다!”
“뭐야?”
이때까지만 해도 루시달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반문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달려온 마족 기사의 보고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보고 드립니다! 흑성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젠장!”
콰장!
그의 주먹질에 단상의 권좌가 산산 조각나며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