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9
귀환 마교관
539화
따닥…! 딱…!
마른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면서 불꽃이 너풀너풀 날아올랐다.
헬무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불길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흑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사비강은 별로 말이 없었다.
헬무트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분위기는 패잔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적장의 머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아니, 하나는 적장의 머리.
다른 하나는 아군에 숨어 있던 간자의 머리다.
하지만 이끌고 갔던 병력은 모두 잃었다.
혹시 모른다.
자신들처럼 몇몇은 살아남아서 흑성으로 귀환하고 있을 지도.
어쨌거나 이번 전쟁으로 상처가 많이 남았다.
딱…!
마침 잔뜩 달궈진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면서 다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헬무트가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생각의 힘이라는 건가?”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군.”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가?”
“내가 살던 곳이라….”
사비강은 눈을 감고 중원을 떠올려 보았다.
한참 후 그가 다시 눈을 뜨며 대꾸했다.
“가고 싶다. 아니, 겪고 싶다. 그 거리를 걷고 싶고, 그 음식들을 먹고 싶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다.”
사비강의 두 눈빛은 어느새 그리움으로 젖어들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군.”
“이룰 수 없더라도… 가끔은 그게 날 버티게 해주지.”
“그것도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인 셈이군.”
“마족은 그리워하지 않는가?”
“전혀. 그리움이라는 감정? 감각? 어쨌든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모른다.”
“안 됐군.”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안 됐다니….
단언컨대 마족에게 안 됐다는 표현을 쓴 사람은 세계에서 사비강이 유일하리라.
하찮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마족은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존재일 테니까.
당장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수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한데 안 됐다니….
그야말로 하루살이가 인간을 딱하게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비강이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는 모닥불 안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그냥 버텼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땐 성찰하고 생각해야 하지만, 현재로 돌아오면 생각을 멈춘다. 그냥 하루하루 앞에 놓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다. 현실이 좆같을수록 감정을 비우고 오로지 앞에 놓인 길만 바라보는 거다. 당장 내딛는 이 한 걸음에 집중하면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에 집중하면서.”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부러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럼 뭐, 불꽃과 함께 거침없이 타올라야지.”
사비강이 히죽 웃었다.
따닥…! 딱!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불꽃이 다시 한 번 너풀너풀 날아올랐다.
**
여정의 마지막 날.
이제 야산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나면 다음날 흑성에 도착할 터였다.
사비강은 나무 기둥에 걸터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근처 개울가에서 목을 축이고 온 헬무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눈앞에 마족을 두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 몇 없으리라.
아니, 어쩌면 사비강이 유일하리라.
헬무트가 다소 어정쩡하게 서 있자, 사비강이 눈을 감은 채 툭 던지듯 말했다.
“할 말 있음 해.”
‘귀신같은 놈….’
헬무트는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먼 산을 보듯 말했다.
“그저… 생각이 나서 말이지.”
“무슨 생각?”
“내가 언제 마족이 되었는지.”
“그래서?”
“네 말이 맞더군. 내가 왕국과 백성들을 통째로 넘기기로 한 순간, 어떤 힘이 내게 생겼다. 그리고 내 가슴과 배에 이런 문양들이 나타났지.”
헬무트가 옷자락을 들어보였다.
탄탄한 가슴과 배에는 원형에 갇혀 있는 역오망성이 그려져 있었는데, 각각의 빈틈마다 같은 문양이 하나씩 총 다섯 개가 더 그려져 있었다.
“나를 가호하는 악신은 폭력과 울분의 악신이다. 작위를 받지 않은 기사 중 유일하게 악신의 가호를 받고 있지.”
“칭찬해 주길 바라는 건가?”
“흥! 그딴 말을 해달라는 게 아니다. 단지….”
생각이 났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생각이 난 걸까?
모르겠다.
이상하게 사비강과 함께 있다 보니 별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인간과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인간의 습성이 다시 나오려는 것인가?
어쨌거나 이번에 그가 다시 떠올린 것은 마족이 되던 정확한 시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족이 될 때는 스스로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마족으로 임명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 건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마왕이 자신을 마족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여겼는데….
‘스스로 된 것이다.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만약 자신에게 그날의 일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된다면?
그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왜 마족이 되지 않았지?”
헬무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요즘 사비강과 오래 있다 보니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수다쟁이가 된 건지.
사비강이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싫어서.”
“하지만 마족이 되면 강해질 수 있을 텐데.”
“흐음.”
마침내 사비강이 눈을 떴다.
그가 헬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청 강한 구더기가 있다고 치자. 누군가 나에게 소중한 걸 바쳐서 엄청 강한 구더기가 되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거절할 거다.”
“뭐…?”
헬무트가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구더기라니….
왠지 모르게 단번에 이해됐지만….
‘젠장! 기분 나빠!’
그 비유대로 말하자면, 자신은 엄청 강한 구더기를 선택했다는 말이 아닌가?
