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4
귀환 마교관
564화
바리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의 술법이라면 마족 중에서도 최고의 결계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인간에게 이만한 능력이 있다니.
물론, 인간의 이러한 술법에 처음으로 당했기 때문에 놓친 부분도 있다.
만약 다시 한 번 이러한 술법에 당한다면 제아무리 견고한 술법이더라도 바리탄은 눈치를 챌 것이다.
‘사비강, 확실히 알면 알수록 놀라게 만드는 구석이 있구나.’
바리탄이 가만히 입매를 비틀었다.
사비강은 이제 어쩔 거냐는 듯 바리탄을 가만히 응시했다.
바리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보고는 혼자 나오라고 하더니.”
“그러게 혼자 나왔으면 이럴 일도 없잖아.”
“그렇다면 더더욱 혼자 나오지 않길 잘했군. 이런 멋진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쉬웠을 테니까.”
바리탄이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답은 이미 말해 줬을 텐데.”
“내 수하를 내 손으로 죽여라?”
“내가 널 믿을 유일한 방법. 서로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한 걸음 나아갈 방법이지.”
“흐음.”
바리탄이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바리탄이 고개를 들고 사비강을 보았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후작님!”
하운트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말을 마친 바리탄이 손을 불쑥 뻗어 냈다.
다음 순간,
쒸아아아아앙!
그의 손끝에서 한 줄기의 마력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섬광처럼 날아간 마력검은 그대로 가디언들 중에서도 수장의 목을 단숨에 그어 버렸다.
피츗!
“컥…!”
졸지에 목이 베인 가디언이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리면서 스르르 허물어졌다.
즉사였다.
하운트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마력검에 목이 베일 상대는 자신이었기에.
바리탄이 사비강을 보며 입매를 치켜 올렸다.
“어떤가? 이쯤에서 서로 합의를 보는 것이. 이만하면 나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졸개 하나를 죽여 놓고?”
“나를 호위하는 가디언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다. 만약 내가 하운트 백작을 죽이게 되면… 너도 저 군사를 죽여야 계산이 맞겠지.”
바리탄의 시선이 구윤에게 향했다.
사비강이 피식 웃고는 손을 뻗어 베르타스를 회수했다.
“좋아,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
옹기승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서 저만치 아래에서 한창 수련 중인 궁도들을 바라보았다.
궁도들의 수련을 지휘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맹가숙과 유송령이었다.
그간 신생조는 상당한 무공 발전을 이루면서 자신들이 익힌 무공으로 일가를 이룰 정도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특히나 마족들과 다양한 실전을 겪은 그들은 멸마궁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었다.
한참이나 궁도들의 수련을 지켜보던 옹기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쾌청한 날씨였다.
마족 따위는 생각이 나지도 않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마족들의 손에 죽어 나가는 강호인들이 있으리라.
또 어디에서는 소환지를 공략하느라 목숨을 걸고 있으리라.
옹기승이 눈을 지그시 감는데, 문득 귓가를 찌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서 비켜라. 내 자리다.”
옹기승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았다.
석탄강.
언제나 자신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마령혼을 제어하게 된 후부터는 석탄강도 더 이상 힘을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씩 이렇게 터무니없는 시비를 걸어오곤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혈사련에 소속된 후부터 수년간이나 가까이 지내며 서로 경쟁을 해왔던 상대다.
한데 그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갑자기 강해졌을 때의 허탈감 또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옹기승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바위에서 일어나서 비켰다.
“날이 좋군.”
옹기승이 순순히 비켜 주자 석탄강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시비는 항상 자신이 먼저 걸었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비켜 줄 옹기승도 아니었다.
한데 오늘은 어딘지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 나올 법도 한데, 오늘은 어쩐지 고분고분하다.
“죽을 병 걸린 거냐?”
석탄강이 무뚝뚝하게 물어보자, 옹기승이 무슨 말이냐는 듯 돌아보았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거라던데.”
“하하. 그럴 지도.”
“정말 무슨 일 있는 거냐?”
“별로. 단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
“무슨 생각을….”
석탄강이 입을 열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왠지 오늘은 그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오늘은 봐줄 테니, 그 생각 정리되면 내게도 알려라.”
“내가 왜?”
“뭐야? 나한테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거냐?”
석탄강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짓자, 옹기승은 문득 장난기가 떠올랐다.
그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한 가지 고민이 있긴 한데….”
“뭐냐?”
