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6
귀환 마교관
536화
마왕 타란트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했느냐?”
“마족이 되고 싶습니다.”
타란트의 표정에 가소로움이 스쳤다.
동시에 살짝 노기를 띠며 아들러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나를 부르고서 이런 짓을 하다니. 다시는 마계로 복귀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이 아이는 단순한 소년이 아닙니다. 이 아이에게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권위가 있습니다.”
“흐음.”
타란트가 시선을 내려 다시 필버트를 보았다.
타란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하찮은 인간이 마족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바쳐야 한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바칠 수 있는가?”
“제 왕국을 바치겠습니다.”
필버트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 순간, 넋을 놓고 지켜보기만 하던 레이첼 공작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안 돼!”
하지만 필버트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 왕국, 백성을 모두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타란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시선을 옮기자, 아들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은 정식으로 폐위되지 않아, 이 왕국이 저 소년의 것입니다.”
그제야 타란트의 표정에도 흥미가 돌았다.
반면 레이첼 공작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런 미친 새끼! 너의 그 한 마디로 얼마나 많은 자들이….”
“시끄러워! 이 배신자야!”
필버트가 버럭 소리치며 레이첼 공작을 표독스럽게 쏘아보았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왕국을 빼앗고, 아버지의 권위를 빼앗고, 자신의 목숨마저 빼앗으려고 했던 자!
필버트가 시뻘겋게 물든 눈빛으로 타란트를 향해 소리쳤다.
“이 왕국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부디 저를 마족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타란트는 소년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소년의 가슴 속에 깃든 지독하다 못해 악랄하기까지 한 그 열망을.
뜨거운 복수심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릴 만큼 잔혹한 파괴 본능까지.
타란트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이번만큼은 아들러가 제대로 한 건을 한 것이다.
타란트가 손을 내밀었다.
“너의 간절한 열망을 잘 들었다. 이리 와 내 손을 잡아라.”
“안 돼! 멈춰라!”
레이첼 공작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반면 필버트는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순간 그의 몸이 저절로 붕 떠올랐다.
필버트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오르듯 그렇게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가 타란트 옆에 나란히 섰다.
타란트가 입매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너의 제물을 접수했다.”
다음 순간,
후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드래곤이 한 차례 날갯짓을 하자, 육중한 덩치가 거짓말처럼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쓔아아아앙! 쓔아아아아앙! 쓔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손 그림자가 마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신수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아앙!
신수가 마구 떨어져 내리자, 소왕국은 일순 아수라장이 됐다.
비명이 차오르고, 절규와 절망으로 온통 얼룩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부서지고, 곳곳에 불이 났으며, 사람들의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신수는 끝이 없었다.
드래곤의 등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필버트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짜릿해서다.
이것이 절대적인 힘!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
개미처럼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신수에 짓눌려 죽을 때마다 필버트는 몸속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
그렇다. 이것을 원했다.
자신이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자신을 섬겨야 할 저 백성들은 집에서 가족들과 화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 꿈같은 시간은 이제 끝났다.
감히 주제와 분수를 모르고, 섬겨야 할 자를 외면한 벌!
“쿡, 쿡쿡. 하하하하하!”
마침내 필버트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구잡이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신수를 보니 필버트는 가슴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그런 필버트를 보며 타란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마족의 자격을 얻었다. 이름을 정해야 할 터. 무엇이 좋겠느냐?”
필버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름 따위야 아무렴 어떤가?
마족이 되었다.
저 바퀴벌레만도 못한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
“헬무트라고 하겠습니다.”
타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왕국 하나가 잿더미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신수는 마왕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특정한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신수가 발동한다.
가령, 제물을 거두는 의식이 통한다든지.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리던 신수가 그치자, 타란트는 드래곤을 몰아 천천히 성으로 내려왔다.
왕성 역시 신수의 영향을 벗어나진 못했다.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병사들 대다수가 신수에 깔려 죽거나 중상을 입어 신음하고 있었다.
헬무트는 드래곤에서 내려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저만치 하반신이 완전히 터져 나간 레이첼 공작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고통에 신음하던 레이첼 공작이 헬무트를 보고는 으르렁거렸다.
“이 미친놈! 네놈이 왕국을 멸망의 길로…!”
“닥쳐.”
“이 철딱서니 없는 꼬맹아! 네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기나…!”
콱!
“크윽!”
헬무트가 쪼그려 앉아서 레이첼 공작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들어올렸다.
레이첼 공작이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헬무트는 이 순간 뼛속까지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이것이 힘이다!
절대적으로 강한 힘.
“반역자 주제에 왕국과 백성을 들먹이다니….”
“나는 이 왕국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레이첼이 악바리같이 소리치자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아버지도 충분히 잘 지키고 계셨지.”
“아니, 너 같은 악마를 자식으로 둔 자가 그럴 수 있었을까? 네놈이 이 왕국을 잿더미로 만들…!”
