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9
귀환 마교관
549화
진영 한쪽에 임시로 만들어 둔 간이의자와 식탁에 능운파와 구윤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군.”
능운파가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구윤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랬지요. 제가 술이 워낙 약하다 보니 일어난 일이었지요.”
“하하하. 그랬지. 자네는 유난히 술을 못 마셨어. 한두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져서는 헤실헤실 웃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제가 사부님께 반말까지 했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는가?”
“예, 그때 제 모습이 기가 차셨는지, 사부님이 그랬답니다. 맹주님을 모셔 와서 네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호오, 그래서?”
“제가 그랬답니다. 지금 당장 맹주를 불러오라고. 맹주한테 술 한 병 더 가져오라고 시켜야겠다고.”
“하하하하!”
능운파가 큰 소리로 웃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웃어 본 게 언제 적인지 모르겠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언제나 다소곳한 자네가 그런 모습을 했다니. 내가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쉽군.”
“하하. 직접 보시면 괜히 봤다고 후회하실 겁니다.”
“그런가? 한 번 어디 구경해 볼까? 지금이라도 술 좀 마셔 볼까?”
“하하. 무관 개도 삼 년이면 운기행공을 한다 하지 않습니까? 저도 주당들과 어울리다 보니 이제 제법 마십니다. 어쩌면 이젠 제가 맹주님보다 주량이 더 셀 지도 모릅니다.”
“허! 그럴 리야 없지. 자네가 내 주량을 얕잡아보는군. 이거 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말을 마친 맹주가 껄껄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구윤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맹주는 이런 사람이다.
자신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허울 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
강호를 지배하면서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지만, 자신에게는 오랜 친구와 같은 사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저는 맹주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기에 애써 지금껏 외면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딘지 조금씩 무너져 가는 맹주의 모습을.
계속 못 본 척, 모른 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능운파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는 구윤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자네에게만 비밀을 하나 말해 줄까?”
“뭡니까?”
구윤이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자연스럽게 속 깊은 이야기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맹주가 본론을 꺼내들 줄은 몰랐기에.
맹주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용히 말을 흘려냈다.
“사실은 말일세. 자네가 들으면 꽤 놀랄 이야기가 있네.”
“말씀하십시오. 마음 단단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전 언제나 맹주님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 사실은 말이야… 나도 자네가 무척이나 좋다네.”
“예?”
구윤이 얼빠진 표정으로 보자, 능운파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하하하하!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술을 마시니 이 밤이 어찌 내게 이롭지 아니할까!”
능운파가 목청껏 소리치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그는 감질난다는 듯 곧 술병을 통째로 들어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이 역시 맹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데 지금의 이 모습은 어딘지 좀 다르다.
그간 까칠하면서도 예민한 맹주의 모습과 많이 차이가 난다.
예전의 맹주와 다르지만 최근의 맹주와도 다르다.
뭔가 좀 더 인간 본질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어쩌면….’
자신은 그저 맹주와 허울 없이 지내는 사이라고 착각한 것이 아닐까?
사실은 맹주의 가장 깊은 속을 여전히 몰랐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자신이 아는 맹주는 언제나 맹주였다.
즉, 능운파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모르겠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하지만 그가 어떤 맹주인지 묻는다면 촌각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할 수 있으리라.
기분 좋게 웃는 능운파를 보면서 구윤은 괜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저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군요. 맹주님과 깊은 관계라고. 많이 외로우시진 않으셨습니까?’
저렇게 기분 좋게 웃는 맹주를 보는 게 얼마만인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저런 인간다운 웃음을 본 것은.
지금의 능운파는 정말이지 맹주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이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그동안 고립되어 있었을지.
지금껏 얼마나 외로웠을지.
만약 자신에게 맹주의 자리를 지키라고 한다면?
자신 없다.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그런 자리에 오를 자신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연기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강한 사람. 믿음직한 무인. 정의로운 인간. 대의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군주.
그 보이지 않는 창살 하나하나가 자신을 숨 막히도록 옭아매리라.
능운파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얼마 만에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아닐세. 총군사라는 자리가 그리 한가한 자리가 아니지.”
“맹주님….”
구윤은 가슴 한편이 먹먹하게 젖어들었다.
과거 자신의 사부는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윤아, 자고로 군사는 그 누구보다 군주와 가까워야 한다. 이는 머리로 가까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아니, 그때 자신은 명심하지 못했다.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데 이제야 사부의 뜻을 깨우치게 되다니.
‘사부님. 아둔한 제자가 이제야 그 속뜻을 깨닫습니다.’
부디 너무 늦지 않은 것이기를.
구윤이 술잔을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음? 갑자기 무엇이?”
능운파가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묻는 표정을 보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이젠 제가 술을 너무 잘 마셔서… 맹주님께 그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게 된 점이…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가 젖어 버렸다.
보여드렸어야 했다.
자신이 술을 마시고 망가지는 모습을.
그리고 봐드려야 했다.
맹주가 술을 마시고 망가지는 모습을.
