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43화 (543/670)

# 543

귀환 마교관

543화

실내 분위기는 그야말로 오묘했다.

사비강은 시종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편으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묵묵히 선 헬무트.

그는 여차하면 살풀이라도 하겠다는 듯 마력을 날카롭게 다듬은 채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사비강이 ‘슈비츠’라는 이름으로 백작 작위를 받아 지낸지 십 년.

그 기간 동안 헬무트는 사비강의 완전한 심복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인간이었을지라도 어쨌거나 마족인 그였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인간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점차적으로 사비강에게 매료되어 갔다.

아니, 어쩌면 사비강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종족에 매료된 것인지도 몰랐다.

끝없이 노력하는 사비강을 볼 때마다 그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비웃었다.

인간의 한계가 워낙 분명하기에.

게다가 마족에게는 하루살이만큼이나 짧은 수명이 아닌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노력을 한들 얼마나 발전할 수 있겠나?

하지만 사비강은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놀라웠다.

하루하루 강해지는 사비강을 볼 때마다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마족 전체가 인간을 얕잡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그는 사비강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사비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인간이 한계를 깨며 강해질 방법은 딱 두 가지다.”

“그게 뭡니까?”

“하나는 자기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다른 하나는 뭡니까?”

“강하다는 걸 알아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주군은 후자군요.”

사비강은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자다.”

“주군은 충분히 강하십니다.”

“강하다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거지. 너에게는 내가 강할지라도 마왕이 보기엔 아직 약한 인간일 뿐이지.”

헬무트는 본능적으로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라도 들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기에.

사비강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진정으로 강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하는 법. 나보다 강한 자는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그 경지다. 상대적인 강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강함! 그전엔 약한 거다. 이건 겸손도 아니고 지극히 사실일 뿐이지.”

당시 헬무트는 사비강의 말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숙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본디 인간은 유혹에 약하다.

그러니 조금만 강해져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다.

특히 자신을 무시했던 자들을 다시 만나 강함을 과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고점을 찍고 추락하는 인간이 어디 한둘이던가?

한데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비강은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익힌 모든 무공은 결코 짧은 시간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무공들이 탄생하기까지 인류의 역사가 유산처럼 담겨 있다. 그게 인간의 무서운 점이지. 대물림되는 지식. 마족은 그걸 무시하는 한, 언젠간 인간에게 당할 수 있어.”

헬무트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내심 기대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길.

자신의 운명과 가치관을 두고 제멋대로 장난질을 했던 마족들이 보기 좋게 패망하는 그날이 오길.

헬무트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사비강을 찾아온 세 사람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한 명은 아라니우스.

결코 사비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다.

전투력이 강한 자는 아니지만, 정치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심복인 자베린.

평소라면 몸을 숨기고 있겠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라니우스 뒤에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아라니우스 옆에는 뜻밖에도 나자르 후작이 앉아 있었다.

평소 아라니우스 공작과 나자르 후작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한데 이렇게 나란히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

예고 없는 뜻밖의 사건은 항시 경계해야 하는 법.

때문에 헬무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마력을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다.

한편 아라니우스 공작의 모습을 한 매설란은 눈앞의 사비강을 보고는 괜히 마음이 울컥거렸다.

‘당신… 이렇게 살았구나.’

아직 마계에서 사비강의 삶에 대해 다 본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지극히 일부만 확인한 셈.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온 이후로 줄곧 마계 특유의 기운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비강이 마계에 대해 느낀 감정들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이곳은 진짜 마계가 아니라, 사비강의 의식 세계였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백작의 작위까지 받아 이렇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대견하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이가 든 사비강의 모습.

여전히 강렬한 인상에 반듯한 외모였지만, 세월의 흔적이 스며 있었다.

게다가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얼굴.

‘그래, 저런 얼굴이었지.’

매설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가끔씩 사비강은 혼자 있을 때, 무척이나 냉혹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닌.

그저 습관처럼 배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가끔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그런 표정을 지었기에 내심 섭섭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이해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감정이 메말라 갔을까?

게다가 사비강의 얼굴에는 보이지 않던 상처가 여럿 있었다.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검상은 소름끼치도록 선명했고, 목과 쇄골 등에도 끔찍한 흉터가 수두룩했다.

언젠가 사비강이 마계에서 수많은 암살 위협을 받았다고 말해 주었을 땐 그 이야기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한데 지금 이렇게 그 상처를 마주하고 보니 가슴이 시리도록 그 고난이 와 닿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사비강을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잘 버텨 주었다고.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 무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명심하게. 다짜고짜 사 궁주에게 ‘이곳은 의식세계니까 그만 깨어나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네.”

“왜죠?”

