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2
귀환 마교관
542화
“대회에서는 악신의 권능을 쓰면 안 된다니. 제가 그런 규칙이 있는 줄 알았겠습니까? 쳇! 게다가 전 그게 악신의 권능인지 뭔지도 모르고 사용한 건데.”
추량이 아라니우스의 모습을 한 매설란의 뒤를 따라가며 연신 구시렁거렸다.
매설란이 뒤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아쉬워할 것 없어요. 오히려 잘 된 거죠. 괜히 대회에서 승승장구해 봐야 시간만 끌 텐데. 그렇다고 그 대회에서 죽으면 곤란하고.”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추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수긍했다.
정말이지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다.
축제 중에 펼쳐지는 무투대회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경기였다.
승자결 방식으로 이어지는 대회였는데, 패자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는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목숨을 유지하면서 중도하차할 방법은 규칙을 어겨서 실격을 당하는 것이 유일했다.
한데 추량은 본의 아니게 규칙을 어기면서 실격패를 한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대회에서 빨리 하차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얼떨결에 성공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흑성의 곳곳을 살피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필 축제 기간이어서 마족들이 무척 많았다.
“이래서야 사부님이 어디에 계신지 찾기도 힘들겠습니다.”
추량이 투덜거리면서 말하자, 매설란이 주위를 살피며 답했다.
“그 대신 우리가 눈에 덜 띄겠죠. 오히려 이 성이 조용했다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고스란히 노출되었을 테니까.”
“그렇네요. 일장일단이 있군요.”
“지금은 최대한 빨리 사 궁주님의 거처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매설란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추량을 돌아보았다.
“그 악신의 권능은 어떻게 사용한 거죠?”
“그게 실은… 요 녀석 덕분인 것 같습니다.”
추량의 품에서 반묘가 불쑥 올라왔다.
- 니야앙.
가냘픈 울음을 터뜨린 반묘가 길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품속으로 들어갔다.
매설란이 놀라서 물었다.
“반묘는 함께 오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녀석의 마력이 강해서 같이 넘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어요.”
“흠. 어쨌든 지금은 궁주님 거처를 찾는 것에 집중하죠. 이렇게 넓은 성을 무작정 뒤지고 다니는 것도 비효율적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거처는 어떻게 찾죠?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당연한 말이었다.
아라니우스가 사비강의 거처를 모른다는 건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을 테니까.
매설란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알아내 봐야죠.”
그때였다.
마침 맞은편에서 누군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이게 누구십니까? 아라니우스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매설란이 돌아보니 기다란 은발을 어깨까지 기른 사내가 어딘지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매설란은 본능적으로 그가 아라니우스에게 호의를 가진 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설명하기 애매한 적의가 느껴졌기에.
그건 어디까지나 여자로서 가지는 직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은발의 사내는 나자르 후작이었는데, 평소 아라니우스와 관계가 썩 좋지 않은 자였다.
‘누군지 모르니 말도 걸기 힘드네.’
아라니우스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나자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이었다.
“자베린의 결투는 잘 보았습니다. 과연 대단한 수하를 두셨더군요.”
매설란은 상대가 진심으로 칭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대단한 수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말투에서 비아냥거림이 여실히 느껴졌기에.
이쯤 되자 추량 역시 대략의 관계를 눈치 채고는 굳은 표정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렇게 일렀는데도 그 성질을 못 죽이더군.”
아라니우스의 모습을 한 매설란이 딱딱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긴장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만약 말투가 어딘지 이상하거나, 평소 아라니우스가 상대에게 존대를 했다면 위화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기에.
다행히 나자르는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말을 받았다.
“요즘 아랫것들이 좀 설치긴 하지요. 그런데 그 아랫것들을 잘 다스리는 것도 능력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라니우스 공작님은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날뛰는 야생마를 길들이시려고 하시니….”
이쯤 되자 추량이 한 걸음 나섰다.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
짜아악!
순간 추량의 뺨이 휙 돌아갔다.
정말이지 너무 세게 얻어맞아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그의 뺨을 후려친 자는 다름 아닌 아라니우스 즉, 매설란이었다.
추량은 지금 자베린의 모습을 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멍한 표정으로 아라니우스를 돌아보았다.
아라니우스의 모습을 한 매설란이 잔뜩 심기 불편한 표정이 되어서 차갑게 일렀다.
“닥쳐라. 네놈은 성질 하나 죽이지 못해 그런 실수를 저질러 놓고 무얼 잘했다고 또 나서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추량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나자르 역시 아라니우스가 강하게 나오자, 조금은 눈치를 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뭐, 그렇게 엄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적어도 큰일을 해낼 마족이라면 그 정도 성질은 가지고 있어야죠.”
“그래서 자네는 그 정도 성질을 가지고 있나?”
매설란이 나자르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나자르 역시 아라니우스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공격할 줄은 몰랐는지, 표정을 슬쩍 굳히고는 대답했다.