석탄강이 표정을 굳히고 묻자, 옹기승이 입을 열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니다. 너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뭐냐? 말 해.”
“그냥 안 할래.”
“죽고 싶냐?”
“이젠 그런 걸로도 사람 죽이는 거냐?”
“필요하다면.”
“날 죽이면 더 듣지 못할 텐데.”
“어차피 듣지 못할 바에는 죽여서 안 듣는 게 낫지.”
옹기승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누가 사파 아니랄까봐….”
“그래서 고민이 뭐냐?”
“실은 말이지….”
옹기승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졌다.
석탄강이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뭐?”
석탄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옹기승을 보았다.
옹기승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누구…?”
석탄강이 묻는데, 옹기승의 시선이 저만치 아래의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던 석탄강은 연무장에서 궁도들의 수련을 지휘하는 유송령을 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설마…?”
“그래, 아무래도 난 송령을 좋아….”
“안 돼!”
석탄강이 버럭 소리 질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새 양손에 사슬낫을 들고는 살기까지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의 격한 반응에 옹기승이 움찔 놀라서는 뒷걸음질을 쳤다.
“워, 워. 너무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잖….”
“닥쳐라! 령아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만약 나와 연적이 되겠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진심이다.”
“헐. 여인 앞에서는 우리의 우정도 한 줌 잿더미 같은 거냐?”
“물론. 공기보다 가볍지.”
석탄강의 표정은 진지했다.
옹기승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항복. 내가 마음 다스리려고 노력해볼게. 나는 우정도 중요하니까.”
“잘 생각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생각을 잘 정리하도록.”
“그래. 알았어.”
옹기승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석탄강이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옹기승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그 바위는 자네에게 양보하지. 참고로 그 자리는 명당이야.”
말을 마친 옹기승이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석탄강이 피식 웃으며 옹기승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설픈 연기 따위라니….’
분명 옹기승은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리라.
다만, 그가 심란해 보여서 그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기분 전환을 해보라고.
석탄강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서는 저만치 아래의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유송령이 땀을 흘려 가며 궁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과연 유송령을 바라보기에는 이만한 명당도 없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바라보던 석탄강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옹기승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설마… 저놈 진짜로 송령을…? 에이, 아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어딘지 마음 한편이 불편한 석탄강이었다.
‘에이! 아닐 거야. 그래, 아닐 거야!’
한편,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옹기승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지금쯤 골머리 앓고 있을 테지.’
그는 오랜 세월 석탄강을 알고 지내왔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의 내심이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였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마침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재미있는 일이 있는 모양이군.”
돌아보니 초환당주 진백이었다.
그가 커다란 목곽 상자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옹기승이 얼른 달려가 그를 거들었다.
“이게 다 뭡니까?”
“약재와 마계 물품들이라네.”
“마계 물품으로 영약을 제조합니까?”
“이것저것 실험 중일세. 닷새 전에는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와서 지금 모든 초환당원들이 집중하고 있지.”
“그렇군요. 모두 대단합니다.”
“나서서 싸우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지. 우리는 우리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네.”
옹기승은 약재 상자를 초환당으로 옮겨 주고 나서는 돌아 나왔다.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맹가숙과 유송령 그리고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진백의 새로운 영약 개발까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이번에는 대장간에서 열심히 풀무질을 하는 조신량을 보았다.
비교적 선선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곁에서 돌연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요?”
“누구…?”
다음 순간 옹기승 곁으로 스르르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는 바로 흑귀였다.
옹기승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궁주님과 함께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휴가 냈소.”
“휴가…요?”
옹기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흑귀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 생각해 볼 것이 있어서 궁주님께 양해를 구했소. 뭐, 최근엔 궁주님과 함께 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시기도 했고.”
“아, 그러셨군요.”
옹기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왠지 흑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혈사련 출신이었지만, 거의 만나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묘한 분위기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대장간에서 일하는 조신량을 바라보았다.
멸마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장치와 병장기들이 조신량의 손에서 탄생되고 있었다.
이렇게 멸마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격동하는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모종의 결심이 선 표정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동시에 말했다.
“혹시 나와 술 한 잔 하시겠소?”
마치 거울을 보고 말한 것처럼 같은 행동에 두 사람이 피식 웃고 말았다.
흑귀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는 낮술도 좋소.”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옹기승과 흑귀는 함께 궁내 주루로 향했다.
그들의 이 술자리가 앞으로 그들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