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4
귀환 마교관
544화
실내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해 버렸다.
사비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자르 역시 미간에 힘을 주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추량 역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자르는 지금 이 자리를 반역 모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적어도 의식 세계가 붕괴될 만큼 위화감을 느끼는 상황은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략의 장단에 맞춰 줄 수밖에.
차앙!
추량이 검을 뽑아 들고는 앞으로 나섰다.
“입을 조심해야지. 공작님께 떠든다는 표현을 쓰는 건 무례가 아닌가?”
상황이 뜻밖으로 흐르자 아라니우스의 모습을 한 매설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가정을 말한 것일세.”
그러자 나자르가 버럭 소리쳤다.
“폐하를 능멸하는 말을 꺼내고도 ‘가정’이라는 말 한 마디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지요. 대체 공작께서는 슈비츠와 무슨 작당을 하신 겁니까?”
“작당이라니! 주군은 오늘 아라니우스 공작님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입니다!”
헬무트가 발끈해서 나서자, 나자르가 다시 소리쳤다.
“닥쳐라!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진정하게.”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공작께서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겁니까?”
매설란은 난감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은 여전히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아라니우스와 나자르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경고하지요. 지금 당장 검을 거두지 않는다면, 두 분은 흉기를 들고 내 방에 침입한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나자르가 미간을 찡그리고는 사비강과 아라니우스를 번갈아보았다.
그로서는 쉽사리 검을 거두기 어려운 상황.
만약 아라니우스와 사비강이 작당을 한 것이라면, 자신이 검을 거두자마자 이들의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매설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일렀다.
“검을 거두게.”
추량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자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검을 뽑아 들고 있으니, 헬무트 역시 날카로운 기세로 그를 압박했다.
사비강이 아라니우스를 보며 말했다.
“돌아가시지요.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습니다. 뭐 때문에 두 분이 날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딴 것도 함정이라고 판 거라면 실망스럽군요.”
사비강은 아라니우스와 나자르가 작당을 했다고 생각한 것.
나자르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누가 할 소리인 줄 모르겠군.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자초지종을 알아야겠으니까.”
“작정을 하고 오셨나 보군.”
사비강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싸늘하게 굳었다.
동시에 전신에서 은근한 투기가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매설란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는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
딸랑딸랑! 딸랑딸랑…!
다시 한 번 천둥 같은 종소리가 울렸다.
결국 매설란은 이쯤에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이제 그만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자네는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야. 아직 기회는 있어. 마족을 막아낼 수 있는 기회가. 기억해. 당신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당신이 세웠던 멸마궁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던 나….”
“미쳤군! 아라니우스 공작, 당신을 반역 모의로 즉결심판 하겠소!”
쉬이이이익!
나자르의 검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추량이 반사적으로 나서며 검을 들어 막았다.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총관님!”
추량이 다급하게 외치자, 매설란이 그대로 사비강에게 뛰어들었다.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달려드는 아라니우스를 보았다.
때마침 헬무트가 반사적으로 나서며 검을 내질렀다.
어디까지나 사비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찰나지간,
“잠깐…!”
하지만 헬무트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푸욱!
“총관님!”
추량이 비명처럼 외쳤다.
헬무트의 검이 아라니우스의 옆구리를 깊이 관통했다.
동시에 아라니우스의 입술이 사비강의 입술을 덮쳤다.
지금 이 순간.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숨도 멈춘 채 아라니우스와 사비강을 보았다.
나자르는 아예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고, 헬무트는 똥이라도 밟은 것 같은 표정으로 둘을 보았다.
늙은 아라니우스가 사비강에게 입을 맞추다니!
쿠구구구구구… 꾸웅!
그 순간 천지가 격동했다.
위화감이 한계치를 넘어선 것.
쩌저저적…!
쿠구웅…!
바닥에 균열이 생기면서 갈라지기 시작했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부서져 내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식 세계의 붕괴.
추량이 다급하게 외쳤다.
“사부님! 제발 깨어나십시오!”
그때였다.
추량의 품에 있던 반묘가 갑자기 튀어 나오더니,
- 크르러렁!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시간이 완전히 정지했다.
균열이 가면서 무너지던 바닥도 멈추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던 돌덩이도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였다.
나자르 역시 놀란 표정 그대로였다.
오로지 움직이는 것은 사비강과 매설란, 추량과 헬무트였다.
입맞춤을 끝낸 매설란이 사비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발… 기억해 줘. 당신이 필요해.”