이런 분을 홀로 오랫동안 외롭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능운파가 우뚝 멈췄다.
“군사… 우는 건가?”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해서….”
“뭐야? 진짜 우는 건가? 풋, 하하하하!”
능운파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오랫동안 배를 쥐고 웃는 것인지 저대로 숨이 안 넘어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취기를 밖으로 배출하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한참이나 웃은 능운파가 말했다.
“자네, 정말 재미있군! 술 취하면 맹주도 시종처럼 부리고, 이젠 계집처럼 눈물도 흘리고 말이야! 하하하! 이제 보니 우리 구 군사 주사가 장난 아니구먼!”
“아… 그러게 말입니다.”
구윤이 눈물을 닦으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다.’
“자 마시게!”
“좋습니다! 오늘 제 주량을 제대로 한 번 보여드리지요!”
“좋아!”
능운파와 구윤이 서로를 마주보며 히죽 웃고는 각각 술병을 들어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술병을 기울였을까?
두 사람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대화만 주고 받은 것은 아니다.
때론 마음이 숙연해지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도 다루었고, 함께 헤쳐 나온 고난과 역경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같은 것을 깨달았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마음까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않는다면 누구보다도 먼 거리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을.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처음으로 알아 갔다.
마침내 구윤이 술병을 탁 내려두고는 말했다.
“맹주님. 이젠 제가… 맹주님 곁에 있겠습니다.”
“자넨 언제나 내 곁에 있었네.”
“더욱 가까이 있겠습니다.”
“고맙군.”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제 마음과 머리로 그 모자란 것들을 한 번 채워 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능운파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구윤을 바라보았다.
왜 보이지 않았을까?
이런 자가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누구보다 자신에게 충성했던 자를.
그리고… 이자준, 그는 왜 자신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것일까?
오늘 술은 참 이상하다.
달게 마셨다가 끝은 쓰다.
‘그래, 이젠 그만 정신 차릴 때가 된 게지.’
아직 늦지 않았다.
해가 밝지 않았다.
오늘 밤은 생각보다 길 것이고, 내일 정오까지라면 군사가 어떻게든 방안을 생각해 낼 것이다.
능운파가 일어났다.
“일어나세.”
“예?”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네. 그리고 할 말도 있네.”
구윤은 본능적으로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들어… 아니, 실은 꽤나 오래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
맹주에게서 느낀 낯선 모습들.
어쩌면 이제 그 원인들에 대해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 이 길고 긴 대화가 적어도 무의미하진 않았던 것이다.
구윤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막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난장판이 된 막사는 그대로였다.
“진즉 자네에게 말해 주었어야 할 것을.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하나 자네라면 모든 걸 되돌려 놓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보여주실 게 무엇입니까?”
“그건….”
능운파가 침상으로 걸어가 베개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그가 멈칫거렸다.
없다!
‘어째서?’
분명 베개로 슬쩍 덮어 두고 나갔다.
그 사이에 누군가 다녀간 것인가?
능운파가 당황하는 사이, 구윤이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물었다.
“맹주님?”
“아… 그것이….”
그때였다.
“맹주님, 창신단주 이자준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이자준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군사님이 와 계셨군요.”
“아, 이 단주님.”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간단히 목례를 나눴다.
능운파가 미간을 구긴 채 이자준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이걸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
“뭔가?”
이자준이 구윤을 등진 채 능운파를 마주보며 섰다.
그가 입매를 비틀며 목걸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물론, 구윤은 이자준의 몸에 가려진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었다.
“혹시 찾으실까 봐.”
“이건…! 이걸 왜 자네가…?”
하지만 이자준이 듣지 못한 척 말을 가로지르며 보고했다.
“아, 희소식이 있습니다.”
“희소식?”
“사비강 궁주가 무사히 귀주를 지켜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족 기사들을 대거 굴복시켜 수하로 거두었다고 합니다.”
“마족을 수하로…?”
“그 덕에 강호인들이 일제히 사비강 궁주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신 없을 강호영웅이라고 말이지요. 멸마궁에 지원하는 무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런….”
능운파의 가슴 한편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이자준의 손에 들린 목걸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두 눈이 욕망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샤아아아아…!
목걸이가 말을 걸어 오고 있었다.
능운파가 목걸이를 가져가며 장삼 소매에 넣었다.
“그것 참 잘 된 일이군.”
능운파가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자준이 빙그레 웃으며 물러가자, 구윤이 넌지시 불렀다.
“맹주님…?”
“아, 구 군사.”
“아까 하실 말씀이….”
“실은… 내가 천무를 떠나보냈네. 자네에게는 미처 말하지 못한 사실일세.”
“아…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최근 건강이 안 좋은지 자잘한 실수를 하더군. 소환지 토벌을 할 때도 호흡이 썩 맞지 않는 편이었고.”
구윤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적당한 인물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겠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인지요?”
“그렇다네.”
능운파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더 할 말이 필요하냐는 듯.
구윤은 다시 느꼈다.
그 위화감을.
하지만 더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게. 피곤하군. 나도 이만 쉬어야겠어.”
“그럼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