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7
귀환 마교관
537화
퍽!
쿠당탕탕!
둔탁한 충격과 함께 헬무트가 개울가에 나동그라졌다.
개울물이 그의 하반신을 적시면서 붉은 핏물이 번져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무트가 이를 빠득 갈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 건방진 새끼가…!”
헬무트가 사비강에게 달려드는 순간,
스스슷.
사비강이 미끄러지듯 보법을 밟으며 피했다.
휘청거린 헬무트의 뒤로 다가간 사비강이 다시 한 번 발길질을 가했다.
퍼억!
슈우우우욱! 꽈다앙!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부러지면서 헬무트와 함께 나뒹굴었다.
헬무트가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다가 곧 철퍼덕 드러눕고 말았다.
사비강이 저벅저벅 다가와서는 헬무트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라.”
“너 이 새끼… 어디서 반말을….”
“너나 나나 지금은 저 잘난 마족들에게 쫓기는 상황이 아닌가? 아직도 네놈은 마족이니 뭐니 지랄하면서 허세에 찌들어 있고 싶은가?”
“닥쳐라.”
헬무트가 입안에 고인 피를 탁 뱉어내고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갈증을 느낀 그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사비강을 지나쳐 개울가로 갔다.
흐르는 물에 코를 처박고 거침없이 물을 마시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개울은 헬무트의 얼굴을 담담히 비추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회색빛 눈동자.
문득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인간에게 버림받으면서 그 분노를 원천으로 삼아 마족이 되었다.
한데 이젠 마족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지긋지긋하군.’
소왕국의 왕자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이용되기만 하지 않았나?
혼세의 절벽에서 기적처럼 살아서 도망쳤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실컷 쉬었으면 이제 이동하지.”
사비강이 불쑥 말을 건네 왔다.
헬무트가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고는 있는 거냐? 얼마나 최악인지 말이야.”
“당연히. 그래도 하나는 분명해.”
“뭐냐?”
“내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는 것. 이 정도는 최악의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헬무트가 한참 후에야 쓴 웃음을 그렸다.
“오냐, 도대체 얼마나 더 추락해야 네놈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지 지켜보마.”
**
밤이 깊었다.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길고 긴 하루였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헬무트 기사단원들 중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어쩌면 자신을 제외하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운트…!’
다시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다.
그놈이 배신자라는 사실은 아라니우스도 모를 터.
하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아라니우스 역시 자신의 존재를 탐탁찮게 여겼다는 것 아닌가?
꽈드드득…!
어금니를 갈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운트를 찾아가 그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그때,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있던 헬무트는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면서 바짝 긴장했다.
회색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수풀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차하면 튀어 나가면서 일격에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작정이다.
한데 수풀을 헤집으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헬무트가 다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사냥을 하러 가겠다던 사비강이 금세 야쿤 한 마리를 잡아 온 것이다.
야쿤은 마계에서 노루와 비슷한 짐승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파충류처럼 껍질이 단단하다는 게 특징이다.
“정말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이 와중에도 먹을 것을 찾다니.”
“먹어야지. 먹어야 힘을 쓰고, 힘을 써야 살 수 있을 테니.”
“그렇게까지 살아서 뭘 하려고 그러나?”
“온전하게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기회가 올 테니까.”
사비강의 시선을 마주한 헬무트는 순간 움찔거렸다.
사비강의 눈빛이 너무나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기에.
도대체 저런 의지력은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단지 인간의 무모함인가?
마족이 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저런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조용히 야쿤을 손질하는 사비강을 보면서 헬무트가 입을 열었다.
“너는 모른다.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경험을 겪었는지. 내가 왜 마족이 되었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도대체 저런 거침없는 행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족과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련만.
이젠 사비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같은 처지가 아닌가?
마족에게 쫓기는 인간과 반쪽짜리 마족.
그는 사비강이 듣든 말든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자신이 어떻게 마족이 되었는지.
원래 어떤 인간이었는지.
워낙 오래전의 이야기인지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마족이 되면서 사사로운 감정은 이미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마족이 되었다.”
“그랬군.”
사비강은 무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정말이지 저런 모습을 보면 누가 마족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헬무트가 실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마족이 되어서 힘을 얻었다. 하지만 너는… 무슨 힘으로 이렇게 버티는 거지?”
사비강은 대답 대신 손에 든 걸 휙 던졌다.
툭!
헬무트의 발아래에 묵직한 고깃덩이가 떨어졌다.
질척한 피가 묻어 있는 야쿤 고기였다.
“닥치고 먹어라. 먹어야 힘을 낼 테니.”
“이걸 먹는다고? 익히지도 않은 것을?”
헬무트가 눈살을 구기자,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먹기 싫으면 말고. 여기서 불을 피우면 위치가 노출 될 거다. 마법으로 익힌다고 해도 연기가 나고, 냄새가 퍼질 테니 당연히 안 돼.”
