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7
귀환 마교관
557화
슈우우우우우…!
능운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흑성이 보였다.
‘이곳이… 흑성…!’
흑성을 본 것은 정확히 두 번째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흑성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보았고, 이렇게 완공된 흑성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전에 흑성이 만들어질 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과 공포였다.
인간의 세상에 낯설고 거대한 무언가가 저절로 지어지는 모습은 내공이 심후한 그조차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흑요석처럼 검은 빛을 반짝이는 흑성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석양에 물든 흑성은 그야말로 힘의 상징처럼 보였다.
강하고, 단단하고, 높고, 날카로웠다.
이보다 든든한 곳도 없으리라.
흑성에서 눈을 뗀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과 함께 순간 이동된 십만 마병들이 보였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들은 이제 완전한 힘의 집약체가 되어 있었다.
사실 상대가 사비강이었기에 마병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지, 어지간한 무인이었다면 오히려 저들의 손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리라.
마병들 복판에 서 있는 아들러 백작.
능운파가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아들러에게 다가갔다.
한창 사비강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끼어든 그가 영 탐탁지 않았다.
사비강은 그에게 있어서 역린과 같은 존재였다.
반드시 뽑아내야 할.
자신의 인생에서 확실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존재.
한데 아들러가 갑자기 끼어든 것이다.
흑마(黑魔)가 된 능운파가 아들러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왜 내 싸움을 방해한 거요? 갑자기 이런 식으로 오면….”
순간 아들러가 휙 돌아서며 능운파의 손길을 쳐냈다.
탁!
“시끄럽다. 넌 아직 완전히 적응된 신체를 가질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
능운파가 눈살을 찌푸리고 아들러를 보았다.
아들러의 퉁명스런 행동에 화가 나기보다는 겁에 질린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더 컸다.
“갑자기 왜 그러시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가서 폐하를 뵙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라. 자콕 백작이 너를 안내해 줄 것이다.”
능운파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는 아들러를 보았다.
그가 아직 인간이었을 때는 아들러의 외형이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그 흉측함이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
하지만 지금의 아들러는 왠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너무나 약해 보인다.
이런 자가 자신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능운파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소.”
능운파가 흑성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아들러는 양손으로 팔뚝을 쓰다듬으며 부르르 떨었다.
“사비강…! 그자는… 무서운 자다…! 결코 방심해선 안 돼!”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아이처럼 공포에 잔뜩 질려 있었다.
사실 그는 사비강의 의식 세계로 들어간 후, 사비강의 욕망을 이용해서 마족으로 만들어 버릴 심산이었다.
또한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그를 통해서 자신의 미래 또한 엿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사비강은… 사비강은….
“나를 죽인 자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방법으로…!”
아들러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훑고 지나갔다.
**
“염병.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악천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살에게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그럼에도 일살은 착잡한 표정으로 악천괴를 보고 있었다.
악천괴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비강이 공력을 불어넣어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숨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때 사파를 대표하던 무인, 그리고 살막의 수장이 되어서 자신들을 이끌던 주인.
그런 사람치고는 최후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한쪽 팔은 찢어져 버렸고, 복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내장이 흘러나왔다.
처음 악천괴를 만났을 때는 그가 미치광이 살인마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오히려 그에게는 인간미가 있었다.
과거 살막주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살수들을 은근히 챙겼다.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 하나가 있었다.
“많이 먹어라. 먹어야 힘을 쓰지. 살수에게 낙은 먹고 싸는 것밖에 없다.”
모두들 살수는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악천괴는 감정을 가지라고 했다.
감정이야 말로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무기라고.
자신이 이렇게 강해진 것도 그 감정을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그때부터 살막은 조금 변했다.
그저 살인병기로만 살아왔던 살수들이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서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주로 사비강의 명을 받아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인도 모른 채 사람을 죽이는 일은 멀리하게 됐다.
살인을 하지 않는 살막.
참으로 이상한 조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변화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살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국 인간이었다.
애써 지웠던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오히려 그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삶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일살은 지금 악천괴의 죽음이 가슴 아팠다.
“막주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니미럴, 아직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른다. 벌써 단정하고 작별인사 하지 마라.”
일살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침 그의 곁으로 사비강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악천괴가 버럭 소리쳤다.
“늦은 것도 모자라서 적을 놓쳐 버리다니. 쯧쯧!”
“만리응이 느렸어.”
“허!”
악천괴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사비강이 나타난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역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사비강이 악천괴 곁으로 다가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재미없는 싸움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막주 악천괴를 능운파 곁에 두었다.
하지만 내심 오지 않길 바랐다.
어쩌면 자신이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능운파를 믿고 싶은 마음에.
