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
귀환 마교관
550화
모두 물러간 뒤 능운파는 다시 침상에 홀로 남았다.
샤아아아…!
목걸이는 계속해서 능운파에게 속삭였다.
격동하던 마음은 어느새 진정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꾸물럭… 꾸물럭…!
역오망성 모양의 펜던트에서 검은 진액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능운파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
농도가 무척 짙었기에 마치 액체가 아니라 자유롭게 변형이 되는 고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액체는 바닥을 눅눅하게 적시면서 거뭇하게 물들어 갔다.
잠시 후.
스스스슷…!
검은 바닥에서 검은 붕대 같은 것이 휘감기듯 올라오면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얼굴에 돌기가 가득 박힌 인간.
아니, 인간인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다.
적어도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 어떤 인간도 저렇게 흉측하게 생기기는 어려울 테니.
얼굴에 잔뜩 돋아난 촉수 같은 것이 애벌레마냥 꿈틀거리는 자.
그는 바로 아들러 백작이었다.
능운파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
분명 눈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음에도 그의 반응은 신기할 정도로 냉정했다.
아들러는 주위를 한 차례 휘둘러보고는 능운파와 시선을 마주했다.
“능운파 정도맹주.”
“당신인가? 날 이 자리로 이끈 것은?”
아들러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얼굴이 어찌나 흉측한지 그 미소조차 역겨울 정도였다.
“그렇네. 그리고 자네를 더 높은 자리까지 이끌어 줄 자이기도 하지.”
“그대는 마족인가?”
“그렇다네.”
고개를 끄덕인 아들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바닥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 액체도 아들러를 따라서 천천히 이동했다.
능운파가 눈알을 굴려 아들러를 가만히 보았다.
“그렇지. 지금 기분이 어떤가?”
아들러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돌아서며 물었다.
능운파가 피식 웃고는 자신의 두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젠 다른 검을 집어들 때라는 것을.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기분이라. 글쎄. 오묘하군.”
“그렇군. 지금까지 나는 몇몇 인간들을 승화시켰다네.”
“승화…?”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지. 중원에도 그런 존재가 있는가?”
“선인을 말하는 거라면.”
능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러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지만 그것과 조금 다르지. 뭐랄까? 결이 다른 존재가 되는 거라네.”
“더 강한 존재인가?”
능운파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아들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능운파의 눈동자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뜨거운 열망을 읽었다.
지금까지 그가 승화시킨 모든 존재들이 능운파와 똑같았다.
그들은 모두 갈망했다.
더욱 강한 힘을!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아들러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물론이지. 자네는 나의 역작이 될 걸세. 지금까지 내가 승화시킨 그 어떤 자들보다 강해질 수 있네.”
능운파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거의 모든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거기에 복잡한 내면까지.
그 복잡한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악마를 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구 할의 완성이라고 봐야 했다.
아들러가 능운파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은 촉수가 꾸물꾸물 자라나더니 이내 능운파의 이마에 흡착됐다.
능운파는 그 징그러운 촉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아들러를 보았다.
“뭐하는 건가?”
“쉿… 자네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해야지. 그래야 차질 없는 승화가 이루어질 것이네. 하찮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잠시 후 아들러의 얼굴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들러가 한 걸음 물러서더니 액체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게나….”
말을 마친 아들러는 완전히 검은 액체 속에 녹아 버린 듯 모습을 감춰 버렸다.
검은 액체가 곧 꾸물거리며 흘러와서는 능운파의 발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목을 타고 올라온 액체가 능운파의 코와 귀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능운파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두고도 왜 갈등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액체가 코와 귓속으로 들어가고 나자, 그의 눈동자가 온통 검은 동공으로 채워졌다.
그의 입매가 희미하게 뒤틀렸다.
“그대나 차질 없이 준비하시오. 나의 운명을 위해서.”
**
대운산 분지는 아름다웠다.
이름 모를 풀잎과 꽃잎이 산들바람에 살랑거렸고, 초원 군데군데 솟아오른 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예쁘기만 했다.
그런 곳에 십만의 병력이 집결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워낙 자연 풍광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남녀노소 섞여서 하하호호 떠들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마치 십만의 무인들이 다 함께 단합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북쪽에는 간이로 설치된 높은 단상이 있었는데, 잠시 후 능운파가 연설할 자리였다.
구윤이 능운파에게 다가가 연설문을 건네고 돌아왔다.
그는 조금은 불안한 눈길로 단상의 계단을 따라 오르는 능운파의 뒷모습을 보았다.
“항마부는 잘 챙겨 두었는가?”
악천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굳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진심인가?”
악천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맹주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자네 눈은 흔들리는군.”
“저는…!”
“어제 이야기가 잘 안 되었나보군.”
구윤이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뇨. 이야기는 너무 잘 됐습니다.”
구윤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악천괴가 그런 구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진실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
결국 구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의 가능성은 보았습니다. 그간 맹주님을 너무 외롭게 둔 것 같더군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차차 나아질 겁니다.”
