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5
귀환 마교관
555화
“살막주님….”
구윤은 분지 복판에 홀로 떨어진 악천괴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 가득 널려 있는 검은 알이 부화하면서 마병으로 변한 무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공을 거의 소진해 버린 악천괴는 그들의 손에 죽을 일만 남았다.
구윤은 하늘에 떠서 유유히 다가오는 능운파를 보면서 이를 뿌득 갈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저들을 제물로 바치다니…!”
눈물이 차올랐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당장 달려가 능운파의 멱살이라도 쥐고 따지고 싶었다.
이게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냐고!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이냐고!
이 강호를 지키겠다는 의지는 어디에 팔아 버렸냐고!
“군사님! 가셔야 합니다!”
비령이 구윤의 팔을 이끌며 소리쳤다.
하지만 구윤은 비령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말했다.
“아니다. 나는 남겠다. 너는 여길 떠나라.”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군사가 주인을 두고 어디로 가겠느냐? 하지만 너는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그럼 저도 가지 못합니다. 호위가 주인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인이 명령을 내리면 어디든 가야지. 하지만 나는 명령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남는 거다.”
“억지입니다!”
비령이 버럭 소리쳤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부질없다는 것을.
아직 먼 곳에서 유유히 날아오는 능운파였지만, 비령은 피부가 따갑도록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가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악한 존재가 되었는지.
아마도 구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해서, 어차피 무공이 약한 그로서는 이곳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래서 분하다.
무공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공은 약하지만 혜지는 누구보다 뛰어난 군사를 반드시 지키라고.
그 막중한 임무를 떠안고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침내 능운파가 지척까지 날아들었다.
그가 허공에 뜬 채로 구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군사. 어딜 가려는 것인가?”
구윤이 마주 웃었다.
“제가 주군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렇지. 그대는 나의 군사지.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바로 그대가 머물 곳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군이 그릇된 길을 가신다면 응당 제가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요.”
“걱정 마라. 나는 언제나 옳은 길을….”
“아뇨. 주군께선 지금 잘못된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잘못된 길이라. 무엇이 잘못된 길인가?”
“강호를 지키셔야 할 분이 오히려 마족의 앞잡이가 되어서….”
“한없이 약했던 저들이 더 강해졌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로 거듭났다. 군사, 그대도 더욱 강한 존재로….”
“정신 차리십시오!”
구윤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옆에 있던 비령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지금까지 구윤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눈시울이 잔뜩 불거진 구윤이 침을 튀어 가며 소리쳤다.
“저 뒤틀린 인간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저들과 함께 마족을 상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한데 어째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오히려 강호인이 약한 탓이라고 매도하십니까!”
능운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마침내 바닥에 착지한 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강함이 약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나쁜 것인가? 그것은 자연의 이치다. 또한 약한 군주가 감정과 자존심만 내세워 수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그것은 무능력이며 또 다른 죄악이다.”
“하! 그래서 마족이 강호인을 억압하니까 곧바로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야 했던 겁니까? 간이며 쓸개며 다 빼주고 꼬리만 흔들면 되는 겁니까?”
“그래서 나쁠 것이 뭔가?”
능운파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인간은 바로 그 감정이 문제야.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간단한 것을. 군사는 똑똑하니까 내 말뜻을 더 잘 이해하리라 믿는다.”
“닥치시오! 당신은 비겁할 뿐이야! 그리고 합리화 할 뿐이지! 그저 당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동족을 배신하고, 강호 동도들을 팔아넘겼어! 당신은 이제 그저 친마 앞잡이일 뿐이야!”
“별로 듣기 좋진 않군.”
“그래도 다행이오. 욕하는 건 알아듣는 것 같으니. 괴물이 달리 괴물이겠소? 공감할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 인성 자체가 괴물이지.”
“실망이군.”
“나 또한 실망이오.”
능운파가 구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윤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능운파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변신이 너무나 완벽했기에 애초에 능운파가 저런 존재였던 것만 같다.
능운파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자네는 죽을 수밖에.”
그렇게 그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쉭쉭쉭쉭쉭!
구윤을 둘러싸며 그림자들이 내려섰다.
그들은 바로 살막의 살수들이었다.
구윤과 비령조차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보았다.
마침 구윤을 등진 일살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말했다.
“군사께서는 어서 피하시오.”
“당신들이 왜 나를….”
“군사를 지키라는 막주님의 명이 있었소.”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살수들의 신의는 천륜보다 무겁소.”
그 한 마디 말이 구윤의 가슴을 때렸다.
그가 울분에 찬 표정으로 능운파를 쏘아보았다.
“보셨습니까? 비록 이들이 살수라지만, 당신은 이들만도 못합니다.”
능운파가 피식 웃었다.
“가소롭군. 결국 존재의 가치는 강인함으로 결정되는 것을. 약해빠진 벌레는 밟아 죽이면 그만이지.”