진심이 통한 것일까?
차디찬 사비강의 표정이 천천히 녹아드는 듯했다.
마침내 사비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런 모습을 해도 매력적이군.”
그제야 매설란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의식을 잃어 갔다.
곧이어 균열이 간 바닥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모든 이들을 삼켰다.
**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백부장 고르모스가 참모 지크에게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조금 전 그들에게 걸려 있던 콤펠로가 시간 경과로 해제됐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후퇴 명령과 이후 아무런 조치가 없는 현상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흐음.”
지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만치 보이는 일성검문을 보았다.
분명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어떻게 된 겁니까? 단장님.’
한참이 흐른 후, 결국 지크가 고르모스를 돌아보며 명했다.
“천천히 전진 배치한다.”
“알겠습니다.”
헬무트 기사단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차 하면 일성검문으로 쳐들어가서 남은 인간들을 남김없이 휩쓸어 버릴 작정이었다.
다만, 지금은 단장인 헬무트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일성검문과의 거리는 불과 이 리 남짓.
명령만 내리면 한달음에 달려가 혈풍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더는 기다릴 필요 없겠습니다.”
고르모스의 말에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헬무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콤펠로 이후 헬무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이상했다.
‘단장님이 한낱 인간에게 당하실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결국 그가 명령을 내렸다.
“한꺼번에 친다. 단숨에 인간들을 쓸어버리도록 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다음 순간 백부장들이 돌아서서 소리쳤다.
“지금부터 인간은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도록…!”
소리치던 백부장들이 흠칫거리고는 돌아섰다.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등 뒤에서 찌를 듯이 날아든 탓이다.
“저자는…?”
지크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바로 사비강이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텐데. 왜 도둑고양이 새끼 마냥 살금살금 다가오는 거지?”
별로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닌데, 마족 기사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박혀들었다.
지크가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헬무트 단장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지만 사비강의 입에서는 엉뚱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꿇어라. 그리고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지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겼다.
다음으로 든 생각은 ‘저 인간은 미치광이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미치광이가 저렇듯 하늘에 떠서 고강한 무위를 자랑하진 못하리라.
보다 못한 고르모스가 불쑥 나서며 버럭 소리쳤다.
“야, 이 미친 인간아! 헬무트 단장님을…!”
“그는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내게 무릎을 꿇어라.”
“뭐… 뭣이?”
지크와 고르모스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다른 기사들 역시 웅성거리며 떠들어댔다.
그때,
팟!
사비강 곁으로 헬무트가 나타났다.
“단장님!”
지크를 비롯한 기사들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한데 헬무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잘 들어라. 나는 이 분을 따르기로 했다. 너희들도 나와 뜻을 함께 하겠다면 이 분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내용.
도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물론 중원에는 별 괴이한 사술이 다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계의 사술만큼이나 강하랴.
한낱 인간의 사술에 당할 마족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헬무트는 지크가 가장 존경하는 자였다.
지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장님…? 대체 무슨 말씀을…?”
“강요는 하지 않겠다. 다만, 내 뜻을 너희들에게 알릴 필요는 있기에 말했을 뿐이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르모스가 버럭 소리치며 나섰다.
“이런 제길!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단장!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너!”
고르모스가 날카로운 도끼를 들어 사비강을 가리켰다.
사비강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고르모스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도대체 단장님께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고약한 사술을 가지고 우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라!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마족을 휘하에 거느리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지껄이고 내 도끼 맛이나 보아라!”
찰나,
쒜에에에에엑!
고르모스가 던진 도끼가 무서운 속도로 사비강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탁!
고르모스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맨손…으로?”
괴력 하나 만큼은 자신 있는 고르모스였다.
한데 사비강은 자신이 던진 도끼를 맨손으로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사비강이 피식 웃더니 도끼를 던졌다 받길 반복하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너희들은 말로 해선 들을 녀석들이 아니지. 오로지 강한 힘과 공포로 찍어 눌러야만 들어 처먹는 족속들이지.”
“이런 건방진…! 그래서 네놈이 힘으로 우릴 찍어 누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어떤가? 내가 너희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면 내게 충성하겠나?”
지크와 고르모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지크가 확인을 하겠다는 듯 사비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 혼자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그래.”
“단신으로?”
“그렇다니까.”
이번에는 고르모스가 버럭 소리쳤다.
“천 명의 마족을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그렇다.”
다시 지크와 고르모스가 서로를 보았다.
‘저건 진짜 미친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