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35화 (535/670)

# 535

귀환 마교관

535화

수레 안으로 몸을 우겨넣은 필버트는 무릎을 감싸 쥔 채 벌벌 떨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 늘 살가운 미소로 대해 주던 신하들, 충성을 다하겠다며 맹세하던 병사들.

하지만 지금은 도처에 적이 가득했다.

눈이라도 잘못 마주치면 몸서리쳐질 만한 살기를 뿜으며 달려들곤 했다.

눈물이 났다.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자신이 아는 한 아버지는 선한 왕이었다.

어머니는 현명한 왕비였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때마침 수레 앞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놈들! 신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아버지였다.

‘아버지!’

필버트는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수레를 등진 채 수십 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듯했다.

지금 아버지를 부르면 적들에게 자신의 위치까지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뚝… 뚝…!

아버지의 발 옆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피다.

아무래도 깊은 부상을 입으신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편히 가시지요.”

“레이첼 공작…!”

“뭣들 하느냐? 가시는 길 모셔다 드려라.”

“옛!”

레이첼 공작이 명을 내리자,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며 아버지에게 창검을 내지르는 듯했다.

몇 차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곧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털썩!

아버지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 필버트와 정확히 눈이 마주치더니 한 차례 끔뻑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했다.

아버지의 몸에는 창검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병사들이 다가와 아버지를 질질 끌고 갔다.

때마침 어디선가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레이첼 공작이 소리 난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엄마…!’

필버트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그의 손을 적셨다.

병사들에게 거칠게 끌려나온 엄마가 표독스런 표정으로 레이첼 공작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보고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전하!”

짜악!

레이첼 공작이 다짜고짜 왕비의 뺨을 올려붙였다.

왕비가 퀭해진 눈으로 노려보자, 레이첼 공작이 싸늘한 시선으로 던지듯 말했다.

“시끄럽다.”

“레이첼 공작! 당신이 반역을…!”

짜아악!

다시 한 번 레이첼 공작이 왕비의 뺨을 후려쳤다.

왕비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며 흐트러졌다.

“시끄럽다고.”

“신이 용서치 않을….”

“쯧쯧. 자신을 믿을 수 없으니 이렇게 신만 찾아대지. 신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가만히 앉아서 기도나 하는 자들에겐 손을 내밀지 않거든.”

말을 마친 레이첼 공작이 병사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목욕을 시킨 후 방으로 데려와라.”

“알겠습…!”

찰나, 왕비는 병사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번개처럼 뽑아냈다.

레이첼 공작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레이첼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샤아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그녀는 자신의 목을 그어 버렸다.

‘엄마!’

수레 아래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필버트는 이가 부서져라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악몽, 아니 악몽보다도 지독한 현실.

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왕비가 그대로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자, 레이첼이 혀를 찼다.

“지독한 년이로군. 치워.”

“예!”

병사들이 왕비의 다리를 아무렇게나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마침 낯익은 얼굴이 레이첼 공작에게 다가가며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왕세자를 놓쳤습니다.”

짜아악!

보고를 올린 말론의 뺨이 휙 돌아갔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럼 나한테 보고를 할 게 아니라, 당장 찾아!”

말론과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잠시 후 레이첼이 한숨을 내쉬고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두 사라지고 나자, 주변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과 고함소리가 난무하던 전장이었는데, 이제는 적막함 속에 잠든 시체들만 보였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렇게 무릎을 감싸 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내성의 북문이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나간 후에 어디로 갈 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이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부모를 죽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세상은 몸서리쳐질 만큼 무심했다.

누구 하나 왕의 안위를 묻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다.

아버지를 향해 존경 어린 눈으로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하던 백성들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것이다.

성에 난리가 났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텐데.

그래도 일단은 빠져나가야 한다.

살고 볼 일이다.

그렇게 수레에서 막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 지금 나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문득 머릿속에 울려오는 목소리.

필버트는 화들짝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이 마법과 비슷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너는 누구야?’

- 저를 찾아오시지요. 살 길을 알려 드리지요.

‘네가 어디에 있는데?’

- 아성의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입니다.

그 순간 필버트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 흑마법사!’

- 킬킬. 그리 기억하고 계신다면 아마 제가 그 흑마법사가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간수가 있잖아.’

- 반역자들이 반역 정보를 이곳 지하 감옥을 지키는 자들에게까지 알렸겠습니까?

‘…….’

- 이곳을 지키는 간수들은 지금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 절 찾아오시지요.

필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을 빠져나간다고 해서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예로부터 가장 악랄한 자들일수록 제일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지금은 그런 자라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필버트는 기회를 엿보다가 재빨리 아성의 지하 계단으로 내달렸다.

마침 그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요?

필버트는 깊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서 지하 감옥을 견학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간수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홀로 계단을 내려가서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던 흑마법사와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엔 아버지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목소리가 다시 머리에 울렸다.

- 그때 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악마를 부르는 의식?’

- 그렇습니다. 혹시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끔찍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복수하고 싶어!’

평소의 필버트라면 이런 섬뜩한 말을 입 밖으로 결코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죽는 걸 목격하니 가슴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이 일어났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 그 힘을 가지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어떻게?’

