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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540화 (540/670)

# 540

귀환 마교관

540화

긴 융단 끝, 단상 위의 태좌에 앉은 타란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건가? 하운트가 배신자였다니. 전혀 짐작하지 못했군.”

그의 목소리에 장내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던 마족들이 저마다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수백 년간 흑성에 반역의 무리를 들여놓고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신하의 입장으로서 면목이 없었다.

특히 이번 작전에 깊이 개입하면서 하운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아라니우스는 연신 안절부절 못했다.

그의 표정에는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제길! 하운트가 놈들과 한통속이었을 줄이야!’

반역의 잔당도 제거하고, 헬무트와 사비강도 없애 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건만.

이제 잘못하다간 불똥이 자신에게도 튈 수 있는 상황 아닌가?

괜히 억울한 누명을 쓰기 전에 얼른 조치를 취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불쑥 꺼냈다.

“폐하, 사비강은 비록 인간이지만, 수백 년간 마계의 크나큰 근심인 반역 잔당들을 완전히 청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운트가 그들과 한통속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그를 잡아 죽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들에게 큰 상을 내리심이 어떠신지요?”

타란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니우스 공작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마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들 모두 자신들에게 혹여나 불똥이 떨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타란트는 하운트의 일에 대해 다른 자들까지 끌어들이진 않았다.

대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사비강, 자네는 나의 오랜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비록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자네의 능력은 마족들마저 경외할 수준이다. 특별히 자네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고자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사비강이 입매를 슬쩍 치켜 올리며 답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좋다. 혹시 바라는 것이 또 있는가?”

사비강이 타란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헬무트 단장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위험했을 겁니다. 헬무트 단장을 가신으로 삼고 싶습니다.”

마족들이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헬무트는 마족들 사이에서도 유독 사비강을 싫어했던 자가 아닌가?

무엇보다 헬무트 본인이 사비강의 제안을 강하게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허락하신다면 사비강 백작님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놀랍게도 타란트의 시선을 받은 헬무트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타란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다. 헬무트 경의 공을 인정하여, 헬무트 기사단을 다시 만들 수 있도록 해주겠다. 또한 사비강에게는 앞으로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북동쪽 뮤란 지역의 일부 영토를 하사한다.”

사비강과 헬무트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타란트는 흡족한 표정으로 사비강을 보았다.

“사비강, 그대에게도 이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군. 흐음. 슈비츠 폰 그렌탈. 오래 전 나의 벗이었지. 그 이름이 어떠한가?”

장내가 술렁거렸다.

슈비츠 폰 그렌탈은 오래 전 대공을 지낸 인물로, 마왕 타란트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다만 바리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마왕을 대신해 목숨을 잃었다.

한낱 인간에게 그 이름을 하사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마음에 와 닿는 이름입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 숙인 사비강의 표정이 어딘지 섬뜩한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

단리추는 부서진 정자 한쪽에 걸터앉아 가만히 검을 바라보았다.

피와 알 수 없는 진액으로 얼룩진 검.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검은 시린 빛을 은은하게 품고 있었다.

“쳇, 저 녀석들 꿈쩍도 안하는데… 무슨 사술이라도 걸린 것 같구먼. 지금이라도 가서 모조리 쓸어버리면 안 되나?”

양비웅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단리추가 입매를 슬쩍 비틀며 대꾸했다.

“아직 사 궁주께서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으니 좀 더 지켜봅시다.”

“사 궁주가 기다리라고 했으면 기다려야지.”

괴도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비강의 명성이 정사를 초월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결국 양비웅도 더는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사비강이 이곳에 왔다.

멸마궁주인 그가.

여길 어떻게 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데…

‘그 마족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단 말이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끝이 쭈뼛 서는 두려움도 일어났다.

그런 자가 만약 적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쪼록 저 녀석들이 다시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사 궁주가 뭐든 지시를 내려주면 좋겠군.”

“사 궁주님을 믿어 봅시다.”

단리추가 묵묵히 대꾸하고는 검을 정성스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검이 다시 제 빛깔을 되찾자 그는 수하 중 한 명을 시켜서 숫돌을 가져오게 한 다음 검을 갈기 시작했다.

일성검문의 검법은 대체로 발검을 특기로 한다.

단리추가 주로 사용하는 유성검법 또한 마찬가지다.

때문에 검을 잘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검의 관리 상태에 따라서 유성검법의 효능은 천지 차이다.

스르릉. 스르르릉.

