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1
귀환 마교관
551화
“헉, 헉, 헉!”
구윤은 비탈길을 따라 달렸다.
촤아악! 촤아아악!
등 뒤에서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힐끗 돌아보니 비령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흉측하게 생긴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지상의 지옥.
구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만치 단상 위에서는 맹주가 여전히 두 손을 활짝 들어 올린 채 동상처럼 굳어 있었고, 시커먼 까마귀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비는 대지를 흠뻑 적셨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사람들은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지는 점점 검은 늪으로 변해 갔다.
점액 성분을 가진 액체가 사람들의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안 돼에에…!”
“히이익! 살려줘…. 억…!”
분지의 검은 늪은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그렇게 무인들은 순식간에 늪에 삼켜졌다.
몇몇 무인들은 경공을 펼쳐 늪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늪가에서는,
촤아아아! 츄아아아!
한때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들이 솟구쳐 올라오면서 달아나는 구윤과 살막의 살수들을 추격해왔다.
“쿠와아아아!”
“퀴이아아아!”
“하압!”
“하아앗!”
촤아악! 촤아아악!
살수들이 휘두르는 검에 괴물들의 신체가 절단되면서 쓰러져 갔다.
수상비를 펼치는 무인들도 변이된 인간들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일전에 강림지 의식이 펼쳐졌을 때, 구윤은 수면경(水面鏡)에 비친 지옥도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이 일어났다.
지켜보는 입장과 그곳에 갇힌 입장은 천지차이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구윤은 자신의 몸에 떨어져 내리는 검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먹물처럼 시커먼 액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끈적끈적한 느낌이다.
치이익…! 치익…!
몸에 달라붙는 검은 빗물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기화되면서 날아갔다.
아마도 비령이 품에 넣어 준 부적이 효과를 본 듯했다.
반대로 밀려드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악천괴는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호신강기를 둘러서 검은 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무랑의 부적만큼 완벽한 방어는 되지 못했다.
‘나한테 부적을 넘기는 바람에…?’
구윤이 흠칫거리고는 악천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군사님! 달리세요!”
구윤의 팔을 비령이 확 잡아끌었다.
구윤이 얼떨결에 비령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악천괴는 여기저기 몸을 날리면서 밀려드는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덤벼라! 이참에 정파 놈들 모가지나 실컷 따야겠구나! 본좌에겐 오히려 살풀이 할 기회를 주는구나!”
한때 동료의식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들에게 검을 뻗기 전에 일말의 망설임이라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천성이 사악했던 악천괴는 오히려 이렇게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즐겁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놈들은 한때 자신이 경멸하다 못해 살의까지 느끼던 정파 무인들이 아니던가?
“크하하하! 평생을 고지식한 척 살던 놈들이 꼴좋구나! 뒈져라! 뒈져! 본좌의 손에 뒈져라!”
악천괴의 무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살수들조차 자신의 주인인 악천괴가 이처럼 무시무시한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악천괴가 익힌 귀살조공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악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었다.
푸욱!
손가락 하나하나가 칼날보다도 예리해진 악천괴가 괴물의 가슴에 손을 쑤셔 넣었다.
부우욱!
“퀴아아아악!”
괴물이 몸을 비틀며 괴성을 터뜨렸다.
악천괴는 손에 뽑혀 나온 괴물의 심장을 보았다.
뜨거운 심장은 여전히 꿈틀꿈틀 뛰고 있었다.
우적…!
순간 악천괴가 심장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뜯어 버렸다.
그 광기서린 모습에 주위의 살수들조차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었다.
“퉤!”
심장을 한 입 뜯은 후 거칠게 뱉어낸 악천괴가 손에 들린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는 말했다.
“한심한 작자들…! 그토록 온갖 정의를 떠들어대면서 깨끗한 척을 했으면 끝까지 고고하게 뒈졌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그의 눈동자에는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 옛날의 일이 떠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날의 일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돌았다.
그가 귀살조공을 익히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이.
**
악천괴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형 악천후(岳天煦)와 함께 둘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악천후는 어느 무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왔다.
형의 꿈은 유능한 무인이 되어서 표국에서 표사로 일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형은 무공에 재능이 있었다.
무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어깨너머로 무공을 틈틈이 익혔고,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히 골목에서는 힘 좀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낭중지추라던가?
결국 형의 재능은 관주의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관주가 직접 형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날이 왔다.
형은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뻐했다.
“괴야, 이제 형은 표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관주님이 내게 무공을 직접 가르쳐 주신단다. 물론 권법만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관주님의 권법을 익히면 아주 강한 무인이 될 수 있단다. 너는 이 형만 믿고 열심히 글공부나 해라.”
악천괴는 그런 형이 무척 든든했다.
늘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형님이었기에 부모의 빈자리를 느끼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좋은 일이 생기고 나면 반드시 나쁜 일이 세금처럼 따라 붙는 법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관주의 제자들이 형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했다.
관주가 정식으로 입문한 자신들보다 형을 더 챙긴다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관주가 계속해서 형을 비교하면서 그 제자들을 나무란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식 제자들이 악천후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하루는 악천괴가 진심으로 걱정을 했더니, 형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너무 걱정 마라. 그들의 질투를 내가 어찌 하나하나 헤아려서 다독이겠느냐? 그들도 머지않아 자신들의 그런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악천후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했다.