정도맹주 능운파는 그런 존재다.
강호인들의 희망이 될 존재.
모두가 우러러보며 따라야 할 상징적인 존재.
그렇기에 더욱 그의 변화를 눈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마음은 구윤도 같았으리라.
그래서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그가 방관만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하지만 이번 실수는 구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가장 칼을 겨누고 싶지 않은 상대와 싸워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로도가 따랐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심적인 피로.
게다가 악천괴를 잃게 됐다.
그를 살려 주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믿음은 거의 없었다.
순전히 그의 재능이 아까워서 살려 준 셈이었다.
대신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채웠다.
하지만 이번 일로 깨달았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라지만, 때론 고쳐지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그 속담은 그 사람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악천괴가 변했다고 느낀 것은 오히려 모든 족쇄를 풀어 주었을 때니까.
자신이 더 이상 그를 쓰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단순한 이치다.
능운파처럼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훨씬 더 힘들겠지만.
어쨌거나 악천괴의 죽음은 사비강으로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사비강이 악천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죽어 가는 기분이 어때?”
“어떻긴. 엿 같지.”
“하긴.”
사비강이 알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느낀 적이 있지 않던가?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던 그 상황.
마계에서 마왕의 친위대에게 온몸이 꿰뚫려 죽어 가던 순간.
자신이 원하던 죽음이 아닐 때는 그야말로 기분이 엿 같다.
“그래도….”
악천괴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죽는 것보단 낫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그때라는 것은 사비강에게 죽을 뻔한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악천괴가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갔다.
“만약 그때 죽었더라면… 나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했을 테지.”
“별로 좋은 꼴도 보지 못했잖아?”
“이런 무식한…! 나는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걸 말한 거다! 이렇게 속뜻을 모르니… 쿨럭, 쿨럭! 쿠웨에엑!”
말을 쏟아내던 악천괴가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는 다시 숨을 헐떡이다가 겨우 말을 이어 갔다.
“결국 모든 건 마음에서 비롯된 것….”
“무슨 선문답이야?”
“그저 내가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것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회의감이 드는 건가?”
“회의감이라… 그런 지도. 다시 태어난다면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즐겨 보았을….”
악천괴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사비강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숨을 거뒀다는 것을.
“막주님….”
옆에 서 있던 일살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토록 참담한 심정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비록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살수들 모두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악천괴를 추모했다.
사비강은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사람 같이 살았나보군. 그렇게 따지면 그리 나쁜 죽음도 아니었어.”
그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살이 사비강에게 다가와 말했다.
“막주님의 장례를 치른 후 멸마궁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너희들은 자유다.”
“저희들 자유로 내린 결정입니다.”
일살은 두 눈 가득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일 때 가지는 살의와 달랐다.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좋을 대로.”
“그럼.”
일살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나서는 악천괴를 안아들고는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살수들이 따랐다.
아마 살막은 이제 강호의 역사에서 지워지리라.
사비강은 조금 전 일살의 눈빛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이젠 살수의 눈빛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일까?
자신이?
아니면 마족이?
아니면 악천괴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다.
그저 악천괴는 죽었고, 살막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강호 역사에 남을 무시무시한 이름 대신, 마족과 싸우는 것을 택했다.
단지 그 뿐이다.
지금은 뭔가를 깊이 생각하기엔 조금 지쳤다.
마침 구윤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는 사비강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온갖 감정이 다 들어가 있는 듯했다.
거기에는 좋은 감정도, 좋지 않은 감정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왜 진작 제게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구윤은 원망부터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곧 후회했다.
누가 누굴 탓한단 말인가?
아직도 멀었다.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요?”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구윤은 눈물을 흘렸다.
앞을 보지 못할 만큼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능운파를 다시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일한 생각이었다.
자괴감이 폐부를 찌르고 목숨까지 끊어버릴 정도로 심연 깊이 파고든다.
이대로 미칠 것만 같다.
모든 게 자기 때문인 듯했다.
희대의 천재?
도대체 무엇이?
구윤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회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생을 훨씬 오래 사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궁주께서 이 미천한 놈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제가… 제가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구윤은 절규하고 있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능운파를 잃었다.
정도맹주를 잃었다.
사실상 정도맹이 무너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호 십만 동도들을 잃었다.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자결을 해서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다.
지금 이 순간 구윤은 한 줌의 자존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 밑바닥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사비강이 구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마족 놈들과 최후의 전투를 준비해야 할 때요. 그리고 거기에 앞서 내겐 군사가 필요하고. 아무리 좋은 칼자루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고철덩이에 불과한 법. 내가 군사의 가치를 증명해 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