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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마교관-532화 (532/670)

# 532

귀환 마교관

532화

싸늘한 바람이 무랑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검버섯이 잔뜩 핀 손으로 코끝을 슬쩍 문지르고는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나더러 그 존야가 했던 방법과 똑같이 해달란 말인가?”

“그렇소. 도사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허참. 무슨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도 아니고.”

무랑이 실소를 머금으며 뒷짐을 지고는 일어났다.

사비강이 따라 일어섰다.

“불가능하오?”

“모르겠네.”

사비강의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가능할 수도 있단 말이군.”

“그게 말처럼 간단하진 않네. 실패할 확률도 굉장히 높지.”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겠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하는 소린가?”

“끽해봐야 죽기 밖에 더하겠소?”

“허참.”

무랑이 다시 한 번 실소를 흘렸다.

사비강이 말을 이었다.

“존야는 날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자신이라고 속게 만들었소. 그리고 난 존야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소.”

무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먼 산을 응시했다.

“죽음을 각오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걸세.”

“나도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소. 기사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온 거요.”

“물론 우리가 광아의 기억으로 들어갔듯이, 자네 기억 속으로 그자를 끌어들일 수는 있네. 하지만 그자가 자네의 기억을 자신이라고 속게 하는 건….”

“아니. 내 기억 속의 그 녀석으로 놈의 자아를 심어 주시오.”

무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한 마디로… 미래의 자신을 과거처럼 기억하게 만들겠다?”

“바로 그거요. 내가 겪은 일을 말로 풀어 봐야 놈은 절대로 믿지 않을 거요. 그러니 직접 겪게 하는 거지. 내 기억 속에서 놈이 직접.”

“그가 헬무트라고 했나?”

“그렇소.”

“자네에게 얼마나 충성했지?”

“가장 충직했소. 나를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을 만큼.”

“처음부터 그 기억으로 끌어들여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을 걸세.”

“물론이오. 해서 놈이 나에게 충성하기 직전부터 겪게 해주고 싶소.”

“지금은 자네를 어떻게 보고 있지?”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주 경멸하고 있소.”

“하면… 그자의 자아가 강할수록 기억 속의 행동과 다를 수 있네.”

“알겠소. 각오하지.”

“명심하게. 만약 그가 기억에서 자아를 찾고 이탈하게 되면… 자네가 존야를 죽였듯이, 그가 자네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겠소.”

“좋아, 그럼 가지.”

사비강이 품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냈다.

“귀양에 가본 적은 있소?”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중원의 어딘들 가보지 않았을까?”

“좋소, 그럼 귀양에서 봅시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스크롤을 하나 건네주더니 다시 하나를 꺼내 망설임 없이 부욱 찢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운룡을 보며 말했다.

“거참, 급하기도 하군. 아무튼 일이 이리 되었으니 한동안 궁을 부탁함세.”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에게도 진실의 힘을 알려 주시길.”

“어디 내가 알리는 건가? 그건 궁주가 할 몫이지.”

무랑이 투덜거리듯 말하더니 스크롤을 찢었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

곳곳에 신음하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돌보기에 바빴고, 단리추는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혹시 모를 사태를 준비했다.

정문으로 나간 단리추는 경계를 서고 있는 무인들을 둘러보다가 양비웅에게 다가가 물었다.

“적들의 움직임은 없소?”

“아직이오. 후퇴한 자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얼어붙은 녀석들은 언제 녹을지 모르겠소. 만약 놈들이 치고 들어온다면 그땐 아주 박살을 내버릴 작정이오.”

양비웅은 멍이 시퍼렇게 든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그의 표정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마족 기사들과 마물들에게 죽은 방도들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이대로 마족과의 전쟁이 끝나면 흑수방의 세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 틀림없다.

일성검문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이 땅을 지키고 중원인을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운 자신들은 힘을 잃고 쇠퇴하여 사람들 사이에 잊혀 갈 터다.

대신 비겁하게 숨었던 자들은 다시 세력을 떨치며 강호의 주인 행세를 할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마족의 앞잡이 역할을 한 자들까지 보호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둘 순 없지!’

양비웅이 어금니를 까드득 갈았다.

억울해서라도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다.

죽도록 싸워서 반드시 살아남을 테다.

그의 두 눈엔 그런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단리추가 그 눈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감시 부탁드리겠소.”

“맡겨 두시오.”

양비웅이 퉁명스럽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대꾸했다.

단리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우는 도중 보이지 않았던 괴도무영은 피범벅이 된 채로 서 있었고, 귀주오도 역시 이를 갈며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리추는 안마당으로 돌아가서 정자에 걸터앉은 헬무트를 보았다.

