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4
귀환 마교관
574화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목소리.
묵양제 뒤쪽으로 보이는 지붕 위에 선 사비강이 보였다.
‘아… 당신!’
매설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 어디에서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사비강 앞에서는 왜 이렇게 약해지는 걸까?
그런데,
“크아아아아아!”
절명한 줄 알았던 묵양제가 느닷없이 괴성을 터뜨리더니 두 눈에서 피가 팍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동시에 그가 실명한 상태로 검을 한껏 치켜들었다.
찰나지간,
촤아아아아아악!
그의 가슴을 뚫고 튀어 나온 검이 그대로 하늘로 솟구치면서 그의 머리통까지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 버렸다.
츄아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면서 매설란을 흠뻑 적셨다.
털썩!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묵양제는 그대로 목석처럼 넘어가서는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졸이게 만들어서인지, 매설란과 진백은 지금이라도 묵양제가 벌떡 일어나 설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휘리릭, 탁!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베르타스가 사비강의 손에 잡혔다.
사비강이 하늘에서 강림하듯 유유히 하강하면서 매설란 곁으로 내려섰다.
“고생했어.”
그가 다가오자, 매설란이 주춤 물러났다.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피 묻어.”
“괜찮아.”
사비강이 그녀를 와락 끌어당기며 안았다.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버텨 줘서 고마워.”
“당신은 더 잘 버텼으면서.”
“그래도 고마워.”
사비강이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동시에 능운파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능운파가 선물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단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최대한 서둘러 궁으로 돌아왔다.
한데 매설란이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능운파를 찾아가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최대한 이용할 만큼 그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간 자신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매설란이 사비강의 품에 안긴 채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 구 군사가 능 맹주를 따라 갔고.”
“결국 그렇게 됐구나.”
“처음부터 그는 맹주 옆에 있으려고 했으니까. 그게 모든 상황을 제어하기가 가장 좋을 테니.”
“혹시 이 자는 능 맹주와 관련이 있는 거야?”
매설란의 시선이 처참하게 죽은 묵양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기력을 쏟아 부었던 묵양제의 시신은 마치 나이 백 살은 먹은 노인처럼 보였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욕망을 악용했을 테지.”
“그랬구나. 그래서 당신이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구나.”
매설란이 사비강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편했다.
무섭고 끔찍한 순간을 넘긴 직후였지만, 그가 함께 있으면 모든 걸 잊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편했다.
사비강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당신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어. 무엇보다 당신이 무사해서 고맙고.”
“황송하옵니다, 궁주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
산 중턱에 위치한 분지에는 십만에 달하는 마병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구윤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그날 모였던 강호인들이로군요.”
“그렇다. 저들의 욕망이 저들을 새로 태어나게 만들었지.”
“굳이 강요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맹주님을 탓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구윤의 말에 능운파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서 내가 변명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그저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제가 착각한 것이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능운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구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정말로 구윤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째서?
이미 마족이 되어서 인간다움은 버린지 오래였다.
오욕칠정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판단조차 내리지 못하는 인간의 그 찌질함.
그런 나약함은 이제 자신에게 없다.
그러니 변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 구윤의 착각이리라.
능운파가 십만 마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들은 욕망의 집약체다. 그들에게 후회는 없지. 그 욕망을 이룬 상태니까. 너는 그들이 자아를 버리고 욕망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아니면요?”
“그 반대다. 저들은 욕망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아를 버린 것이다. 욕망을 이룬 순간, 그들에게 자아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게지.”
“선문답처럼 들리는군요.”
능운파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그 진리를 한낱 인간이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지.”
말을 마친 능운파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구윤의 목을 두르고 있던 마력검이 ‘치지짓!’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구윤이 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제 뭔가를 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겠습니다.”
“사비강과 함께 지내더니 그새 허세도 늘었군.”
“왜 풀어 주신 겁니까?”
“자네를 다시 한 번 믿어 보겠다. 단, 자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날 권좌에 올려 두어야 할 것이다. 이번엔 실패하지 마라. 자네는….”
능운파의 시선이 구윤에게 똑바로 향했다.
구윤이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았다.
능운파가 말을 이었다.
“내게 이미 빚이 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맹주님도 약속해 주십시오. 마계로 돌아가서 다시는 중원에 나타나지 않으시겠다고요.”
“물론이지.”
맹주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구윤이 다시 십만 마병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른 쪽은 병력이 어떻게 됩니까?”
“바리탄 후작이 멸마궁 북쪽에 위치한 소환지에서 천 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고, 루시달 공작이 남쪽에서 삼천의 기사단을 이끄는 중이다.”
“하면… 이번 기회에 루시달 공작을 처리하는 것이 최우선이겠군요.”
“그래야겠지.”
능운파의 대답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침묵했다.
왠지 모를 어색함.
하지만 구윤은 어쩐지 이 어색함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능운파에게 인간미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물론, 이 어색함도 구윤이 혼자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침내 능운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가? 이렇게 재회한 것도 뜻 깊은데, 술이라도 한잔 하겠는가?”
“마족도 술을 마십니까?”
“마시지. 훨씬 독하지만. 아마 자네가 제아무리 주당이어도 금방 취할 거다.”