말을 마친 그가 열 손가락을 동시에 튕겼다.
피피피피피피피융!
그의 손끝에서 열 줄기의 지풍이 날아갔다.
따다다다당!
푹푹!
“크억!”
“억!”
몇몇 살수들이 지풍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하지만 다수의 살수들이 급소가 꿰뚫려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일살이 미간을 구기고는 소리쳤다.
“쳐라!”
파바바밧!
살수들이 일제히 능운파를 향해 달려들었다.
쉭쉭쉭쉭!
하지만 그들의 검은 번번이 허공만 내지르거나 베어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검술이 형편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살막은 악천괴가 막주가 된 후 짧은 시간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숨어서 기습하는 것에만 익숙한 그들이었지만, 악천괴가 살막의 주인이 되면서부터는 정면 승부에서도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기량을 갖춰 갔다.
한데 그러한 발전이 무색할 정도로 능운파는 너무나 강했다.
마치 그는 춤을 추듯 유연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반면 살수들은 날카롭고 빨랐다.
누군가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여러 명의 살수가 눈으로 쫓기도 힘들 만큼 빠른 공격을 펼치고 있는데, 느릿느릿 움직이며 보법을 밟는 능운파가 그 모든 공격을 다 피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순간,
피피피피피피피피융!
능운파가 다시 열 손가락을 튕겼다.
또 열 줄기의 지풍이 살수들을 향해 마구 날아들었다.
퍼퍼퍽! 따당! 푹!
“크아악!”
“어억!”
지풍에 당한 자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지.”
싸늘하게 읊조린 능운파가 곧장 구윤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손이 그대로 구윤의 목 줄기를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비령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능운파가 휘두른 손길에 그대로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슈우우우욱, 꽈다앙!
그대로 비탈길 바닥에 처박힌 비령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단 한 방에 깊은 내상을 입은 탓이다.
“군사…님…!”
“령아…!”
능운파가 피식 웃었다.
“애틋하군. 둘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깊었던가?”
“맹주! 당신은 정녕 인간이길 포기한…! 커억!”
어느새 능운파가 구윤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괴물이 달리 괴물이 아니라고. 나는 우리를 지배할 만한 종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더 큰 힘을 얻었다. 현명한 자라면 무릇 시류를 따라야 하지 않겠나?”
“그건 현명한 게 아니라, 그저 간사하고 비열한 것일 뿐….”
“시끄럽다. 벌레들이 의기투합해서 이길 존재가 아니다.”
능운파가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
쩌저어어억…!
하늘이 찢어지는 듯 괴이한 소리가 대운산 분지 가득 울렸다.
능운파가 눈썹을 구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뭐지…?”
다음 순간,
쩌어어어억…! 쩌어어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언덕 위에 버티고 있던 거대한 손바닥 복판이 길게 찢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 한 신형이 훅 튀어 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능운파를 향해 날아들었다.
샤샤샤샤샷!
“……!”
능운파가 반사적으로 구윤을 내팽개치고는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쩌어어어어엉!
고막을 찢어발길 듯 거친 소음이 터져 나왔다.
검봉과 검신이 부딪친 그 찰나지간에 능운파는 바람처럼 나타난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비강…?’
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나타나 검봉을 내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휘릭, 꽈앙!
사비강이 순식간에 몸을 회전하면서 발을 내지르자, 능운파가 얼른 장을 뻗어 막아냈다.
쑤아아아앙!
능운파가 그대로 하늘 높이 튕겨 날아갔다.
파밧!
사비강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능운파가 튕겨 날아간 방향이 아니었다.
마병들이 우글거리는 분지 복판이었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악천괴가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
“쿠와아아!”
“인간이다! 죽여라!”
마병들이 벌건 눈을 뒤집으며 사비강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슈커커커컥!
사비강이 베르타스를 한 차례 휘젓자, 그에게 달려들던 마병들이 순식간에 몸이 양단되면서 쓰러져 갔다.
만신창이가 된 악천괴가 사비강을 보고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히죽 웃었다.
“니미럴… 늦었잖아.”
“좀 늦었군.”
“행여나 안아들지 마라. 자존심 상하니깐.”
“괜한 걱정은.”
말을 마친 사비강이 그대로 손을 뻗어 악천괴의 목덜미를 쥐고 들어올렸다.
악천괴가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소리쳤다.
“이런 미친! 이게 환자를 대하는… 쿨럭, 쿨럭! 쿠웨에엑!”
고래고래 외치던 악천괴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악천괴를 들어 올린 채로 천해심보를 펼쳐 구윤 곁으로 날아갔다.
그는 악천괴를 구윤 곁에 눕히고는 한 줄기 공력을 불어넣었다.
“조금만 기다려.”
“제길, 곧 죽을 판에 뭔….”
“그래도 미운 정이 있는데, 작별 인사는 해야지.”
말을 마친 사비강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스팟!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있는 능운파 앞에 나타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