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33화 (533/670)

# 533

귀환 마교관

533화

발코니에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 헬무트가 멈칫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가장 신경에 거슬리는 놈.

한낱 인간 주제에 마족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활보하며 다니는 놈.

정말이지 눈엣가시 같은 놈이 자기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헬무트의 표정이 바퀴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사비강, 자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아라니우스 공작님이 부르셨다는 말 듣지 못했습니까? 저 역시 부르셨습니다. 단장님과 함께 오라는 전언을 들었습니다.”

사비강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의 시선이 헬무트 뒤쪽에 쓰러진 시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이미 절명해 버렸는지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이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시녀에게 말을 전한 것 역시 저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성질 좀 죽이셔야겠습니다, 단장님.”

“뭐?”

헬무트의 뺨이 씰룩이자, 사비강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아, 단장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과민함은 건강에 해로우니까요.”

헬무트의 회색빛 눈동자가 사비강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살기가 휘몰아쳤다.

여차하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릴 정도로.

그때 사비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는 폐하의 총애를 받으니 단장님께 죽을 일은 없겠군요.”

사비강의 눈이 살짝 휘었다.

헬무트가 콧잔등을 살짝 구기고는 무거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공작님을 뵈러 가실까요?”

“앞장서게.”

“물론입니다.”

사비강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을 노려보는 헬무트의 시선에 강렬한 혐오감이 스며들었다.

**

“알겠는가? ‘붉은 늑대’라고 불리는 바리탄의 잔당들은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만큼 정예 중에서도 정예들이다. 바리탄이 파멸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잔당들이지. 그러니 반드시 주의해야 하네.”

아라니우스의 말에 헬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 굳은 표정이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라니우스가 옆에 선 하운트 백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운트 백작이 자네들을 돕게 될 걸세. 궁금한 사항 있나?”

하지만 사비강과 헬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비강은 정말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헬무트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침 하운트가 나서며 사비강에게 말했다.

“이번 작전에 성공해서 바리탄의 잔당을 완전히 섬멸하게 되면 폐하께서는 자네의 공을 크게 치하하실 생각이네.”

“영광입니다.”

사비강은 좀 전에 헬무트와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깍듯하게 대꾸했다.

하운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비강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니 자네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보게. 아마 이번 작전을 성공하면 폐하께서는 자네에게 작위를 내리실 생각이신 듯하네.”

“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하운트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헬무트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어째서 이런 하찮은 인간 녀석과 제가 같이 작전을 수행해야 합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말게나. 사비강의 실력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정말이지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지. 이 기회에 그는 마족 역사 최초로 작위를 받는 인간이 될 수 있네. 이거야 말로 굉장한 일이 아니겠나?”

“공작님! 정녕 진심으로…!”

“헬무트.”

아라니우스가 딱딱한 표정으로 헬무트를 불렀다.

그 표정이 워낙 진중했기에 헬무트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 흥분할 일이 아닌 것 같네만.”

“…….”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하운트가 사비강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군.”

“아닙니다. 헬무트 단장님의 심경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호오? 그런가? 역시 인간의 이해도는 우리 마족을 넘어서는군.”

감탄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 말투는 어딘지 비아냥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하운트가 사비강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말했다.

“뭐,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잘 알고 출전 준비를 하게. 헬무트 단장을 잘 보좌해서 큰 공을 세울 거라 기대하겠네.”

“명 받들겠습니다.”

사비강이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가 방을 나가자, 헬무트는 어금니를 쿡 씹고는 아라니우스와 하운트를 번갈아 보았다.

하운트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왜 그리 성정이 불같은가?”

“전 다시 생각해도 받아들이기가….”

“자네라면 더 깊이 생각할 거라고 판단했네만.”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말을 꺼내던 헬무트가 순간 멈칫거리고는 하운트를 보았다.

“혹시 이번 작전, 그게 전부가 아닙니까?”

그제야 하운트의 표정에 야비한 조소가 깃들었다.

그가 힐끔 곁눈질을 하자, 아라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운트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커험. 아직까지 살아남은 바리탄의 잔당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야. 한데 자네 생각에 사비강이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당연히 이길 겁니다.”

“어째서?”

“그가 강한 것과 별개로 제가 함께 작전에 참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장을 지휘하는 한, 그의 능력과 별개로 이 작전은 성공할 겁니다.”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헬무트의 이런 반응을 아라니우스는 진작 짐작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지 묘했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진 않았다.

하운트가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지. 자네가 있으니 당연히 성공하겠지. 하지만 사비강은 실패할 걸세.”