구윤이 가만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군.”
능운파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때론 침묵이 대화보다도 많은 감정과 의미를 전할 때도 있는 법.
지금 둘 사이가 그랬다.
구윤은 십만 마병들을 가슴 아픈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맹주님, 마지막으로 당신을 후회 없도록 모실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
언덕에 올라선 등부형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넓게 자리한 멸마궁이 보였다.
과연 전각들이 모여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 위엄이 느껴졌다.
‘내가 저런 곳에 있었구나.’
이렇듯 조금만 멀리 떨어지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그동안 자신은 얼마나 좁게 살아왔던가?
등부형은 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는 문득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가 품에서 작은 목곽 상자를 꺼냈다.
덮개를 열어 보니 작은 단환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초환당주 진백이 준 것이었다.
상한 내기를 치료하고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혈맥을 더욱 튼튼하게 보강해 주는 약이라고 했다.
하루에 두 번씩 복용하라고 했다.
등부형은 단환 하나를 입에 넣고는 걸음을 돌렸다.
그가 떠나려고 하자, 진백이 나서서 말렸다.
하지만 등부형의 고집은 그도 꺾을 수 없었다.
진백은 사비강 궁주라도 한 번 만난 후에 떠나라고 했지만, 등부형은 그마저도 거절했다.
그가 총관을 구했기에 큰 포상이 있을 거라는 말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왕 마음을 굳게 먹은 것, 이대로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나고 싶었다.
사실, 묵양제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그렇게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했다.
아주 짧은 순간 후회도 밀려들었다.
왜 이런 싸움에 끼어들어 개죽음을 당해야만 하는지.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인간답게 죽는 것보다는 개처럼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지.
하지만 의식을 되찾은 후,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 경계를 한 번 넘나들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여벌로 얻은 목숨보다 이 소중한 삶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그렇게 언덕길을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였다.
미련이 남아서인지 자꾸만 멸마궁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언덕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렇듯 멀어지면 미련도 조금씩 끊어내기가 쉬운 법이거늘.’
등부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걸어갔다.
그런데 이 리도 채 걷지 않았을 때였다.
저만치 길가의 바위에 낯익은 사내가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등부형은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비강이었다.
“왜 그리 도망치듯 떠나시오?”
사비강이 등부형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등부형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저 떠나는 이가 말이 많은 것도 구차하다 싶어서. 그간 신세 많이 졌소.”
“등 형은 많이 변한 것 같소.”
사비강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동안은 그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특별한 애정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아니었다면 매설란은 정말 죽었을 지도 몰랐다.
그가 아주 잠깐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자신이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그 미약한 힘이나마 보탰을 때, 인간에겐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 것이다.
“이제야 철이 들었나 보오.”
등부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사비강이 그를 그윽한 눈길로 보았다.
등부형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고맙소, 사 궁주. 당신은 진정한 교관이오. 나 같은 인간마저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지 않았소? 당신은 단지 마왕을 무찌르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오.”
“과찬이오. 이렇게 떠나는 것도 섭섭한데, 내 등 형께 주고 싶은 작은 선물이 있소.”
“선물…?”
뜻밖의 말에 등부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비강이 칼 한 자루를 내밀었다.
거뭇한 검집에 은빛 장식으로 꾸며진 깔끔한 도였다.
“고스트라는 칼이오. 중원의 뜻으로 풀이한다면 귀혼도(鬼魂刀)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군. 베르타스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귀한 칼이오.”
“이걸… 왜 내게?”
“등 형이 떠난다기에 뭐라도 선물하고 싶었소.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 상담을 했지. 그런 와중에 내가 지금까지 등 형의 칼을 여러 자루 부쉈다는 사실을 듣게 됐소. 왜 내게 진작 말하지 않았소?”
‘허어… 그걸 듣고 나서야 알았다니.’
등부형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선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사비강이 자신을 생각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귀혼도는 귀신처럼 주인을 따르는 성질이 있소. 물론, 에고블레이드(Ego Blade)인 만큼 녀석이 인정하는 주인만을 따르지. 잘 길들여 보시오. 분명 중원의 어지간한 보도보다 훨씬 나을 거요.”
등부형이 눅눅하게 젖은 시선으로 귀혼도를 보았다.
그가 잔뜩 젖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사비강 궁주… 당신은 날 한 없이 작게 만드는구려. 참으로 부끄럽소.”
“무슨 말씀이오? 등 형은 나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은인이오. 난 진심으로 등 형께 감사한 마음이오. 그럼 부디 편안한 여행이 되길 바라겠소.”
사비강이 한 걸음 물러나며 굳게 포권했다.
등부형은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뜨거운 감정을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째서 당장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급급했을까?
이런 칼 한 자루가 다 무슨 소용이랴.
그걸 다루는 주인의 자질이 중요한 것을.
등부형이 사비강을 향해 포권했다.
“사 궁주! 이 등 아무개가 많은 가르침을 배웠소! 훗날 다시 더 나아진 인간이 되어 찾아뵙겠소!”
“등 형은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오.”
사비강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지금껏 그가 등부형을 향해 지은 미소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따뜻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