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
귀환 마교관
571화
구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그때,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그쯤 하지. 그는 내가 따라온 줄 모르고 있으니까.”
다음 순간, 실내 한쪽 구석에서 한 인영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구윤을 가만히 응시하는 능운파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반면, 구윤은 갑자기 나타난 사비강을 보면서 놀란 표정이 되었다.
“궁주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그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사비강이 천천히 다가오면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왔다. 누구하고 다르게 난 내 사람을 소중히 여기거든.”
능운파가 피식 조소를 지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지금껏 수많은 강호인들을 사지로 몰아세웠나?”
“적어도 나는 내 사람을 미치광이 괴물로 만들진 않았지.”
“그걸 왜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십만 마병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강함에 대한 열망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들의 열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었을 뿐. 결국 그들이 선택한 길이다.”
사비강이 능운파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
“마족이 되더니 주둥이 터는 법만 배웠나 보군.”
능운파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그의 전신에서 마력이 은근하게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지. 벌레를 밟아 죽이는 법도 배웠으니까.”
다음 순간,
파지지지지짓!
쒸아아아아아앙!
검은 기운의 마력이 허공에서 뭉치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사비강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찰나지간 사비강이 허리춤에서 베르타스를 뽑아 대각선으로 그었다.
퍼카앙!
파지지짓!
마치 뇌전이 흐르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능운파가 날려 보낸 마력검이 그 자리에서 소멸됐다.
사비강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건 배우다 말았나 보군.”
“아니. 원래 성가신 벌레 새끼는 팔다리를 하나씩 뜯어 죽이는 재미가 아니던가?”
능운파의 입가에 냉소가 서렸다.
다음 순간 능운파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파지짓! 파지짓! 파지지짓!
곧이어 그의 주변으로 시커먼 마력검이 다섯 자루나 생겨났다.
찰나,
쒸앙! 쒸앙! 쒸아앙…!
다섯 자루의 마력검이 무서운 속도로 사비강을 향해 날아갔다.
퍼퍼퍽! 퍼카캉!
파짓! 파짓! 파스슷!
사비강이 재빨리 베르타스를 휘두르자, 이번에도 마력검은 허공에서 뇌전을 흘리며 소멸됐다.
‘끄음…!’
구윤은 내심 신음을 삼키면서 얼마 있지도 않은 내공을 한껏 끌어올렸다.
자칫 능운파가 만들어내는 마력검 때문에 몸에 뇌전이 흘러 감염이 될 것만 같았기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고 온몸의 솜털마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만약 범인이었다면, 기절을 해버릴 만큼 허공에는 뇌전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쒸이이잉!
이번에는 베르타스가 허공을 가르면서 능운파에게 날아들었다.
“어림없는 짓!”
능운파가 일갈을 터뜨리더니 탁자를 탕! 때리면서 일어났다.
콰자자자자작!
순간 산산조각 나버린 탁자가 허공에서 응집하더니 마치 하나의 커다란 방패처럼 변모했다.
물론 그 방패에는 마력이 덧씌워져 강철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따아앙!
빛살처럼 날아든 베르타스가 마력으로 만들어진 방패에 부딪치면서 튕겨 날아갔다.
사비강이 튕겨 나간 베르타스를 낚아채고는 말했다.
“구 군사의 제안은 거짓이 아니다. 너도 힘을 갈망해서 마족이 됐다면 지금 상황에서 만족하고 있진 않을 테지. 기껏 용꼬리가 되겠다고 마족이 된 건 아닐 테니까 말이야.”
“벌레 새끼가 시끄럽군.”
“머저리처럼 마왕의 종으로 평생을 살 건지, 아니면 이왕 기회를 잡으려면 제대로 판을 뒤집어 보든지. 뭐, 네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고.”
“후후. 판을 뒤집는 제안이라. 그런 제안을 하려면 우선 네놈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말을 마친 능운파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 순간,
콰자자자자자자자장!
놀랍게도 사방으로 마력이 훅 뻗어나가는가 싶더니 낡은 집 전체가 조각조각 깨지면서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능운파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지막지한 힘!
젊음이 넘쳐흐르고 힘이 폭발할 것만 같다.
인간이었을 때는 사비강을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여겼다.
그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자신이 다다를 수 없는 머나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한데…
‘해 볼만 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흥분이 지나간다.
터져 나간 건물 파편이 허공을 빽빽하게 채웠다.
정말이지 능운파를 중심으로 머리 위로 둥글게 포진한 파편들은 언뜻 보기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만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날카로운 파편마다 마력이 덧씌워지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순간, 능운파가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슈슈슈슈슈슈슈우우욱!
허공에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던 파편들이 일시에 사비강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궁주님!”
그 무지막지한 폭격에 구윤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사비강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까지 차분했다.
대신 그는 베르타스를 강하게 휘둘렀다.
쒸쒸쒸쒸쒸아아앙!
순간 놀랍게도 베르타스에서 수백 가닥의 검기가 쏟아지는 파편들을 향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아앙!
