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1
귀환 마교관
561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랑이 입을 열자, 일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의 표정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 대법을 시행하고 나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 또 말하지만 상관없소.”
“흐음.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무랑도 더 이상은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무랑전에는 사비강과 무랑 그리고 구윤과 일살이 모여 있었다.
일살은 시선을 내려 깔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껏 이 두 손에 많은 피를 묻히며 살아왔소. 이유도 모른 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지. 당연히 그 대상은 무인만이 아니었소. 어떤 때는 힘을 잃어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의 수명을 단축시켰고, 또 어떤 때는 갓 태어난 아기의 목숨을 끊어 놓기도 했지.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낀 적도 없소. 다만… 늘 허무한 생각이 들었을 뿐.”
잠시 말을 멈춘 일살이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제 와서 내가 희생을 한다고 해서 그간 내가 저질렀던 죄가 사라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소. 솔직히 말하면 그간 내가 저지른 것이 죄라는 생각도 들지 않소. 난 그저 시킨 대로 한 것일 뿐이니까. 진짜 나쁜 놈들은 내게 살인을 사주한 자들이 아니겠소? 뭐, 내가 틀렸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어릴 적부터 살인병기로 키워진 나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소. 세뇌가 된 거지.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람이 되려고 한다는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요.”
“하면 어째서 내 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겁니까?”
구윤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묻자, 일살이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다만… 적어도 이번 일은 이유가 분명하다는 거요.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꽤나 큰 의미가 있다는 것.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행해 왔다면, 지금 수많은 목숨을 살린다는 그 의미는 지금껏 내가 느껴 보지 못한 희열을 안겨주고 있소.”
일살의 말은 실내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살수라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호영웅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일살이 구윤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날 일회용 도구로 사용하겠다면, 제대로 사용해 주시오.”
“최고의 도구가 될 거요.”
일살이 입매를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략적인 상황이 정리되자, 무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제 대법이 시전되면 자네는 자아를 의식할 수 없게 될 걸세. 그리고 사비강 궁주는 자네의 몸을 쓰게 될 테고.”
그야말로 도구였다.
일살이 퉁명스런 말투를 툭 뱉어냈다.
“몇 번이나 들었잖소. 시작합시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어차피 칼끝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큰 의미라도 남길 수 있다면 개죽음은 피한 셈이지 않은가?
그가 무랑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단, 실패는 용납하지 않을 거요.”
“그건 걱정 말게나.”
무랑이 고개를 끄덕인 후 대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랑전의 견습 도사들이 대법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놓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초와 향 그리고 경면주사와 붓 따위였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무랑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물린 후 실내 가운데 바닥에 커다란 문양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문양이 완성되자, 그가 사비강과 일살을 그 한가운데에 서도록 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가 일러 준 대로 운기하게.”
“나도 하는 거요?”
일살이 묻자, 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자네는 가만히 있어도 되지만, 같이 하는 편이 동기화가 될 확률이 높아.”
“알겠소.”
마침내 두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무랑이 불러 주는 대로 운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랑은 마지막 구결을 알려 준 다음 입을 다물었다.
이제 이 방식을 반복하면 된다.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문양 안에서 정좌한 두 사람은 바위처럼 굳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족히 두 시진은 꼬박 지난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구윤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혹시 실패한 건….”
“좀 더 지켜보세.”
무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구윤은 한 시름 덜고는 다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적어도 무랑의 표정에서 불안한 기색을 읽을 수 없었기에.
무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마전혼의대법은 시전자가 대상자에게 바로 사용하는 대법일세. 하지만 지금은 제 삼자인 내가 저 두 사람에게 사용했지. 그러다 보니 약간의 변형은 필수적으로 일어났고, 대법이 성사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네.”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건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네. 빠르면 한 시진, 늦으면 일 년이 걸릴 수도 있지.”
“예?”
구윤이 진심으로 놀라서 되물었다.
하지만 무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구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이번 작전이 성공할 확률은 얼마나 되나?”
“글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삼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삼 할에 들어갈 자신이 있으니까 시도했지요.”
“좋은 대답이군. 그 대답 그대로 돌려드리지.”
“아….”
“나도 한 시진 정도 걸릴 거라고 자신했기에 시도했을 뿐. 결과는 이제 운명에 맡겨야지.”
“그렇군요.”
구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사비강과 일살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아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두 시진이 지났다.
그야말로 반나절을 꼬박 흘려보낸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일살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처음으로 보인 변화였다.
그리고 잠시 후,
“후우우우우우.”
일살이 긴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반면, 옆에 앉은 사비강은 그대로였다.
구윤이 일살을 보며 물었다.
“어째서 운기를 그만두는 거요?”
그러자 일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다.”
“아….”
구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일살의 몸에 사비강이 빙의했다는 것을.
눈빛과 말투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일살이 일어나더니 목을 우두둑 꺾었다.
“조금 찌뿌드드하군.”
그러자 무랑이 다가오며 말했다.
“명심하게. 자네는 지금 어디까지나 일살의 몸을 빌려 쓰는 중이네. 신체 능력의 한계가 확연할 걸세. 자칫 자네 몸처럼 여기고 함부로 힘을 사용하려고 했다간, 그 몸이 버텨나질 못할 걸세.”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일살이 옆에 정좌한 사비강에게 다가가더니 품을 뒤적였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한 광경.
