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8
귀환 마교관
548화
구윤이 붓을 멈추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적어 내려간 글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종이를 들어 찢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어 새 종이에 글씨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분열되었던 강호가 대동단결하여서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그 자리에서 맹주가 연설을 한다.
어떻게든 한자리에 모인 무인들에게 귀감이 되면서 강렬한 자극이 될 연설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설은 지금 구윤의 붓끝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일필휘지로 적어 가던 구윤은 다시 우뚝 멈추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아니다. 부족해. 뭔가 더 마음을 울릴 만한 자극이 있어야 해.’
그가 이번에도 종이를 찢어 버리자, 뒤에서 문득 소리가 들려왔다.
“고생이 많군.”
동시에,
쉬이이이잇!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타나더니 목소리의 주인을 매섭게 공격했다.
하나, 목소리의 주인이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상대의 검을 흘려내고는 일장을 뻗었다.
펑!
그림자가 물러나면서 재빨리 몸을 회전하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구윤을 등지고 나타난 그림자는 바로 그의 호신위인 비령이었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말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살막주 악천괴였다.
악천괴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암고양이가 이젠 같은 편에게도 발톱을 드러내는구나.”
“아군이라면 왜 배후에서 몰래 접근하는 거죠?”
비령이 물러나지 않고 미간을 곱게 구겼다.
악천괴가 실소를 터뜨렸다.
“고년 참 맹랑하군.”
“입 조심하시죠.”
“허어. 네년도 내가 사파 출신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구나.”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에요.”
“고얀 년. 한 마디도 안 지는구먼.”
악천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차자, 구윤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비령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게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이쪽에서도 거칠게 대응할 수밖에요.”
침착하게 말을 건네긴 했지만, 사실 구윤도 놀라긴 했다.
기본적으로 호신위인 비령을 믿고 있었기에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예고도 없이 불쑥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등골이 서늘했으니까.
비령이 이처럼 까칠하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악천괴가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흥! 예고하고 찾아올 일이었다면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 않았겠지.”
“그러니 그 이유를 여쭤 보는 겁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네.”
“좋지 않다는 것은 무슨…?”
“그냥 직감일세. 살막주로서 느끼는 직감이라고 해도 좋고, 오랜 세월 살아온 이 늙은이의 생존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라고 해도 될 테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윤이 눈살을 찌푸리자, 악천괴가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지금 진행되는 이 일련의 과정들에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위화감이라면 어떤…?”
“생각해 보게.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마족을 숭상하는 추마회였어. 한데 맹주를 만난 지 고작 한나절 만에 그들의 마음이 변했다고? 뭔가….”
“한나절입니다. 한 시진이 아닙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요.”
“하나 그만큼 큰 조직의 정체성을 뒤틀기에는 짧은 시간이지.”
“추마회가 함정을 팠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맹주님이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셨겠습니까?”
“그렇지. 맹주가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을 거라고 보네. 그런 자라면 애초에 맹주가 되지도 못할 테니까.”
“게다가 모사성은 한때 맹주님과 함께 강림지 전투에도 참가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더 문제지. 심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진정으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뭡니까?”
구윤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왠지 악천괴가 지금 하는 말들을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겨우 추마회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맹주의 노력과 능력을 깎아내리려는 것인가?
‘추악한…! 굳이 이 시점에 불안을 조성할 필요가… 가만….’
불안이라….
구윤이 잠깐 멈칫거리고는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불안한가?
왜? 모든 게 잘 풀렸는데 무엇이 불안한 거지?
그렇다.
오늘 이상할 정도로 연설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붓이 뜻대로 가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어딘지 모를 위화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구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을 파악한 것인지, 악천괴가 눈치를 보다가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자네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아뇨. 저는 맹주님을 믿습니다.”
“아무리 맹주라고 할지라도 추마회를….”
“추마회주 모사성은 한때 맹주님과 함께 마족을 무찌르던 강호 영웅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마족을 추앙하는 것이 이상할 일이지요. 잠시 그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맹주님이 바로잡아 주신 겁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악천괴가 구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구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악천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막사 한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뒷짐을 졌다.
“지친 게야. 그간 지치지 않을 수도 없겠지. 내부의 적을 물리치고, 사파를 물리치고, 마령교를 물리쳤더니… 이젠 마족이라니. 자네도 인간인 만큼 이젠 지칠 때가 온 게야. 거기에 마지막 기둥처럼 의지하고 믿은 맹주를 다른 시선으로 보기는 어렵겠지.”
“무슨 말씀을….”
“그간 많은 정보를 찾아내고, 많은 전략과 전술을 세웠을 테지. 아마 이 강호는 자네가 뒤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할 걸세.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
“자네가 이 강호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말일세.”