말을 마친 구윤이 능운파의 뒷모습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맹주님. 아직 늦지 않은 것이겠지요?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거지요?’
마음이 착잡했다.
과연 어제 맹주가 자신에게 진짜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순간 구윤은 막사를 걸어 나오면서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로 맹주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물론 천무를 내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만… 어젯밤 맹주가 자신에게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구윤의 시선이 한쪽 옆에 서 있는 이자준에게 향했다.
그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한 구윤이 걸음을 막 옮기려고 할 때였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게.”
악천괴가 능운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구윤이 돌아보자 악천괴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본좌의 생각에는 자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을 것 같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무슨 사달이든 날 것 같지 않은가?”
구윤이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는 악천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는 악천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능운파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저 아득히 먼 하늘이었다.
그곳에 시커먼 먹구름 떼가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 먹구름이 아닌가?
까마귀 떼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모습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마치 새하얀 화선지 위에 먹물을 퍼뜨린 모습이랄까?
악천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명심하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네.”
“대체 무슨…?”
“혹시 몰라 어제 가장 빠른 수단으로 멸마궁에 전서를 보냈네. 부디 늦지 않기를 바라야지.”
“막주께선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
그때였다.
“이제 모두 집중해 주시오!”
크고 또렷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자준이었다.
어느새 한 걸음 나선 그가 분지에 가득 모인 십만 무인들에게 일갈을 터뜨린 것이다.
공력을 담은 목소리였기에 십만이나 되는 무인들이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자준이 악천괴와 구윤이 서 있는 곳을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맹주님께서 연설을 하십니다. 경청해 주시기 바라겠소.”
악천괴와 구윤의 시선이 단상 위로 향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십만 무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단상 위에 선 능운파를 바라보았다.
능운파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더욱 강해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그것을 부정할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강해지는 방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마족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대들도 느꼈을 것이다.”
능운파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공력이 담겨 있었기에 십만 무인들의 귀에 또렷이 박혀 들었다.
구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건….”
“자네가 써 준 연설문이 아닌 것 같군.”
구윤이 불안한 심정으로 능운파를 보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맹주님!’
능운파가 양손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힘을 얻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그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인간의 잠재력을 모두 깨우고, 나아가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그런 능력을 얻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짜르르르르릉! 꽈과아앙!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날아든 수많은 까마귀 떼가 대운산의 분지 위를 빽빽하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인들이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까악! 까아악! 까악!
짜르르르릉! 꽈앙!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까마귀 떼가 서로 부딪치기라도 하면 천둥이 울리면서 벽력이 내리쳤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무인들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뭐, 뭐지?”
“갑자기 웬 까마귀 떼가…? 아니, 까마귀가 맞긴 한 거야?”
“삼족오(三足烏)다! 눈이 세 개다!”
“네 개인 녀석도 있어! 아냐, 무수히 많은 눈이 박힌 녀석도 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무인들이 저마다 술렁거릴 때였다.
능운파가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오늘 우리의 운명은 새로 시작될 지어다! 우리의 존재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꽈과과과과아앙!
요란한 천둥이 울리는가 싶더니 까마귀 떼가 더욱 세차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먹구름처럼 몰려든 까마귀 떼가 하늘에서 제멋대로 날아다니자, 대운산 분지는 한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다.
정말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쨍하던 아름다운 초원은 이제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짜르르르르르르릉!
“엇! 떨어진다!”
“까마귀 시체가 떨어진다!”
마구 부딪치며 온몸이 찢겨 나간 까마귀 떼가 시커먼 액체가 되어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군사님!”
순간 비령이 비명처럼 외치며 날아들더니 얼른 가슴에 품고 있던 부적 한 장을 얼른 구윤의 품에 넣어 주었다.
“령아… 저게 대체 뭐지?”
“군사님! 아무래도 여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어서 여길 떠나….”
그 순간,
“너희들의 운명에서 달아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도록 하라! 당당히 맞서는 자, 강해지리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리라!”
능운파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순간,
쑤아아앙! 쑤아아앙! 쑤아아앙!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덮어놓고 사람들을 짓눌러 죽이는 신수가 아니었다.
대신 거대한 손바닥은 분지를 빙 두르면서 장벽처럼 세워졌다.
곧이어 맹주의 목에 걸린 역오망성 펜던트에서 검은 연기가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쑤아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능운파의 두 눈이 칠흑처럼 물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이, 이게 뭐야! 안 돼에에엑!”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액체를 덮어 쓴 자들이 비명과 함께 괴이하게 몸이 꺾여 가기 시작했다.
구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능운파를 보았다.
“맹주님…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이게 대체… 무슨….”
짜악!
순간 눈앞이 번쩍이면서 뺨이 휙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악천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정신 차리게! 어서 자네 호위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해!”
그런 중에도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검은 비는 십만 무인들의 몸을 적셔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