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34화 (534/670)

# 534

귀환 마교관

534화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끝없이 길고 높다란 저 절벽을 이곳에서는 ‘혼세의 절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잔뜩 펼쳐진 막사들.

헬무트 기사단을 포함한 토벌 군단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내일이면 치열한 전투가 시작될 터였다.

헬무트의 막사에서는 각 중요 부대를 책임지는 수뇌 기사들이 모여서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사비강 역시 그들과 함께 있었다.

헬무트가 막사 안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보다시피 이곳이 ‘혼세의 틈’이라 불리는 협곡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타나는데, 내일 이곳으로 놈들을 모두 몰아넣는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붉은 늑대’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단 한 놈도 남김없이. 감히 폐하의 권위에 도전한… 제 분수를 모르는 놈들에게는 엄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마지막 한 마디는 사비강을 빤히 보면서 마무리 지었다.

마치 사비강에게 말을 건네는 듯.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붉은 늑대’는 반역자 바리탄을 따르는 잔당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이 착용한 갑옷과 무구에는 언제나 붉은 늑대가 그려져 있었기에 붙은 별칭이었다.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녀석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다. 방심은 금물이다. 하지만 머릿수는 우리가 훨씬 많다. 우리가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

그때 사비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 걸음 나섰다.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만.”

헬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인간 주제에 어디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단 말인가?

헬무트가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물었다.

“뭐냐?”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넓은 곳에서 싸우는 게 좋습니다. 굳이 이렇게 좁은 곳으로 몰고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자네는 중원 출신 인간이라서 마법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하찮은 너희 인간들과 달리 마족은 딱히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더욱 좁은 구역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결국 참다못한 헬무트가 손으로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탕!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 지금 항명을 하겠다는 건가?”

“단지 궁금해서 여쭙는 것일 뿐입니다만.”

“너희 하찮은 인간들은 명이든 뭐든 제멋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멋인 줄 모르겠지만, 마족의 일원으로 지내려면 상명하복이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다. 알겠나?”

헬무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비강을 쏘아보았다.

그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사비강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헬무트 기사단의 참모인 지크가 슬며시 나섰다.

“사비강, 당신이 보기에 이 작전이 다소 이상해 보일 순 있을 거요. 하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소.”

사비강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

지크가 말을 이었다.

“혼세의 틈으로 들어간 후 분지에 다다르면, 하운트 백작님이 설계한 결계가 발동될 거요.”

“그게 무슨 결계요?”

사비강의 질문에 지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붉은 늑대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결계요. 붉은 늑대 갑옷을 착용한 자들만을 선별적으로 디버프 하는 결계라고 보면 될 거요. 한마디로 적의 힘을 무력화하는 결계지.”

그제야 사비강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납득이 되는군. 잘 알겠소.”

말을 마친 그가 막사를 빠져나가자, 헬무트가 그 뒷모습을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건방진….”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럴 겁니다.”

“자네는 이해심이 넓군.”

“어쩌면 단장님 덕분이지요.”

“무슨 말인가?”

헬무트가 돌아보자, 지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단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분보다도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웬 아부인가?”

“아부라기보단… 사실 저는 단장님이 인간 출신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단장님도 거기에 대한 자격지심은 갖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혹 단장님을 궁지로 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순간 장내의 수뇌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둘의 눈치를 살폈다.

헬무트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지크를 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자네는 정말 나를 깊이 이해하고 있군.”

“그만큼 단장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고맙군. 그런데….”

촤아아아악!

순간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지크의 목이 솟구쳐 올랐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츄아아아아아!

결국 피를 뿜어 내며 쓰러진 지크의 몸통은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헬무트가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가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단 말이지.”

말을 마친 헬무트가 지크 곁에 서 있던 기사에게 던지듯 말했다.

“이제부턴 자네가 참모다.”

“예, 단장님.”

마족 기사가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대답했다.

마침 바람이 불면서 막사가 펄럭거리자, 밖에 서 있던 사비강의 뒷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비스듬히 돌아선 사비강의 얼굴에는 어쩐지 비소가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

다음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헬무트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런 와중에도 사비강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과연 사비강은 인간답지 않게 막강한 무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붉은 늑대 무리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져 갔다.

그들이 부리는 몬스터들 역시 맥없이 쓰러지곤 했다.

‘그래, 어디 마음껏 설쳐 보아라.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거다.’

헬무트는 내심 조소하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다! 늑대 몰이를 시작한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헬무트 기사단이 부채꼴로 진영을 펼치면서 붉은 늑대들을 혼세의 틈으로 몰아갔다.

“치익! 일단 협곡으로 들어가서 좁은 지형에서 싸운다!”