“저도 한 성질 하지요.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다스리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래야겠지. 성질머리 잘못 부려서 실격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게 좋을 테니까. 그나마 무대 위에서라면 다행이지만, 삶에서는 영원히 실격당할 수도 있지 않겠나?”
마치 자베린을 두고 하는 말 같았지만, 속내에서는 상대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들어 있었다.
나자르가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진심어린 충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요. 그나저나 어딜 급히 가시는 겁니까? 축제를 더 즐기시지 않고.”
“사비강을 찾아가는 길이네.”
“사비강…?”
나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매설란과 추량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나자르의 반응을 살폈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도 사비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
눈살을 찌푸리던 나자르가 ‘아’ 하며 말을 이었다.
“슈비츠 백작 말씀이시군요. 누군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한데 왜 그를 사비강이라고 부르십니까? 새로운 이름을 받은 지가 벌써 십 년도 넘었는데?”
매설란이 당혹감을 감추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한낱 인간을 마족처럼 대하고 싶진 않네. 그 미천한 인간은 과거의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어울리지.”
“흐음. 역시 그렇군요. 하긴 인간 주제에 너무 크긴 했지요. 한데 그 인간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신 분이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우습군요.”
매설란은 내심 당황했다.
‘아라니우스가 그런 주장을 했다니 의외네.’
매설란은 최대한 반응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때그때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그렇군요. 그래서 지금은 무슨 상황으로 슈비츠 백작을 찾아가시는 겁니까?”
매설란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인 볼일일세. 내가 자네에게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나?”
“아, 제가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네.”
“그러시지요. 그런데….”
“또 뭔가?”
발걸음을 옮기던 매설란이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사비강의 거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길 바랐는데, 쓸데없이 심력만 소모한 대화가 되고 말았다.
나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물었다.
“슈비츠 백작은 이번 축제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꽤나 먼 곳까지 가시게 생겼군요.”
“먼 곳…?”
매설란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뮤란까지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매설란은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뮤란이라니. 거긴 어디지?’
이제 겨우 사비강의 거처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데 지명을 모르니 여전히 막막했다.
순간 그녀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해서 말인데 텔레포트 스크롤 가진 것 있나?”
“갑자기 그건 왜 찾으시는지…?”
“당연히 사비강에게 가기 위해서네.”
‘어쨌든 이런 도구는 받아 둬서 나쁠 건 없지. 급히 피할 상황이 생기면 써먹을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나자르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굳이 포탈 게이트를 놔두고 왜 스크롤을 찾으시는지…?”
나자르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차.’
매설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포탈 게이트라니.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마계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으니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한데 나자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이번에도 여자 특유의 직감이 발휘됐다.
‘이 자… 다른 걸로 날 의심하는 모양이구나.’
그랬다.
나자르는 아라니우스가 사비강과 만나서 모종의 작당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탈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서 이동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은밀히 사비강의 방으로 이동하겠다는 뜻이니까 여러모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매설란은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포탈 게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모르고, 스크롤이 있어도 그이에게 갈 방법이 없으니 이 자를 최대한 이용해야겠어!’
결단을 내린 매설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군.”
“천성입니다.”
“좋은 자세야. 그럼 이렇게 하지.”
“어떻게 말입니까?”
나자르가 아라니우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뭐라도 이상한 점이 걸리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읽혔다.
“실은 내가 사비강을 만나서 긴히 논할 이야기가 있었네. 한데 이왕 이리 된 것 자네도 함께 가는 건 어떤가?”
“흐음.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나는군요.”
나자르가 짐짓 경계하듯 말하자, 매설란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일세. 내 장담하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라… 궁금하긴 하군요.”
“어떤가? 그 왕성한 호기심을 한 번 충족시켜 보겠나?”
나자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라니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호기심을 채워 보지요.”
“잘 생각했네. 그럼 가도록 하지.”
나자르가 아라니우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자, 추량이 감탄한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완전히 아라니우스가 빙의한 줄 알았어요. 아, 그 반대인가? 아무튼 연기력에 감탄했어요. 뺨 맞을 땐 솔직히 서운했는데….”
“미안해요. 나도 순간적으로 반응을 한 것이라.”
“괜찮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저자가 안내까지 하게 만든 셈이니 일석이조가 됐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죠. 괜히 어설프게 행동하면 의심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어서 사부님을 뵙고 싶네요. 그나저나 사부님이 이곳에서 십 년 전에 작위를 받으셨다니…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 궁금해지는군요.”
매설란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 역시 궁금했다.
나이가 든 사비강의 모습이 어떨지.
그리고 그런 그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지.
‘괜찮은 거지? 당신이 많이 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곧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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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벌컥 열리면서 단리추가 들어섰다.
“도사님!”
“쉿! 조용히 하게!”
“아, 죄송합니다.”
단리추가 얼른 사과하자, 무랑이 술법에 빠져든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본 후 돌아서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마족 기사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단리추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랑이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답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그가 매설란과 추량을 돌아보았다.
‘무엇들 하는가? 시간이 없네. 어서 사비강을 각성시켜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