어느 날 관주의 정식 제자 세 명이 집을 찾아왔다.
“천후! 네놈이 사공을 익혔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장 나와라!”
“우린 너에게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한다! 우리 무관에서 사공을 익힌 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당장 나오지 못해?”
그들의 엄포에 악천후는 동생을 달래 주고는 점잖은 모습으로 마당으로 나왔다.
“세 분은 어찌 나를 모함하시오? 나는 사공을 익힌 적이 없소. 내가 익힌 무공은 오로지 관주님께 익힌 것이 전부요.”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이 사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 하루아침에 무공이 발전할 수 있다는 거냐?”
“그건 재능 차이가 아니겠소?”
악천후도 타고난 성격이 있는 지라 상대를 넌지시 도발하는 말을 꺼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작정을 하고 온 것인지도 몰랐다.
“뭣이? 네놈이 정녕 사공을 익히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나보구나!”
“사악한 무공으로 강해져 봐야 쓰레기 같은 인간밖에 더 되겠는가?”
제자들이 소리치자, 악천후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냉랭하게 받아쳤다.
“그 말은 지금 관주님의 무공이 사공이라는 뜻이오?”
“노옴! 이젠 관주님까지 능멸하는 것이냐!”
“당신들이 먼저 그리 말하지 않았소? 내가 사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내가 익힌 무공이라곤….”
“닥쳐라! 더 들을 것도 없다!”
일제자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더니 빠른 속도로 악천후를 기습 공격했다.
악천후는 얼른 물러나면서 상대에게 일권을 뻗어냈다.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일제자가 울컥 피를 토하면서 물러났다.
“대사형!”
“괜찮으십니까?”
이제자와 삼제자가 소리치면서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앙!
“노옴! 그 사악한 무공을 사용하다니!”
“닥치시오! 내가 사용한 건 어디까지나 관주님이 가르쳐 준….”
“시끄럽다!”
두 제자가 동시에 악천후를 향해 공격해 왔다.
아무리 무공에 재능이 있는 악천후라지만 이제자와 삼제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그가 익힌 것은 오로지 권법.
반면 이제자와 삼제자는 검법을 익혀서 검공을 퍼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천후는 제법 오래 버텼다.
대략 서른 합을 버텼을까?
문을 살며시 열고 숨어서 지켜보던 악천괴는 형의 배후를 노리는 일제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형님! 뒤에…!”
하지만 악천후의 반응보다 일제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타닷, 푸욱!
“컥…! 어…?”
악천후는 자신의 배를 뚫고 튀어 나온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죽음의 공포와 타들어가는 통증을 느끼고는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푹! 푹!
“컥…! 크억…!”
이제자의 검이 목을 뚫었고, 삼제자의 검이 가슴을 뚫었다.
순간 악천괴는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형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지독한 악몽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어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쑤욱…! 촤아아악! 촤아아악!
세 자루의 검신이 뽑혀 나오자, 악천후는 피를 분수처럼 터뜨려내면서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형님….”
어린 악천괴가 악천후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악천후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악천괴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했다.
적어도 악천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형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동생의 삶을 걱정하고 있다고.
털썩!
결국 악천후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형님!”
악천괴가 문을 열고 뛰어나가 형의 시신 위에 엎드려 오열했다.
세 명의 제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실 그들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하기 어려운 부상을 주고 다시는 무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막강한 권공을 펼치는 악천후를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호승심과 살의를 느끼게 된 것이다.
삼제자가 씨근거리며 말했다.
“흥! 아무리 그래도 맨, 맨손 하나로 우리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러게 말이야. 결국 무의 끝은 검인 것을. 주먹 하나만 믿고 주제도 모르고 설쳤으니 이 꼴을 당한 게지.”
“쯧쯧…!”
일제자와 이제자가 차례대로 힐난을 퍼부으며 혀를 찼다.
그때였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노호성과 함께 싸리문을 열고 나이 지긋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바로 악천후에게 권공을 가르쳐 주었던 관주였다.
세 명의 제자가 악천후를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래도 찜찜한 마음에 직접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악천후를 보았다.
“이런 멍청한…!”
“사, 사부님…!”
“닥쳐라!”
관주가 제자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다짜고짜 뺨을 올려붙였다.
휘청거린 제자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이 녀석이 사공을 익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예상보다 거칠게 나오는 바람에….”
“시끄럽다!”
관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싸리 울타리 너머로 모여들어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누군가 들어와 조심스레 물었다.
“관주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청년은 왜…?”
모두의 시선이 관주에게 향했다.
관주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한때 내가 아끼던 아이였는데…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사공을 익혔다고 하오. 그 일을 내 제자들이 따지러 왔다가 결국 이렇게 된 모양이오.”
“사공을…!”
“아무리 사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검을 쓰기 전에 먼저 충분한 대화를 나눴어야 하는 것을. 이것이 다 내 못난 제자 탓이오.”
그날 관주는 그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