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9
귀환 마교관
569화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은 검붉은 빛줄기가 이따금씩 지나가면서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실내가 어떤 생명체의 몸속인 것처럼 덥고 습했으며, 간간이 벽과 기둥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기둥에 달라붙은 수십 가닥의 촉수들은 아들러 백작의 얼굴로 연결되어 있었다.
촉수를 따라서 희미한 빛이 쉴 새 없이 오갔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기둥에 달라붙었던 촉수들이 취리릿, 소리를 내며 아들러 백작의 얼굴로 돌아와 돌기처럼 박혔다.
“거의 다 완성이 되어 가는군.”
아들러 백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자,
치이이이이이이…!
기둥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오더니, 열십자로 빛줄기가 생겨 나면서 쩌억 벌어졌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늘어지면서 기둥 안쪽이 드러났는데, 그곳에는 온통 검은 신체를 가진 능운파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가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흑요석처럼 단단하고 검은 신체.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비단 젊음만 얻은 것이 아니라, 강한 신체를 얻었다.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늘 한계에 부딪치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그 한계가 없을 것만 같다.
끝도 없이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능운파는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가 흡족한 표정으로 아들러를 보았다.
“어떻소? 내 몸은 이제 완성이 되었소?”
“거의 다 된 셈이지. 대략 구 할 정도. 이젠 평범한 모습으로도 돌아올 수 있다.”
“뭐, 지금 상태도 나쁘지 않지만… 너무 눈에 띄니까.”
말을 마친 능운파의 외모가 스르르 변하더니 반듯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말이지 수염이 성성하던 과거의 모습은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초절정 고수 스무 명 정도는 한꺼번에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능운파가 탄탄해진 자신의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구 할이 이 정도라니. 완전체가 되었을 땐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되는군.”
“곧 될 걸세. 하나 자만해서는 안 되지. 자네는 아직 악신의 가호를 받지 못한 마족이라는 걸 명심하게.”
“내 몸은 스스로 지키면 될 일 아니겠소?”
“자만하지 말라는 말을 촌각이 지나기도 전에 잊어버리는군.”
“잊은 게 아니라 굳이 새겨 둘 필요가 없는 말이라고 여겼을 뿐.”
“자네…!”
아들러가 미간을 구기고 나무라려고 하는데, 마침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다.
그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능운파를 한 번 힐끔거리더니 아들러에게 다가갔다.
“곧 총회가 열릴 걸세.”
“무슨 일이라도?”
“자카르트 백작이 당했네.”
“자카르트 백작이?”
아들러가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자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사비강이 헬무트와 함께 자카르트를 쳤다고 하더군.”
그러자 듣고만 있던 능운파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나섰다.
“지금 사비강이라고 하셨소?”
자콕은 갑자기 끼어든 능운파를 다시 한 번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아들러에게만 말을 이어 갔다.
“현재 자카르트가 점령했던 곳은 테라포밍이 풀려서 다시 인간들의 영역이 되었지.”
“흐음. 좋지 않은 전개인데….”
아들러 백작이 침음을 흘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사비강의 의식 세계에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었다.
사비강은 회귀자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래의 자신은 사비강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을 목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비강이 회귀하기 전과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들러는 사비강에 대한 공포심이 심연 깊은 곳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비강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리 끝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사비강은 위험해… 폐하께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고 알려드려야 해.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나도 왠지 요즘 점점 불길한 기분이 들어.”
자콕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들러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새기고는 물었다.
“정말인가? 영 안 좋은가?”
아들러가 자콕의 기분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콕을 가호하는 악신이 예지와 변화의 악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분은 단순히 그냥 기분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가 느끼는 감정, 혹은 느낌이나 기분.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암시의 일종이라고 봐야 한다.
자콕이 왠지 불길하다고 하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데 지금 자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한 표정이었다.
“좋지 않아. 매우. 그런데 이 기분이 조금 이상해.”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것이 나의 운명인지, 우리 마족의 운명인지 모르겠네.”
“그야 자네의 운명이 위태롭다면, 우리 모두의 운명 또한 좋을 리가 없지 않나?”
“흐음. 그럴까? 조금 다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아무튼 요즘은 영 기분이 뒤숭숭해.”
그러자 능운파가 코웃음을 쳤다.
“마족도 별 특별할 것도 없군. 고작 그런 인간 따위를 상대하지 못해 죽어 버리다니.”
“닥쳐라. 네놈도 결국 사비강을 넘지 못해서 마족이 된 주제가 아니더냐?”
“그랬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그때는 인간의 몸이었고, 지금은 아니거든.”
능운파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팔을 쓸어 보았다.
자콕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처럼 마족이 되었다가 다시 사비강 밑으로 들어가서 우리에게 칼을 겨눈 헬무트도 있지.”
“그런 애송이와 날 비교하지 마시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지금 사비강을 두려워하지 않소.”
자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하려고 하자, 아들러가 중재하며 나섰다.
“이제 막 승화되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만도 하지. 신경 쓰지 말고 가지. 우선 자네의 그 감각에 집중을 해야 할 것 같군. 그 감각의 근원에 대해서 신탁을 한 번 받아보라고.”