구윤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악천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피식 웃었다.
“살막주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참 감회가 새롭군요.”
“나도 내가 정도맹 총군사에게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네.”
“혹시… 맹주님을 미행하셨습니까?”
“아서.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한 소린가? 살수가 한 번 움직이기 위해서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사전 준비를 해야 해.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더라도 전쟁을 앞두고 기가 날카롭게 다듬어진 적진의 가장 깊은 곳을 준비도 없이 갑자기 잠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다만… 이 모든 과정이 어딘지 뒤틀려 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어.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고. 만약 지금 진행되는 일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면… 그걸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네뿐이야.”
“…….”
구윤이 말없이 서 있자, 악천괴가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자네도 뒤틀린 것을 제대로 잡지 못할 수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후회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을 마친 악천괴가 뭔가를 휙 던졌다.
구윤이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그것은 부적 두 장이었다.
“사비강 궁주가 만약을 대비해서 준 것일세. 우리 애들 것과 자네 것을 한 장 주더군. 어차피 고집 센 맹주야 줘도 안 할 테니까.”
“이게 뭡니까?”
“항마부(抗魔符)라더군. 무랑이라는 그 말코도사가 만든 것이니 효능은 제법 괜찮을 테지.”
“한데 왜 두 장씩이나….”
“허참, 저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자네를 지키는 저 암고양이는 생각도 안하는가? 뭐, 나는 그 말코도사의 잔재주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그런 게 없어도 충분히 강하거든.”
“하지만…!”
구윤이 다시 소리쳐 부르려는데, 이미 악천괴의 모습은 실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어금니를 꾹 다물고 두 장의 부적을 바라보았다.
“령아.”
“네, 군사님.”
“네가 모두 가지고 있어라.”
“하지만 한 장은 군사님이….”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맹주님을 뵈러 다녀와야겠구나.”
“네.”
이내 비령의 모습이 스르르 지워졌다.
**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능운파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는가?
앞으로는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
그간 이 손을 통해서 이루어진 많은 사건들이 떠올랐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능운파가 길게 숨을 뱉어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내일이다.
내일 정오.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내일 일어날 그 일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것이리라.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가?
손이 묻는 듯하다.
정말로 이대로 지금까지 사용하던 검을 놓고 다른 검을 잡아도 괜찮은가?
다시 묻는다.
대답을 하지 않자, 격분이라도 한 듯 두 손이 격하게 떨려 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두 손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
마치 주인의 명령에 반항하는 듯.
“크이이익!”
능운파가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신음을 내질렀다.
덜덜덜덜…!
이제 그 떨림이 너무 심해서 침상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손이 능운파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뜯어내겠다는 듯.
그의 전신에서 핏대가 불거져 나왔다.
“흐아아아압!”
파하앙!
순간 사방으로 기풍이 불어 나가면서 막사 안에 설치된 각종 잡기가 부서지고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도 툭 끊어지면서 침상 한쪽에 떨어졌다.
“훅, 훅, 후욱…!”
능운파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제 더 이상 손은 떨리지 않았다.
두 손은 반항하기를 포기한 듯 힘이 빠진 채 축 늘어진 모습이다.
갑자기 설움이 차올랐다.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 왔다.
도대체 자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천무.”
능운파가 묵직한 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천무를 곁에 두지 않은지 꽤 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래, 소환지 토벌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다.
그날 본단으로 복귀하자마자 천무부터 내쳤다.
천무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자다.
정말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만 나타난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소환지에서 자신이 욱청풍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해서 자금을 넉넉하게 쥐어 주고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죽였구나….”
능운파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슨 짓을…!’
이자준을 시켜 천무를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와 그의 가족을 남김없이 처리하도록 했다.
이자준은 명령에 충실했다.
천무는 물론, 그의 가족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정면승부였다면 아무리 이자준이었어도 천무를 이기긴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이자준은 불시에 기습했다.
평생 맹주를 위해 헌신한 호신위를 그렇게 제거했다.
도대체 왜!
능운파는 침상 한쪽에 떨어져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사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 모든 것이 저것 때문이다.
저 기물 때문에…!
저것 때문에 천무와 그 가족을 죽였고, 욱청풍 회주마저 죽였다.
‘저것을 없애야겠다.’
마음을 굳힌 능운파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맹주님, 구윤입니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
능운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베개로 목걸이를 슬며시 덮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잠시 후 구윤이 들어섰다.
그는 놀란 눈으로 막사 안을 훑어보았다.
“이게 대체…?”
“별일 아닐세. 앉을 자리가 없으니 밖으로 나가세.”
능운파가 다소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