사비강의 머리 바로 위에서 목재 파편들이 검기에 부딪쳐 마구 부서지면서 먼지구름을 형성했다.
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
먼지 구름은 마치 뇌운으로 변한 것처럼 연신 번쩍거리면서 폭음을 터뜨려냈다.
자욱하게 흩날리는 파편 가루 때문에 사비강의 존재는 시야에 묻힌지 오래였다.
구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공방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훨씬 더 강맹한 기운의 싸움이라는 것을.
만약 사비강을 향해 폭사된 수백 개의 파편 중 단 하나라도 치명상으로 날아들었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리라.
사비강의 무위를 믿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능운파의 무서움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한편 능운파 역시 광기 서린 눈으로 사비강이 있을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뇌운처럼 변한 먼지구름을 뚫어질 듯 노려보던 그가 순간 움찔거렸다.
그의 입매가 뒤틀리는 순간,
쑤아아아앙!
사비강의 신형이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와 능운파의 목을 향해 베르타스를 뻗어냈다.
“캬하!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사비강!”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폭격은 스무 명 정도의 초절정 고수가 힘을 합해야만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사비강은 단신으로 막아내곤 역공을 해오는 것이다.
그것도 파편 하나하나를 박살내는 무위를 자랑하면서!
사비강이 지척에 다다랐을 때, 능운파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곧장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엉!
공기마저 찢겨 나갈 만큼 커다란 소음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의 검봉이 정확히 마주쳤다.
후웅…!
파콰콰콰콰콰콰콰…!
다시 한 번 기풍과 마력이 사방으로 훅 뻗어 나가면서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이 구덩이처럼 움푹 파였다.
“크우웃!”
구윤이 두 팔을 교차하며 얼마 있지도 않은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면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사비강과 능운파는 서로 종이 한 장 차이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검봉을 맞댄 채 싸늘한 조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검증이 되었을까? 요즘 들어 여기저기에서 날 시험하는 자들이 많군. 아무래도 마족들은 시험 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뭐, 네놈의 능력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나? 네놈들이 날 칼자루로 삼고 마왕을 제거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셈이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뭣이?”
“우리가 칼자루로 삼든 말든, 네가 마왕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오르면 될 일 아닌가? 그리고 너는 그 길로 마족들을 이끌고 마계로 돌아가면 되는 거고.”
“흐음.”
“그리고 원한다면 어떻게든 바리탄과 만날 자리를 만들어 보지. 그럼 믿을 수 있겠나?”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비강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바리탄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그건 좋을 대로 생각하고.”
마침내 능운파가 스르르 힘을 풀었다.
그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뭐, 좋지.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단!”
능운파가 왼손을 옆으로 불쑥 뻗었다.
파지지짓!
그러자 놀랍게도 구윤의 목을 중심으로 고리 모양의 날카로운 마력검이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목걸이처럼 구윤의 목을 두른 마력검은 당장이라도 오므라들면서 목을 잘라 버릴 것처럼 섬뜩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구 군사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사비강이 구윤을 슬쩍 보았다.
그는 지금, 이곳에 오기 전에 구윤이 회의하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능운파 맹주가 먼저 절 데리고 가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자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그럴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보단 인질로 삼기 위한 의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제가 모든 상황을 관리하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더 자연스럽게 능운파 맹주 옆에 있게 되는 거니까요.”
과연 능운파는 구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구윤에 대한 그의 미련, 그리고 마족으로 변한 그의 비열함이 구윤에게 그대로 읽혀 버린 것이다.
사비강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물었다.
“바리탄이 뜻을 함께 한다는 걸 알게 되면 구 군사를 풀어 줄 텐가?”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그리고 말이야.”
능운파의 시선이 구윤에게 힐끔 향했다.
“잊었나 본데, 구 군사는 원래 내 사람이었어.”
“잊었나 본데, 구 군사를 버린 건 너야.”
“버린 게 아니라, 주인을 따르지 않은 거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
“그래, 그 이유를 따져 가면서 충성하는 게 인간이긴 하지.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사비강이 능운파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구윤을 돌아보았다.
구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상황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각오한 일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
“명 받들겠습니다.”
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능운파의 신형이 순간 팟, 하고 사라지더니 어느새 구윤의 곁에 나타났다.
탁탁탁.
그가 빠르게 손을 놀려 혈을 점하자, 구윤이 의식을 잃고는 스르르 허물어졌다.
능운파가 그를 어깨에 들쳐 메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그럼 이만 실례하지. 아참,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지도.”
“무슨 소리냐?”
사비강이 미간을 찡그리자, 능운파가 걸음을 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멸마궁으로 선물을 하나 보내놨거든.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됐을 거다. 자고로 선물은 받은 자리에서 풀어 봐야 하는 법이 아닌가? 늦으면 김이 샐 테니 얼른 달려가 보라고.”
말을 마친 능운파의 신형이 팟, 하고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