“그러도록 하지. 뭐, 이계의 땅에 와서 피곤한 탓일지도 모르고.”
자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돌렸다.
아들러가 능운파를 돌아보고는 차갑게 일렀다.
“더는 자만하지 마라. 악신의 가호도 받지 못하는 마족은 결국 반쪽짜리라는 걸 잊지 마라.”
그가 자콕과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둘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능운파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악신의 가호? 후후. 그들이 날 가호하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전능한 신이 되겠다.”
**
장내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모든 마족들이 태좌에 앉은 마왕의 눈치만 살폈다.
아라니우스 공작이 죽고, 헬무트가 배신했다.
그런데 이번엔 자카르트 마저 사비강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땅에 강림만 하면 거침없이 인간들을 휩쓸어 갈 줄 알았는데, 모든 계획이 하나씩 뒤틀어지고 있었다.
한데 마왕 타란트는 특별히 화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는 시종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화난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바리탄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조차도 그는 피식 웃어 버린 게 전부였다.
그는 늘 조용하고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참혹한 형벌을 내리곤 한다.
그래서 마족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 능운파를 승화시키는데 성공한 아들러만이 비교적 마음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왜들 말이 없나?”
타란트가 조용히 물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어떤 질책도 힐난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
그럼에도 마족들이 움찔 몸을 떨고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자콕 백작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레 나섰다.
“폐하, 신이 감히 아뢰옵건데, 사비강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듯합니다. 좀 더 치밀한 작전이 필요해 보입니다.”
만약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마족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인간?
그런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콕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라니우스 공작은 그렇다 쳐도 전투능력이 뛰어난 헬무트와 그 기사단이 모조리 사비강에게 흡수됐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헬무트는 반쪽짜리 마족이라서 그렇다고 치자.
자카르트는 순수 혈통의 마족이다.
그의 전투 능력은 마족들 중에서도 매우 강한 편이었다.
한데 그조차 허무하게 패했다.
이제는 경각심을 가질 때가 됐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라… 그런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나른한 표정으로 묻는 타란트는 여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마족들이 망설이자, 타란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든 말을 하라. 그자의 덩치가 대마괴처럼 큰 것인가? 아니면, 9서클을 사용하는 대마법사인가? 그도 아니면 인간의 몸에 스며든 천신인가?”
타란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마족들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자, 능운파가 슬쩍 나서며 말했다.
“폐하,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사비강을 산 채로 잡아오든, 죽여서 가죽을 벗겨 오든 하겠습니다.”
그러자 마족 하나가 불쑥 나서며 외쳤다.
“놈, 이제 막 승화가 되니 눈에 뵈는 게 없나보구나. 네놈은 인간이었을 때도 그에게 열등감을 느껴….”
“그건 인간일 때 이야기요. 지금의 나는 다르지.”
“뭐라?”
“자꾸 인간 시절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군. 그럴 거면 애초에 날 승화시키질 말던가? 똑같은 취급을 할 거면 뭐 하러 그 고생을 한 거요?”
능운파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마족들이 술렁거리면서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타란트는 능운파의 그런 자신감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가 능운파를 보며 물었다.
“다른 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그대는 두렵지 않은가?”
“오히려 그와 싸울 날이 기대될 뿐입니다.”
“훌륭하군. 그럼 이번엔 그대가 직접 십만 마병을 이끌고 가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마족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순수 혈통도 아닌 반쪽짜리 마족이 겁도 없이 설치는 꼴이라니.
만에 하나 그가 사비강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면 그야말로 모든 공을 독차지하는 셈이었다.
그때, 또 다른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그는 아직 온전한 힘을 사용할 줄 모르니, 제가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족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번에 나선 자는 다름 아닌 바리탄이었던 것.
하필 반역자가 아닌가?
그가 이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 나쁜 마족들이 많았다.
하물며 공을 세울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
결국 루시달 공작이 나섰다.
“아닙니다, 폐하. 바리탄 공은 지금껏 세운 공이 있으니, 충분히 쉴 기회를 주시고 대신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이번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타란트를 쳐다보았다.
과연 그는 누굴 택할 것인가?
마침내 타란트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좋아. 셋 다 가도록.”
뜻밖의 말에 마족들이 술렁거리자, 타란트가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준비를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모두 가라.”
**
같은 시각.
멸마궁에서도 회의가 열렸다.
총군사 구윤은 수뇌 인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준비를 단단히 해두셔야 합니다. 이제 최종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총군사께서 생각하시기에 저쪽에서는 어찌 나올 것 같습니까?”
당이협이 질문을 던지자, 구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멸마궁을 치러 올 겁니다. 다만 선봉으로 누가 오든 반드시 거기에 포함될 자는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능운파 전 맹주님입니다. 그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그분의 성품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구윤은 확신했다.
자신의 사부님은 늘 말씀하셨다.
군사는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것이라고.
추량이 물었다.
“능운파 맹주가 온다면… 대응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구윤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긴요. 이제 칼끝을 돌릴 차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