헬무트는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는데, 정말이지 부상당한 무인들로 바글바글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헬무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팍 새기고는 어떤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사실 그는 갈등 중이었다.

사비강이 기다리라고 했기에 이런 냄새 나는 인간들 틈에 섞여 있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마음먹으면 여기 있는 자들을 전부 죽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부상당한 무인들뿐이지 않은가?

멀쩡한 인간들도 있지만 자신의 적수는 되지 못하리라.

한데 이상할 정도로 사비강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다.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자위했지만, 역시나 그것만으로는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뭔가가 있다.

‘사비강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그자의 정체가 뭐지?’

마침 헬무트 앞으로 다가선 단리추가 툭 던지듯 물었다.

“사비강 궁주는 널 아는 것 같던데. 너는 어째서 모르는 거지?”

헬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하찮은 인간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기에.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건가? 단지 사비강 궁주가 마계에 있을 때 어떤 활약을 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왜 네가 그분의 수하인지….”

“정신 나간 소리는 한 놈만 하는 걸로 족하다.”

헬무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단리추가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너희 마족 놈들도 호기심이라는 건 있나 보군.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우릴 없애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궁주님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걸 보면.”

“벌레는 언제든지 눌러 죽이면 그만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넌 그 벌레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건가? 역시 궁주님 말대로 보통의 마족과는 어딘가 다른 건가?”

헬무트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식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단리추는 자신이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목을 우두둑 꺾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기가 지루하군. 애초에 내가 인간 따위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지. 그냥 지금이라도 이 말 많은 벌레부터 죽여야겠다.”

헬무트의 회색빛 눈이 착 가라앉았다.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특유의 눈빛에 단리추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는데,

“말했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뒈지게 처맞을 거라고.”

귀에 익은 목소리.

헬무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사비강이 서 있었다.

사비강 곁에는 무랑이 함께 있었다.

헬무트가 어금니를 꽉 깨무는데, 사비강이 그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주시오. 지금부터 잠시 술법을 진행해야 할 테니.”

“제가 폐관 수련하는 곳으로 안내해드리지요. 따라오십시오.”

단리추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앞장섰다.

**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나?”

헬무트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사비강을 응시했다.

두 사람은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술법진 위에 나란히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사비강이 피식 웃었다.

“함정을 왜 파야 하지?”

“뭐?”

“지금 넌 내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왜 널 잡으려고 함정까지 파지?”

헬무트의 뺨이 씰룩였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붓으로 문양을 그리던 무랑이 혀를 차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허. 움직이지 말게. 자칫 문양이 흐트러지면 위험할 수도 있네.”

‘뭐, 이런 영감이…!’

헬무트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무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양을 마저 그렸다.

헬무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정벌하러 올 때만 해도 자신이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자, 이제 내가 주술을 읊게 되면 자네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되네. 그게 다 일세.”

“정말 이딴 방법으로 너에 대한 모든 걸 알게 된다는 건가?”

“해보면 알잖아?”

사비강의 말에 헬무트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으로서는 눈앞의 사비강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마치 마왕을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넘을 수 없는 벽.

어째서 이딴 녀석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 파악할 수만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방법이리라.

“그럼 시작하겠네.”

무랑이 말을 마치고 나자 나직이 주술을 읊어 갔다.

헬무트가 마주 앉은 사비강을 보며 읊조렸다.

“너는 실수하는 것이다. 내가 너의 비밀을 알게 되면 오히려 네놈을… 네놈을….”

하지만 헬무트는 마지막 말을 완전히 이을 수 없었다.

급격히 혼미해지는 정신을 더 이상은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었다.

**

“…인님.”

“…….”

“…주인님.”

헬무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주인님!”

문득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헬무트가 두 눈을 떴다.

그를 불렀던 반 나신의 여인은 어쩔 줄을 모르며 헬무트의 눈치만 살폈다.

“네가 나를 깨운 것이냐?”

“예, 주인님….”

“무슨 일이냐?”

“아라니우스 공작님이 찾으신다고….”

“그렇군.”

헬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을 꾼 것만 같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꿈을.

과거인 것 같으면서도 미래 같은.

중원을 침략해서 납치와 학살을 벌이는 일은 벌써 끝났음에도, 꿈속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중이었다.

아니, 절반 정도는 진행됐다고 봐야겠지.

그러다가 어떤 난관에 봉착한 것 같았는데….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

헬무트가 일어나자, 반 나신의 여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됐다.”

헬무트는 그녀 곁을 지나쳤다.

다음 순간,

피츗!

여인의 목이 절반 정도 갈라지더니 피가 울컥 솟구쳐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헬무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래도 단잠을 깨운 대가는 치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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