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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570화 (570/670)

# 570

귀환 마교관

570화

“하지만 바리탄도 우리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 역시 멸마궁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쉽게 방향을 틀어 버릴 칼자루가 아닙니다.”

당이협이 나서서 말하자,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겠지요. 하지만 그는 언젠간 칼끝을 돌릴 겁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상대하기가 훨씬 쉬울 테니, 마왕을 먼저 공격하는 게 그에게도 유리할 테니까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 않습니까?”

“아직 칼을 제대로 갈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요. 멸마궁으로 마왕을 제거하기에는 그 칼날이 무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우선은 궁주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구윤이 정중히 말하자, 사비강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탁?”

“예, 이번에 마족들이 멸마궁을 치러 오면 분명히 능운파 맹주님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한데?”

“제가 능운파 맹주님을 만나도록 해주십시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뿐만 아니라,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리면서 구윤을 바라보았다.

서래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남은 정이 있다지만, 이미 마족으로 변해버린 자에게 미련이 남은 건가요? 설마 그를 또 설득시켜보려고요?”

“그렇다면 저도 반대합니다. 능 맹주는 강호인을 배신한 자입니다. 구 군사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까지는 참고 넘기겠습니다만, 더 이상 그를 구하려고 하는 건 절대 동의할 수….”

“그를 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적무린의 말에 구윤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가 장내를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능 맹주님에게 아직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그만큼 중요한 분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분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건… 다른 이유입니다.”

“무슨…?”

“말씀드렸다시피 칼자루를 돌리기 위한 작업이지요.”

“하지만 이미 마족으로 변해 버린 능 맹주를 만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적무린의 말에 당이협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일전에 사비강 궁주님이 흑성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군사님은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궁주님을 대체할 사람이 있었지요. 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제가 가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바리탄의 칼자루를 돌릴 수 있는 분이 여기에 계십니까?”

아무도 답이 없었다.

그런 방법을 알았다면 이렇게 회의를 하지도 않을 일이다.

구윤이 사비강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보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칼자루를 돌려 보겠습니다.”

사비강이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대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

멸마궁 인근의 객점은 수많은 무인들로 붐볐다.

마족과 최종전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강호에서 이름 좀 떨친 무인들은 죄다 멸마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오로지 의협심으로 지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족과의 최종전을 통해 귀한 마계 전리품을 얻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번 전쟁은 모처럼 강호인들이 하나로 똘똘 뭉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특히 멸마궁에서 가장 가까운 멸마객잔(滅魔客棧)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무인들이 마족 섬멸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빌어먹을 마족 놈들을 전부 밟아 버리자고!”

“암, 그래야지! 그놈들이 비열한 수단으로 맹주님을 죽였으니, 우리도 마왕을 죽여서 앙갚음을 해주세!”

“인간을 얕잡아 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줘야지!”

“그럼! 사비강 멸마궁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 강호인들이 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무인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가운데, 죽립을 눌러 쓴 사내가 객잔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그 순간 객잔의 분위기가 잠깐 식으면서 모두의 시선이 이제 막 들어서는 사내에게 향했다.

평범한 사내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에게 시선이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 대화를 멈추었던 자들이 다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대신 점소이가 얼른 달려와 죽립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그런데 지금 만석이라, 합석을 하셔야겠습니다요.”

“상관없다.”

사내가 간단히 대답하자, 점소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쪽으로.”

점소이는 한쪽 구석 자리로 그를 안내했는데, 그곳에는 한 젊은이가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연거푸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취기가 오른 것인지 제법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내가 자리에 앉자, 술을 마시던 남자는 그를 힐끗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쪽도 멸마궁으로 지원 온 거요?”

“그렇소만.”

“흥! 다들 사비강 궁주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해가지곤.”

남자는 거친 목소리로 불평을 터뜨리더니 다시 술잔을 채웠다.

죽립인이 재미있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비강 궁주님에게 불만이라도 있는 거요?”

그러자 남자가 죽립인을 빤히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편애의 끝판 왕이오.”

“편애?”

“그렇소 자기 식구들만 챙기지. 남들 다 주는 영단을 내겐 단 한 알도 주지 않았지. 내가 그동안 온갖 수모를 다 참아가면서 조교로 일을 해왔건만! 한때 정도맹 천호당주였던 이 내가!”

남자는 부들부들 떨더니 술잔을 들어 거칠게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는 바로 묵양제였다.

정도맹이 건재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떻게든 사비강의 흠을 찾아내어서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도맹이 무너진 지금 그에게는 모든 기회가 사라진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멸마궁을 떠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수많은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호가호위하던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천호당주의 지위를 잃고 멸마관의 조교로 전락한 날부터 그는 줄곧 사비강을 원망해왔다.