“사 궁주는 지금 그 세계가 명백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생각해 보게. 어느 날 자네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여긴 가짜 현실이니 그만 깨어나라고 하면 뭐라고 할 텐가?”

“아….”

“아마도 그자를 미친 사람 취급할 테지.”

“그럼 어떻게 각성시키죠?”

“정해진 답은 없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각성시켜야 해. 그게 통하지 않으면 자네들은 감옥에 끌려가거나 오히려 사 궁주에게 죽을 수도 있겠지.”

무랑의 대화를 되새긴 매설란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쉽지 않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나자르 후작이 있다.

그가 위화감을 크게 느껴서 이 세계가 붕괴된다면…?

그와 동시에 사비강이 정신을 차려 준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사비강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은 채, 나자르의 위화감만 부추긴다면?

그럼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다.

때마침 사비강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말투.

그 말투가 다시 한 번 매설란의 가슴을 울컥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긴히 상의할 내용이 있네.”

“무슨 내용입니까?”

사비강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대응했다.

한편 나자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어려운 구간이다.

나자르의 호기심을 계속해서 자극하면서도 사비강을 각성시키는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자르는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지만, 이제부터는 가장 성가신 방해꾼인 셈이다.

‘당신, 떠올려 줘.’

매설란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슈비츠, 자네는 마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오래된 이야기네만, 만약 우리가 중원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사비강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아라니우스를 보았다.

그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아라니우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뒤에 선 헬무트도 마찬가지.

뿐만 아니라, 나자르 역시 도대체 아라니우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뭔가 위험하다는 느낌만 가질 뿐.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위험한 것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번엔 나자르가 나섰다.

“대체 요지가 뭡니까? 이미 지나간 중원 정벌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겁니까?”

“자네는 일단 듣고만 있도록 하게. 나와 슈비츠 공이 먼저 나눌 대화일세.”

“뭐, 그러시지요.”

나자르가 조금은 탐탁찮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한편 사비강은 굳은 표정으로 아라니우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날 시험하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닐세. 그냥 가정을 하는 것일세.”

“왜 그런 가정을 해야 하는 겁니까?”

“흐음. 생각해 보게. 만약 그 당시 헬무트 경이 중원을 치는데, 자네가 귀양이라는 곳에서 막았더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사비강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드러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편 매설란과 추량은 애간장이 녹았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나자르 역시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매설란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잘 생각해 보게. 만약 자네가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멸마궁이라는 걸 세우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 것 같은가?”

매설란은 부디 기억해 달라는 듯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사비강의 차디찬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

“하다하다 이젠 이런 식으로 날 시험하는 겁니까?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오시다니. 별 일도 다 있군요.”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그때였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갑자기 엄청나게 큰 종소리가 천지를 격동시킬 만큼 크게 울리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매설란과 추량은 화들짝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깨달았다.

‘각성종이구나!’

아마도 현실에 있는 무랑이 각성종을 흔든 것이리라.

무슨 일이 생겼거나, 생기기 직전이리라.

이곳이 의식 세계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 종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윽… 고막이 나갈 것만 같군.’

추량은 하마터면 두 손을 들어 올려 귀를 틀어막을 뻔했다.

반면 두 사람을 제외한 사비강과 헬무트 그리고 나자르는 각성종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아라니우스와 자베린을 보면서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를 던질 뿐이었다.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끄음. 그건 아니네만….”

매설란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분명 현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서둘러야 해!’

매설란이 마음을 굳게 먹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기 때문이네. 자네라면 충분히 마왕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말일세.”

순간 사비강의 표정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동시에 나자르의 표정도 단박에 일그러졌다.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나자르가 나섰다.

“대체 공작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반역 모의라도 하시는 겁니까?”

딸랑딸랑! 딸랑딸랑…!

‘이렇게 된 이상 더 세게 나갈 수밖에!’

매설란이 작정한 듯 말했다.

“사비강. 자네는 내 말을 알아들을 거라 믿네. 자네는 멸마궁을 세우고 많은 궁도들을 이끌어 우리에게 맞섰겠지. 그리고 정사를 통합하여 강호인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을 테지. 게다가 베르타스 역시 자네가 다루면서….”

쾅!

결국 참다못한 나자르가 벌떡 일어나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도대체 무슨 망발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폐하의 검까지 들먹이다니! 지금 공작께선 반역 모의를 하는 것이오?”

그러자 헬무트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살기를 드러냈다.

차아앙!

“모의라니. 가당치도 않는 소리! 일방적으로 떠든 건 아라니우스 공작인 걸 보시지 않았습니까?”

서로에 대한 적의가 폭발하는 순간.

사비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니우스와 나자르를 착 가라앉은 눈으로 훑어보았다.

“두 분,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나를 건드리는 건 실수하는 겁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상황을 지켜보던 추량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젠장,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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