왕국과 백성을 바쳐 가면서까지!
하지만 기분 나쁜 것도 잠시,
“풋! 하하하하하!”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순간, 헬무트의 마음에는 미묘한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하하하!”
헬무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
사비강이 눈을 떴을 때, 헬무트가 검을 뽑아든 채 앞에 서 있었다.
살기는 없었다.
헬무트가 사비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날 죽일 기회는 많았을 텐데.”
“네가 있어야 누구라도 내 말을 믿을 테니까. 아무래도 나 혼자 떠들어 봐야 설득력은 떨어질 테지.”
“그럼 왜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은 거지?”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널 믿은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단지… 반쪽짜리 마족인 너에게도 나 같은 인간이 있으면 편할 테니. 안 그런가? 그저 그 상황을 믿을 뿐이지.”
“과연… 똑똑하군.”
사비강이 검을 든 헬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지?”
질문을 던지면서도 사비강은 여차 하면 반격할 준비를 했다.
만에 하나 헬무트의 심경에 모종의 변화가 있어서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면, 즉각 대응해야 했다.
찰나,
휘이익!
헬무트가 움직였다!
사비강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데,
멈칫!
푹!
헬무트가 든 검이 땅바닥에 수직으로 깊숙이 꽂히는 게 아닌가?
사비강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헬무트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하운트의 수급이 든 보자기를 내밀었다.
“이제부터 너를 섬기겠다.”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지?”
“어차피 마족의 버림을 받은 몸. 나를 섬겼던 자들. 하지만 내가 버린 자들. 그들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널 섬겨 보려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사비강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헬무트가 고개를 들고는 마주보았다.
“마나 포메이션이라는 것을 아는가?”
“알지. 마족들 개개인이 가지는 체내 마나 분포도 같은 거지?”
“잘 알고 있군.”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포메이션.
마족들이 태어나면서 체질적으로 가진 체내 마나 분포도라고 볼 수 있다.
이건 오로지 본인만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도 마족이 된 후 고유의 마나 포메이션을 가지고 있다. 그걸 너에게 알려 주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안다.
완벽한 가신이 되겠다는 뜻.
자신의 모든 약점을 낱낱이 공개한다는 뜻이다.
주로 침소까지 지키게 하는 호위들이 자신의 주인에게 마나 포메이션을 알려 준다.
자신의 마나 포메이션을 알려 준다는 것은 한 마디로 목숨을 담보로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
사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헬무트를 보았다.
적어도 마나 포메이션을 알려 주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하나 묻자.”
“뭐지?”
“왜 나를 따르겠다는 거냐? 넌 인간을 경멸하지 않았던가? 사죄니 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 말고.”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역시 쉽지 않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래. 사실 지금도 인간을 경멸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마족에 대한 경멸이 더 클 뿐이야.”
“뭐, 그건 좀 더 솔직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날 따르겠다는 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어차피 마족들이 날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차라리 너와 힘을 합치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 내 위도 아니고?”
“너는 언젠간 이 마계를 뒤흔들 놈이니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올 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고. 어차피 너로서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
“흐음.”
사비강이 침음을 흘리는 사이, 헬무트가 보자기에 싸인 하운트의 수급을 내려놓았다.
“이 두 녀석들을 전부 네가 처리했다고 하면, 아마 너에게 꽤나 높은 작위가 내려질 거다. 수백 년간 흑성의 골칫거리였던 반역의 잔당을 소탕한 공로가 있으니까. 그럼 날 가신으로 삼아라.”
사비강은 묵묵부답이었다.
지금껏 마계에서 누군가를 믿은 적은 없었다.
흑성을 청소하는 인간조차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헬무트는 믿을 수 있을까?
그때 헬무트가 물었다.
“이번엔 내가 묻지.”
“뭐?”
“너의 이정표는 어딜 향하는 건가? 마왕인가?”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얽혔다.
마침내 사비강의 입이 떨어졌다.
“그래. 나는 여기서 지존이 되려고 한다.”
그야말로 광오한 대답.
하지만 헬무트에게는 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 대답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마계를 장악한 인간이라니!
물론 쉽지 않을 거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사비강이 늙어서 자연사를 할 때까지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이 봐 온 사비강은 기적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의미 없는 질문이 나왔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질문.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 보다.
사비강이 피식 웃더니 깊어진 눈동자로 대답했다.
“그럼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서라도 성공해야지.”
헬무트의 마음이 격동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나를 너의 검으로 삼아다오!”
“미리 말하지만, 난 누구도 믿지 않아. 설령 네가 마나 포메이션을 알려 준다고 해도.”
헬무트의 표정에 쓴 웃음이 스며들었다.
“상관없다. 이미 익숙하니까.”
“좋아, 그럼 받아들이지.”
백성을 버린 왕세자가, 한낱 무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