비교적 고즈넉한 일성검문 안마당에서 검을 가는 소리만 부드럽게 울려 왔다.

그러자 일성검문 문도들이 하나둘 일어나 검을 갈기 시작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싸움을 대비하는 것.

단리추는 일일이 말로 하지 않고 직접 실천해서 모범을 보인 것이다.

문도들이 그렇게 검을 갈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다른 사파 무인들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를 시작했다.

**

한편, 그 시각.

폐관수련실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랑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는 사비강과 헬무트를 번갈아 보았다.

‘이것 참, 환장하겠군.’

무랑이 낭패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는 사비강에게 다가가 가만히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분명히 일각 전에도 이렇게 흔들었다.

의식을 깨우는 각성종(覺醒鐘).

하지만 지금처럼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약간 반응이 있었다.

눈꺼풀 안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건…

‘더 위험하군!’

정말이지 골치 아프게 됐다.

왜 처음부터 주의를 주지 않았을까?

뼈를 때릴 만큼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사비강은 깨어나지 않고 있다.

아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깨어나야 할 시간이 지났다.

사비강이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 세계에 완전히 젖어든 것이다.

즉, 의식 세계를 실제 그가 존재하는 세계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존야가 사비강에게 시전했던 방식과 거의 흡사하게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사비강은 과거 자신의 기억에 빙의된 것이다.

헬무트도 사비강에게 기억된 자신에게 빙의가 됐다.

문제는 사비강이 그 세계가 의식 세계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데….

‘전혀 인지를 못하고 있군. 허어, 큰일이로다.’

기억 속 자신에게 빙의하는 것은 이래서 위험하다.

그래서 존야조차도 기억 속 자신에게 빙의하지 않고, 사비강을 자신에게 빙의시킨 것이다.

무랑은 오랜만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족이 쳐들어오는 건 둘째 문제다.

당장 사비강이 위험하다.

물론, 헬무트도 위험하다.

둘은 의식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영원히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

의식 세계에 머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위험한 법이다.

그래서 의식을 깨우는 종을 흔들었는데….

‘소용이 없군!’

너무나 강하게 의식 세계에 빠져든 것이다.

아마도 마계에서의 모든 사건들이 사비강에게는 지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리라.

그러니 그 세계에 빠른 속도로 젖어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어, 이제 어쩐다?”

계속해서 종을 울릴 수도 없다.

자칫하다간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식 세계에서 느닷없이 울리는 종소리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면 그저 꿈이나 환청처럼 여겨진다.

이후에는 아예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제삼자가 사비강의 의식 세계로 들어가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사비강이 그 세계에 너무 젖어 있게 되면 제삼자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렇다면 문제는….

‘누굴 보내느냐는 것인데…!’

무랑이 전에 없이 초조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그는 뒷짐을 지기도 하고,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가만히 서서 발끝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누군가 본다면 이 다급한 시간에 너무 뜸을 들이는 게 아니냐며 따질 만도 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초조할 때일수록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단리추를 보내는 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의식 세계로 투입할 수 있겠지만, 사비강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의식 세계에 젖은 사비강은 현실 세계의 인물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단리추의 모습 그대로 보낼 수도 없다.

그를 의식 세계의 누군가에게 빙의시켜야 한다.

이왕이면 사비강에 대해 잘 알고, 마계가 익숙한 사람.

물론, 인간 중에서 마계가 익숙한 사람은 없을 터.

그렇다면 하다못해 마법과 마나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어야 한다.

누가 있을까?

두 사람이 떠오른다.

한 명은 사비강과 가장 가까운 매설란!

또 다른 한 명은 마나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다고 할 수 있는 추량!

‘둘 중 누굴 보내지?’

무랑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몸을 돌리고 사비강을 보았다.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 모두 보낸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들 모두 잃을 수 있겠지만….

“도통 일이 잘못되면 이 중원을 구할 수가 없네.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 없이는 이 중원에 희망이 없어. 그러니 내 결정을 이해해 주길 바라겠네.”

무랑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사비강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지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매설란과 추량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필요했다.

무랑은 사비강의 품을 뒤적여 두루 마리 한 뭉치를 꺼냈다.

총 다섯 개.

하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여분으로 챙기는 것이다.

“이러다가 얼마 남아나지도 않겠군.”

하지만 어쩌랴.

당장 사비강이 식물인간이 되게 생겼는데!

“내 후딱 다녀오겠네!”

말을 마친 무랑이 두루마리를 부욱 찢었다.

순간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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