퍼억!
레이첼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헬무트의 주먹이 그의 안면에 그대로 날아가 꽂혔다.
퍽! 퍽! 퍼억! 퍽!
헬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첼의 머리를 때렸다.
짜증이 났다.
약해빠진 주제에 종알종알 떠드는 것이.
정말 우스운 것은…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약해빠진 게 바락바락 대드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한참 때리고 나자,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레이첼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
하지만 그 숨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헬무트는 무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잿더미가 된 성은 헬무트의 과거를 철저하게 지워 주겠다는 듯 영광스러운 옛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헬무트가 문득 멈추고는 레이첼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만 묻지.”
“…….”
레이첼은 거칠게 숨만 고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헬무트가 질문을 던졌다.
“왜 배신했지? 반역을 한 이유가 뭐지?”
“…후후.”
레이첼이 터진 입술을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
헬무트가 눈을 가늘게 뜨자, 레이첼이 원망을 잔뜩 담은 얼굴로 노려보았다.
“네놈… 때문이다!”
“무슨 말이지?”
헬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첼이 악에 받친 것처럼 소리쳤다.
“네가 태어나기 전… 예언이 있었다.”
“예언?”
“그렇다. 그 예언은 바로… 네놈이… 이 왕국을 멸망하게 할 운명을… 타고 태어난 녀석이라고….”
순간 헬무트가 흠칫거렸다.
레이첼이 말을 이어 갔다.
“결국… 예언은 현실이 됐군. 네 아버지는 그 예언자를… 사악한 흑마법사라며… 가장 깊숙한 지하 감옥에 가둬 버렸지. 그리고 널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넌 왕국을 위해서 반역을 일으킨 거고? 결국 너의 진정한 목적은 나였다는 건가?”
“그렇다. 네놈을 죽여야만….”
푹!
한 줄기 섬광이 날아갔다.
헬무트가 검을 날린 것이다.
이마에 검을 박아 넣은 레이첼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헬무트가 무신경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가 손을 털고는 걸음을 돌렸다.
저만치 타란트가 아들러의 어깨를 다독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들러, 공로를 인정하고 백작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겠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아들러가 깊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해서 힘을 가졌다. 그런데 네놈은…!’
헬무트가 이를 바득 갈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분지의 하늘 위로 반투명한 막이 돔처럼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결계가 만들어졌군!’
이제 이걸로 디버프에 걸린 붉은 늑대들은 힘을 쓰지 못하리라.
헬무트가 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결계가 완성됐다! 놈들을 쓸어버려라!”
“우와아아아!”
마족 기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크아아악!”
“아아악!”
뭔가 이상하다.
분명 디버프를 당해서 전투력이 형편없이 떨어졌을 텐데, 적들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부딪쳐 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아군의 사상자가 늘어만 갔다.
‘제길! 뭔가 잘못 됐어!’
헬무트는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을 튕겨 냈다.
까아앙!
불꽃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원래 계획이라면 적들을 휩쓰는 것과 동시에 사비강을 찾아 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따다앙!
다시 한 번 검을 막아낸 헬무트는 성큼성큼 물러나면서 호흡을 골랐다.
붉은 늑대들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
놈들의 전투력이 오히려 상승한 것만 같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사비강이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나?”
헬무트가 적들을 훑어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에게 버프가 걸린 것 같습니다만.”
“그럴 리가….”
하지만 헬무트도 내심 그 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적들이 이렇게 강해질 리가 없다.
그때, 절벽 위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본 헬무트가 소리쳤다.
“하운트 백작님! 디버프가 잘못됐습니다!”
그 말에 하운트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제대로 먹혔네. 내가 사용한 것은 디버프가 아니니까 말일세.”
“그게 무슨…! 설마 당신이 배신을?”
“애초에 난 이들과 한편이었으니 배신이라고 할 순 없겠지.”
하운트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헬무트가 노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이 사실을 아라니우스 공작이 알고도 가만히 둘 것 같소!”
“하하. 자네가 죽으면 누가 내 배신을 알리지?”
“뭐요? 내 죽음이 곧 당신의 배신으로 연결될 거요!”
“하하하하!”
하운트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그가 웃음을 뚝 그치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너는 이곳에서 죽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붉은 늑대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죽은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하실 테지.”
헬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아라니우스 공이 날 죽이려고 했단 말이오?”
“인간 주제에 마족의 권위를 노리다간 그 끝이 좋지 못한 법. 어디까지나 네놈 역시도 인간이지 않았던가?”
“뭐요?”
“반쪽짜리 마족을 순수 혈통들이 달갑게 봐 줄 것이라 알았더냐?”
“그런…!”
“아라니우스 공에겐 내가 잘 알려 드리지. 너는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고. 반쪽짜리 마족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운트!”
헬무트의 울부짖음에 하운트가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 사라져라. 냄새나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