붉은 늑대를 이끌고 있는 두란이 소리치자, 수하들이 일제히 후퇴하며 혼세의 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든 게 뜻대로 돌아가는군.’

붉은 늑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좁은 협곡 안에서 싸우면 수적으로 불리한 점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알 리가 없겠지.”

헬무트는 기사단을 이끌고 혼세의 틈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협곡에서 최대한 버티던 적들은 조금씩 밀리면서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 분지에 다다르면 마법을 써서 그곳을 벗어난 다음 우리에게 마법 폭격을 시도하려고 할 테지.’

헬무트는 적들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저들에게 마땅한 대처 방안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마침 적들이 결국 분지까지 밀려났다.

이젠 적들이 마법을 써서 분지를 벗어나기 전에 결계가 완성되는 일만 남았다.

헬무트는 적들을 거침없이 베어 가면서 다시 한 번 주변을 힐끔 살폈다.

저만치에서 악귀처럼 싸우는 사비강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대단한 무위였다.

장담컨대 인간 주제에 마계에서 저렇게까지 싸우는 자는 사비강이 유일하리라.

인간이… 인간 주제에…!

헬무트의 표정이 어느새 혐오와 경멸로 가득 찼다.

‘네가 날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끊임없이 나를 과거로 회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헬무트에게 있어서 사비강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그 자체였다.

자신은 마족이 되기 위해서 육신은 물론, 혼까지 모든 것을 내던졌다.

하지만 사비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마계로 납치된 후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다.

그러다가 정말 별 것 아닌 이유로 마왕의 눈에 띄었고, 지금은 저렇듯이 인간의 모습으로 마족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한 자.

그러고도 마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자.

다른 누구보다도 사비강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리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헬무트는 아주 잠깐 회상에 빠졌다.

그 오래 전, 인간이었던 마지막 날로.

**

창! 카캉! 쾅! 카카카캉!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필버트는 헐레벌떡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성의 공터가 아수라장이었다.

밤중에 저렇게 야단스럽게 훈련할 일은 없었다.

이 조그마한 왕국은 늘 평화롭기만 한 곳이었다.

지금껏 필버트가 왕세자로 살면서 저런 요란한 훈련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뛰었다.

“앗!”

필버트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저 아래에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평소에 입는 화려한 의상 대신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고, 왕관 대신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된 병사들이 내성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쾅쾅쾅!

누군가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깜짝 놀란 필버트가 휙 돌아서며 소리쳤다.

“누, 누구냐!”

“왕세자 저하! 호위대장 말론입니다! 어서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아, 말론.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이자,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자.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또 있을까?

필버트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말론이 얼른 방으로 들어와 필버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하, 지금 상황이 몹시 위급합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나, 나만?”

“일단 왕세자님을 보호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라는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밖에서 싸우고 계시는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저하만이라도 피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저하!”

“알, 알겠어….”

필버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필버트가 걱정 서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젠 어디로 가는 거야? 성을 떠나면 갈 곳은 있어?”

그 순간 필버트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필버트를 바라보는 말론의 눈빛이 어딘지 이상했다.

이건 어린 필버트만 느낄 수 있는 육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선 성을 빠져나간 후에 리카드 백작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라면 저하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 응.”

“왜 그러십니까?”

“말론?”

“말씀하십시오.”

“나 방에 잠깐 두고 온 게 있어서….”

필버트가 얼른 걸음을 되돌리려고 하자, 말론이 그 앞을 냉큼 막아섰다.

“안 됩니다. 지금은 최대한 서둘러서….”

그때였다.

퍽!

필버트가 말론을 어깨로 강하게 밀어 버리고는 재빨리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난 말론이 소리쳤다.

“이 꼬맹이가! 당장 거기 안 서?”

필버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늘 자신에게 잘 대해 주던 말론이 갑자기 왜 저렇게 무섭게 변한 것인지, 아버지는 왜 병사들과 싸우고 계시는 건지.

혹시 이게 옛날이야기에서나 듣던 반역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닌가?

그렇게 내성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쉬이이이익!

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서는 순간,

푸욱!

“끄어어억!”

한 병사가 필버트를 내려치려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가슴에는 검이 튀어 나와 있었다.

쑤욱, 풀썩!

검이 뽑혀 나오자, 병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피를 흠뻑 뒤집어 쓴 필버트를 보면서 그를 구한 병사가 소리쳐 물었다.

“왕세자 저하! 왜 여기에 계십니까? 어서 피하…!”

푸욱!

“커억!”

병사는 입을 쩍 벌리고는 자신의 복부를 찢으며 튀어 나온 칼날을 보았다.

“으아아아아!”

그가 마지막 기합성을 터뜨리며 그대로 돌아서면서 칼을 후렸다.

서컥!

머리를 담은 투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필버트는 생각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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