말을 마친 사비강은 야쿤 고깃덩이를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헬무트를 향해 사비강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지. 어떻게 버틴 거냐고? 이렇게 버틴 거다. 악착같이. 타협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을 뿐이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 했지?”
“…….”
“타협을 했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너는 좀 더 너 자신을 마주하지 않았어. 도망치기에 바빴을 뿐. 당장 너에게 닥친 고통을 외면하기에 바빴지. 하지만 나는 내가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끝까지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러다 보니 답이 보이더군.”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나는 모든 걸 희생해서…!”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열변을 토하려던 헬무트는 그 비소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사비강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길로 헬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희생했다고? 무엇을? 네 왕국과 백성을? 웃기지 마라. 그건 너의 희생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일 테지. 너는 단지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을 뿐이지 않나? 너의 복수와 야욕을 위해서. 그런데 너는 피해자 행세를 하는군. 마치 그 모든 것을 네가 희생한 것처럼. 너만이 정의인 것처럼.”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는 것이냐!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지독한 운명을….”
“아무리 아들러 백작의 농간이 있었더라도 마지막 너의 선택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가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팔아서 지금의 그 대단한 권좌에 올랐다는 사실 말이다.”
“……!”
헬무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비강은 길게 트림을 하고는 나무 기둥 아래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결국 너는 할 수 있는 것을 손쉽게 했을 뿐이지 않은가? 마침 네가 왕자였기에. 하지만 세상엔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자들이 많다. 아니, 할 수 있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자들도 많지.”
말을 마친 사비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헬무트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사비강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수다는 여기까지만 하지. 피곤하니 눈 좀 붙여라. 내일은 또 싸워야 할 테니까.”
잠시 후, 사비강의 몸에서 묘한 기운이 일어났다.
운기행공을 하는 것이었다.
**
부스럭… 부스럭…!
희미하게 들리는 인기척에 헬무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눅눅하게 젖은 공기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추격자인가!’
경각심을 가진 헬무트가 천천히 허리춤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비강은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드는 생각.
‘설마 놈이 나를…?’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던가?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른 의심이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팔아넘긴다고 해서 사비강이 살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어쩌면 그냥 제 살 길을 찾아서 떠나 버린 것인지도 모르리라.
그때였다.
쒸에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화살 한 자루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까앙!
헬무트가 벌떡 일어나면서 화살을 쳐냈다.
동시에,
“잡아라!”
“우와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적들이 흉흉한 살기를 쏘아 보내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챙! 까앙! 푹! 쒸이이익! 푹!
“크아악!”
“아아아악!”
갑자기 난투가 벌어졌다.
헬무트는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살아남겠다는 본능이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발이 움직였고, 손이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크아악!”
쉬이이이잇, 푹!
“어윽!”
그가 휘두르는 검에 적들이 마구 쓰러져 나갔다.
주변으로 마족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악마가 따로 없었다.
“덤벼라! 전부 죽여주마!”
헬무트는 악귀처럼 소리치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갔다.
푸른 숲은 어느새 핏빛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헬무트도 무적은 아니었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헬무트의 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쉬이이이익, 푸욱!
“크윽!”
파박! 퍽!
“으윽!”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에 적의 검이 옆구리를 찔렀고, 쇠망치가 어깨를 때렸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헬무트의 뒤에서 누군가 불쑥 솟아올랐다.
“이익…!”
헬무트가 얼른 돌아서는데, 육중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거대한 쇠도끼를 그대로 내려찍었다.
꽈자앙!
“크으윽!”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놈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머리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그 바람에 뜨끈한 피가 이마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꾸만 스며드는 핏물 때문에 헬무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때 다시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
촤아아아악!
“크으으읍!”
이번엔 꽤나 깊이 베였다.
비틀거리면서 물러난 헬무트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을 포위한 자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헉, 헉, 헉…!”
“과연 대단하군.”
무리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하운트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붉은 늑대들을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인 두란이 함께 있었다.
뺨에 십자 흉터를 새기고 있는 두란은 단검을 혀로 핥았다.
“저 반쪽짜리 마족은 내가 요리하게 해주쇼.”
“그러도록 하지.”
하운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하운트…!”
“후후. 굉장히 화가 난 표정이군. 그런데 헬무트 자네는 지금 누구에게 분노하는 것인가? 바리탄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나에게? 그도 아니면 자네를 찍어내려던 마족들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 나는 네놈을 죽이고 싶을 뿐이다!”
헬무트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하운트가 입매를 비틀면서도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비록 상처 입은 맹수라지만, 여전히 이빨과 발톱이 살아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그 인간은 떠난 모양이군. 그러고 보면 그 인간도 꽤나 똑똑하단 말이지. 널 이렇게 먹이로 던져 놓으면 시간을 제법 끌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니까.”
헬무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사비강이라도 살아남아 마계를 뒤흔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떠나긴 누가 떠났다고 그러나?]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사비강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이 아닌가?
방향을 특정할 수 없었기에 하운트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비강의 육합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