- 마족이 되시는 겁니다. 마족은 인간과 달리 아주 강하지요.

‘마족?’

- 사실 저는 흑마법사가 아니라 실수를 저질러 마계에서 추방당한 마족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징계를 받는 중이지요. 저를 이곳에서 풀어 주십시오. 그럼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풀어 줘?’

- 지금이라면 간수들도 왕세자님의 말을 들을 겁니다.

‘내가 어리다고 말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기세입니다. 뭐, 지금의 저하라면 이런 조언을 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는 사이 필버트는 지하 감옥 입구에 다다랐다.

마침 간수장이 필버트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하…? 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

간수장과 간수 두 명이 얼른 달려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둑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아직 필버트에게 잔뜩 묻은 핏물을 보지 못했다.

“누굴 좀 만나야 해. 문을 열어.”

“하지만 이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로….”

간수장은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세 사람이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빛만 교환했다.

하지만 필버트는 단호했다.

“어서! 시간이 없다!”

“그럼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전하께 먼저 보고를 올린 다음에….”

찰나,

탓, 차아앙!

필버트가 번개처럼 몸을 날리더니 간수장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순식간에 뽑아 들었다.

그동안 말론과 함께 손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익히고 훈련한 효과가 제대로 나온 셈이었다.

갑자기 검을 빼앗긴 간수장이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드는데,

“모두 엎드려! 안 그러면 자결하겠어!”

순간 간수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저,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들은 엉겁결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다음 순간,

촤아악!

“헉!”

푹!

“우와아악!”

서걱!

필버트는 제일 먼저 간수장의 목을 베어 버렸고, 이어서 왼쪽에서 막 일어나던 간수의 가슴을 찔렀으며, 마지막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간수의 뒷목을 내질렀다.

‘사람을 죽였어…!’

손이 덜덜 떨려 왔다.

하지만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들 때가 아니었다.

필버트는 얼른 쓰러진 간수들 사이에서 열쇠를 꺼내 들고는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돌고 돌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자, 악취 속에서 새하얀 안광을 뿜어내는 늙은 죄수가 보였다.

늙은 죄수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오셨군요.”

역시 머릿속에서 울리던 그 목소리였다.

**

“뭐야? 저 영감은…?”

“가만, 저 꼬마는…?”

“엇! 왕세자다! 찾았다, 왕세자다!”

내성의 공터 복판을 유유히 걷는 노인과 소년.

노인은 족히 수년간 씻지도 않은 것처럼 꼬질꼬질했고, 소년은 피범벅이 된 채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을 본 병사들이 저마다 경악하며 소리쳤다.

이윽고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을 향해 창칼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버트에게 말했다.

“제 옆에 꼭 붙어 계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공터 복판까지 걸음을 옮겼다.

막 걸음을 멈춘 노인이 순간 양손을 활짝 펼쳤다.

파아앙!

그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병사들을 무참히 튕겨 내는 것이 아닌가?

“크우욱!”

“으악!”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지자 노인이 필버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검으로 제 몸에 이것과 똑같은 문양을 새기십시오. 가슴과 배에 이르도록 크게.”

노인이 두 손바닥을 펼쳐서 문양을 보여주었다.

칼로 새긴 듯한 그 문양은 역오망성이 둥근 원에 갇힌 모습이었다.

필버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칼, 칼로?”

“그렇습니다.”

“정, 정말 그래도 괜찮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버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

힘없는 노인의 가슴과 배에 칼로 그림을 새겨 넣으라니!

하지만 지금 그는 못할 게 없었다.

필버트가 천천히 문양을 새겨 갔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는데도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병사들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때마침 레이첼이 나타났다.

그는 공터 복판에 있는 노인과 필버트를 보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레이첼을 보자니, 필버트의 가슴 속에서 다시 한 번 울분이 솟구쳤다.

마침내 문양을 완성했을 때,

“잘 하셨습니다.”

노인이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양팔을 활짝 펼치며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레이첼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뭐, 뭐하는 거지? 다들 뭣들 하느냐? 저 미친 노인을 잡아!”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리듯 병사들은 노인과 필버트에게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휘아아아아아아앙!

“크읏!”

“우웃!”

휘황한 황금빛이 노인의 몸에서부터 터져 나오면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곧이어 왕성의 하늘 위로 거대한 황금빛 글자들이 둥실 떠오르면서 소용돌이쳤다.

사방에서 몰려든 먹구름은 천천히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쿠르르르릉…!

빛을 번쩍이며 나직한 울음을 내지르던 먹구름이 점점 형상을 완성해 갔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마치 사자의 영혼이 몸부림을 치듯, 귀신 울음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인의 배에 세로로 기다란 균열이 가더니,

후우우웅! 후우우웅!

아공간에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난 드래곤.

그리고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남자.

다음 순간 휘몰아치던 구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지의 남자와 드래곤만이 왕성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필버트는 본능적으로 그가 아주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러. 오래 전의 약속대로 한 번은 너를 만나러 와 주었다. 무슨 일인가?”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데 폐하를 부른 건 사실 제가 아니라, 이 아이입니다.”

아들러라 불린 노인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필버트를 가리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