“그게 무슨….”

“바로 자네가 있기 때문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헬무트가 순간 멈칫거렸다.

“혹시 그 뜻은…?”

그제야 아라니우스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한낱 인간이 폐하께 작위를 수여 받는 걸 원치 않는 건 비단 자네뿐만이 아닐세. 자네처럼 모든 마족들이 달가워하지 않지.”

아라니우스의 말 속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헬무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눈이 반짝이자, 아라니우스가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만하면 자네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리라 믿네.”

헬무트가 회색빛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아라니우스의 방을 나온 헬무트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럼 그렇지. 한낱 정에 이끌려 다니는 인간 따위가 감히…! 조금만 기다려라, 사비강. 너의 마지막이 멀지 않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낭하를 걷고 있을 때였다.

마침 저만치 정원 사이를 거닐고 있는 사비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막 사비강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뭔가 심상찮은 움직임.

주변의 그림자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뭇가지며, 기둥이며, 조각상들의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제각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 움직임이 워낙 느리고 미세한 차이였기에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확실히 사비강은 보통의 인간이 아닌 모양이었다.

“장난질은 그만하고 이제 나오지 그러나?”

사비강이 싸늘하게 읊조리자, 그림자 속에서 암살자들이 귀신처럼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어차피 어디서 보낸 놈들인지 물어봐도 대답은 안할 테고…. 덤벼.”

“쳐랏!”

복면을 착용한 암살자들이 일제히 사비강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쉬쉬쉬쉬쉿!

여러 줄기의 오러 쓰레드가 사비강을 옭아매듯이 굽이굽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사비강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했다.

과연 인간이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소드마스터 수준.

아니다. 소드마스터도 저 정도로 잘 싸우진 못할 것이다.

상처 한두 군데는 무조건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한데 사비강은 그야말로 쏟아져 내리는 비를 피하며 너풀너풀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사비강은 중원의 모든 비급절기를 숙지하고 있었기에.

지난 수십 년간 그는 살을 뜯고, 뼈를 깎는 고통을 느끼면서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리고 마왕의 인정을 받았을 땐, 지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끝없이 나타나는 암살자들을 상대로 강제 비무를 펼쳐야만 했다.

죽지 않으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이 지금 사비강이 처한 환경이었다.

촤아아악!

마침내 마지막 암살자가 가슴을 크게 베이며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사비강이 호흡을 가다듬듯 길게 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바로잡고는 검을 갈무리했다.

난잡한 싸움이 일어난 덕에 그의 몸은 여기저기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흐른 피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흘린 것은 약간의 땀이 전부였다.

짝. 짝. 짝.

박수치는 소리에 사비강이 슬쩍 돌아보았다.

헬무트가 낭하에서 걸어 나오면서 짐짓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이 암살자들이 비록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마계에서 지옥과도 같은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자들일 텐데. 이렇게 순식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압하다니. 대단해, 아주 대단해.”

사비강이 헬무트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단장님이 보내셨습니까?”

“자네는 그런 섬뜩한 소리를 웃는 얼굴로 잘도 하는군.”

“아, 혹시나 제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단장님이 보낸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번 작전에 함께 참가할 입장이 되셨으니까요.”

그러자 헬무트가 표정을 굳히고는 사비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네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럴까요?”

“마족의 권위에 도전하는 한, 자네의 존재가 지워질 때까지 이런 자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릴 걸세.”

헬무트의 눈길이 쓰러진 암살자들에게 향했다.

그야말로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을 그대로 알린 것이기도 했다.

“그럼 혹시 단장님도 많이 시달렸습니까?”

순간 헬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기가 일어났다.

“미천한 인간 주제에 마족 앞에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그랬다면 실례했습니다.”

헬무트가 사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비강을 지나치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앞으로도 몸조심하게. 나 또한 자네를 걱정해서 해준 말이니.”

“명심하지요.”

“특히 주변이 난잡한 전장 상황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걸세. 언제 어디서 어떤 칼이 자네의 심장을 노릴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조만간 전장에 나가야겠군. 조심, 또 조심하게나.”

“충고 고맙습니다.”

사비강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헬무트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감사 인사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그럼 참전 준비나 잘하게.”

이내 헬무트가 반대편 낭하를 따라 사라졌다.

사비강이 그런 헬무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낯선 하늘.

이곳 마계의 하늘은 푸른색보단 옥빛에 가깝다.

그리고 황금빛 노을이 진다.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면서, 사비강은 중요한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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