감히 살수가 사비강의 몸을 마음대로 뒤적이다니.
일살이 사비강의 품에서 스크롤 두 장을 꺼내들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었다.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날 보는 것도 느낌이 묘하군.”
“제 삼자의 눈으로 자네를 보니 어떤가?”
일살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잘 생겼소.”
왠지 사비강 다운 대답에 무랑이 피식 웃었다.
“바로 갈 텐가?”
“시간을 끌 필요가 없지. 어차피 이 몸을 빌리는 것도 단 하루에 불과하니. 비싼 몸이잖소?”
“암. 비싼 몸이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몸.”
“그럼. 다녀오겠소.”
구윤이 사비강을 보며 말했다.
“어젯밤 제가 보고 드렸던 최종 계획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아. 너무 완벽하게 해내도 안 된다는 것.”
구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의 빈틈. 그게 가장 중요하지요. 이 작전의 핵심입니다.”
“기억하지.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비강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스크롤을 부욱 찢었다.
그의 신형이 곧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기련산 중턱에 위치한 흑성의 정문.
스스스스슷…!
일살의 모습을 한 사비강의 신형이 정문 바로 앞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마침 경계 근무를 서던 마족 경비병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비강을 보고는 창을 앞세우며 소리쳤다.
“웬 놈…!”
하지만 그들이 끝말을 다 맺기도 전에,
타닷!
쉬이이이이이잇, 푹! 푹푹!
사비강의 신형이 날아들더니 순식간에 마족 경비병 둘을 제압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급소가 찔린 경비병 둘이 즉사하자, 사비강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목격자는 없는 듯했다.
사실 마왕이 머무는 흑성에 경비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제아무리 용감한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누가 이런 곳을 제 발로 찾아오겠는가?
이곳이 마계라면 또 모를까?
인간을 먹잇감처럼 여기는 마족들이니, 이곳에 경비 하나 없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성문 주변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경비병 둘이 쓰러졌는데도 보는 이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만 사비강은 몸이 무겁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당장 천해심보를 자유롭게 사용하던 그가, 지금의 몸으로는 일살이 익힌 최고 수준의 경공술만 사용할 수 있다 보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지금도 충분히 빠른 경공이었지만, 사비강의 기준에서는 아직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몸이 붕괴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사비강은 우선 경비병 시체 두 구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두었다.
아무리 경비가 허술한 곳이라지만, 성문 입구에 시체 두 구가 버젓이 쓰러져 있다면 머지않아 들킬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끌려면 시체를 숨기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시체를 숨긴 사비강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흑성의 구조는 똑같군.’
사비강이 눈을 빛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인간을 돕자는 건가?”
바리탄이 미간을 구기며 묻자, 하운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의외로 인간들이 제법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잘 이용한다면 마왕에게도 큰 짐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간이라… 하지만 그들은 곧 무너진다. 정도맹주가 마족이 되지 않았나? 게다가 그를 따르던 십만 무인들이 전부 마병이 되어 버렸지. 인간들은 지금 사태를 최대한 수습하려고 하겠지만, 곧 무너져 갈 거다.”
“그런 인간에게 헬무트가 굴복했지요.”
“그 반쪽자리 마족 말이군.”
“예, 정도맹주도 반쪽자리 마족이지요.”
“흐음.”
“정도맹주가 마족이 된 것은 분명 인간들에게 큰 타격일 겁니다. 하지만 맹의 총군사가 약은 수를 써서 오히려 강호인들을 결집시켜 버렸습니다. 아직은 쉽게 꺾일 때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이럴 때 우리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적어도 마다하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바리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인간을 아직 모르는군. 인간은 자고로 의심이 많다. 특히 필요할 때 나타나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의심을 던지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필요할 때 나타난다면 잘 이용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인간 중에는 그걸 역이용하는 놈들이 있거든. 겉은 단순해 보이는데, 그 내면은 참 복잡한 종족이란 말이야.”
“그들에게 우리의 호의를 믿게 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하하. 자네는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군. 생각보다 인간이 그리 멍청하진 않아. 아마 그들은 우릴 절대 믿지 못할 거다.”
“만약 후작님의 속내를 슬쩍 드러내신다면 어떻습니까? 결국 후작님도 마왕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반역을 도모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 주는 겁니다.”
바리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우리를 믿지 않을 거다. 오히려 그게 소문이라도 나서 마왕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의 대업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흐음.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운트가 고개를 숙였다.
바리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자네의 그 계략이 성공할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게 뭡니까?”
“인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것. 그 제안을 우리가 먼저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먼저 할 경우지.”
“아….”
“하지만 그놈들이 그럴 리가 없지.”
그때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실내에 한 인영이 연기처럼 스르르 나타났다.
대단한 은신법이었다.
물론 살기를 품고 공격을 시도했더라면 가당치도 않았으리라.
다만 오로지 숨는 목적이었다면 정말이지 하운트도 놀랄 정도로 감쪽같았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일살의 모습을 한 사비강이었다.
“누구냐?”
하운트가 표정을 굳히고 묻자,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멸마궁주께서 보내서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