“거참 안타깝게 됐소.”

죽립인이 말하자, 묵양제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비강 궁주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시오. 괜히 부푼 기대를 안고 그를 찾아갔다간 나 같은 꼴이 날 수가 있으니.”

“충고 고맙소.”

죽립인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말을 섞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식사를 마친 죽립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연이 되면 또 봅시다.”

“그러시든지.”

묵양제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죽립인이 걸음을 떼다 말고 슬쩍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영단 말이오.”

“……?”

묵양제가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죽립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뿜었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묵양제와 헤어진 죽립인은 오솔길을 따라서 올랐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자, 저만치 낡은 집이 보였다.

순간 죽립인이 멈칫하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한데…

“누구지?”

가만히 중얼거린 죽립인이 다시 걸음을 뗐다.

한데 그 경신법이 무척이나 독특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데, 그는 어느새 낡은 집 대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가 실내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죽립인을 보았다.

죽립인은 상대를 보고는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바로 멸마궁의 총군사 구윤이었다.

죽립인이 피식 웃고는 한쪽으로 걸어가 선반 위에 죽립을 벗어 두었다.

“여긴 어인 일인가?”

“맹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구윤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랬다.

젊은 외모의 죽립인은 바로 능운파였다.

비록 외모가 달라져 있었지만, 구윤만큼은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능운파의 본래 얼굴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느낌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더 어울리리라.

구윤에게 있어서 능운파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였기에.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했던 자, 처음으로 혼을 다해 모셨던 자.

왠지 구윤은 능운파가 전혀 다른 외모를 하고 있는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능운파가 창가의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모처럼 벗이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군.”

“괜찮습니다. 오늘은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니까요.”

“술이라… 그러고 보니 군사와 마지막 날 술을 마셨지.”

“그랬지요. 참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웠지. 그때는.”

“지금 생각하시기엔 다릅니까?”

“글쎄. 그저 그 작은 위로에 안도하는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단 생각이 드는군.”

“그렇습니까?”

구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역시 군사는 무시할 수 없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눈치 채다니.”

“모든 상황을 판단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정보니까요.”

“그래, 날 찾아온 이유가 시답잖은 수다나 떨자는 건 아닐 테고.”

구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능운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직 되돌릴 수 있습니다. 맹주님이 마음만 달리….”

“아니.”

능운파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네. 상황이 늦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늦었네. 나는 이미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아 버렸네.”

“정녕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

“간다.”

구윤은 한동안 능운파의 표정을 말없이 살폈다.

젊고 반듯하고 잘 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능운파의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능운파가 입매를 비틀었다.

“나를 강호 영웅으로 만들었더군.”

“그래야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영웅을 만나러 온 이유는 고작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 달라는 말을 하려던 거였나?”

“그랬지요. 하지만 맹주님께서 거절하셨으니, 다른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제안?”

구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능운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왕 욕망을 쫓기로 하셨다면… 거기에서도 최고가 되십시오.”

“무슨 말이지?”

능운파가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마족이 되시니 어떻습니까?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거기에서도 마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치를 보고 계십니까?”

능운파의 표정이 일순 꿈틀거렸다.

구윤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맹주님의 군사니까요.”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는 그리 쉽게 지조를 바꿀 인간이 아닌데.”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어차피 맹주님은 절대자의 자리를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좌.”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더 이상 중원을 건드리지 말고 마계로 떠나 주십시오. 그게 제가 제시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흐음.”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구윤이 말을 덧붙였다.

“만약 맹주님이 결정만 내리신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서 도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멸마궁도 맹주님을 도울 것입니다. 마왕을 꺾고 중원을 지키는 방법. 제가 생각한 최선은 바로 맹주님을 마왕의 자리에 올려드리는 것이니까요.”

“과연. 하지만… 마왕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세.”

“칼자루는 또 있습니다.”

능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바리탄은 아직 반역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를 찾아가서 뜻을 함께 하겠다고 전하시면, 일이 조금 수월해질 겁니다.”

“그렇군. 하지만 군사….”

“말씀하시지요.”

“내가 군사를 믿을 거라고 생각했나?”

다음 순간,

치지지지지짓…!

능운파의 손바닥에서 거뭇한 기운이 파장을 일으키며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곧고 날카롭게 뻗은 칼날 모양이 완성되었다.

검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그 칼날은 섬뜩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슁!

순간, 마력검이 구윤의 목을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 목젖까지 바짝 다가섰다.

능운파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네는 날 너무 우습게 봤어. 옛정을 생각해 고통 없게 보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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