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1
귀환 마교관
531화
헬무트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퀭해진 눈으로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날 이렇게까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
사비강이 자박자박 걸어왔다.
헬무트는 움찔거리고는 사비강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사비강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자신이 한심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사비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어떤 기분일까? 마족이라는 건.”
“…….”
“까마득하게 높은 권좌에 오른 기분? 그런데 그곳에서 개미들의 반란을 지켜보다가 발가락이라도 물렸을 땐 또 어떤 기분이지? 지금의 너라면 잘 알지 싶은데.”
“놈… 정체가 뭐냐?”
“한때 네 주인이었다니까.”
헬무트는 이제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뿐.
이 하찮은 인간이 어째서 자신을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능성….
‘저자의 말이 진짜라면…?’
그렇다면 납득이 된다.
자신이 진심으로 섬긴 주인이라면 이 상황이 불가능하진 않다.
‘젠장! 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헬무트는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당치도 않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니!
사비강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궁금할 테지. 한낱 인간일 뿐인 내게 전혀 힘을 쓸 수 없다는 게.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썰은 풀어 줄 수 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너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으니까.”
“미친 놈… 너처럼 하찮은 인간이 꾸며댄 거짓을….”
“헬무트. 넌 보통 마족과 다르지.”
“……!”
헬무트가 다시 한 번 꿈틀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이번만큼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놀랐다.
놀람이 자꾸 겹치니 짜증이 일어났다.
‘도대체 이놈은 어째서…!’
사비강이 걸음을 멈추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단언컨대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가까이 온 자가 없었다.
그것도 저렇듯 거만하고 오만방자한 미소를 지은 채.
마치 자신의 아랫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
“노오옴!”
헬무트가 고함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검을 곧장 내질러 갔다.
쒸에에에에에엣!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탁!
그의 검신이 거짓말처럼 사비강의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사비강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잠시 자고 있어라. 우선 바깥에서 설치는 녀석들부터 정리를 해야겠으니.”
헬무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바깥에서 설치는 녀석들이라면 분명 자신이 이끌고 있는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까짓 것이 감히 무슨 수로…!”
퍼억!
사비강의 주먹이 그대로 헬무트의 안면에 꽂혔다.
슈우우우우욱, 꽈다앙!
다시 한 번 빛살처럼 날아간 헬무트가 벽을 부수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정이 아버님, 이 녀석 좀 감시해 주십시오.”
“예? 아, 예…”
단리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사비강이 훌쩍 몸을 날리더니 창공으로 솟아올랐다.
그야말로 인간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신묘한 움직임.
‘사람이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마치 자연의 모든 섭리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움직임이 아닌가?
그나저나…
‘저놈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쩌지?’
단리추는 천천히 다가가 의식을 잃은 헬무트의 뺨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다행히 그는 사비강에게 제대로 당한 것인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한편 창공으로 떠오른 사비강은 일성검문 앞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무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들 악착같이 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
사비강이 손을 뻗어 내며 소리쳤다.
“블리자드!”
다음 순간,
휘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눈보라와 강풍이 불어 닥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혈사련처럼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얼려 버린 것은 아니었다.
마족 기사단 중 후방에 있던 자들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미 8서클 경지에 오른 사비강이었기에 그들을 모두 얼음 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눈보라가 일어나며 아군들이 얼어 버리자 마족 기사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거렸다.
사비강이 그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모두 동작 그만!”
사비강의 우렁찬 소리에 무인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아 버렸고, 마족 기사들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헬무트 기사단은 들어라. 즉각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너희 주인은 영원히 소멸될 것이다.”
마족 기사들은 공격을 멈췄다.
하지만 그들이 멈춘 이유는 사비강의 협박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이유.
사비강이 마계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저렇게 능숙하게 마계어를 사용하다니!
이유야 어떻든 말만 해서 자신의 경고를 들을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사비강도 알았다.
팟!
순간 그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팟!
다시 허공에 나타난 사비강의 손에는 의식을 잃은 헬무트의 발목이 잡혀 있었다.
거꾸로 들린 채 만신창이가 된 헬무트는 두 눈을 뜨고 봐주기 힘들 만큼 처참한 꼴이었다.
마족 기사들이 다시 한 번 흠칫거리자, 사비강이 헬무트를 깨웠다.
“그만 처자고 일어나라.”
사비강이 한 줄기 공력을 주입하자, 헬무트가 문득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크아악!”
눈을 뜬 그는 사비강에게 발목이 잡힌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노옴! 감히 나를… 크아아악!”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미증유의 기운이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와 온몸을 들쑤셨기에.
마치 수만 개의 가시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전신을 마구 쑤셔대는 것만 같았다.
한 차례 고통이 지나가자 헬무트는 더 이상 대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는 자신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사비강이 불쑥 물었다.
“콤펠로. 쓸 수 있나?”
순간 헬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콤펠로에 대해 아는 건 마족뿐이다.
물론 마법은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정신력을 장악하는 기술 같은 것인데, 집단의 정신력을 우두머리가 단기간에 장악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콤펠로를 사용하면 시전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그 순간부터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주로 전장에서 아군이 명령에 불복하거나 우왕좌왕할 때, 그 수장이 콤펠로를 사용한다.
이때 시전자의 자질에 따라 콤펠로 유지 시간이 다르다.
사비강이 턱짓으로 마족 기사들을 가리켰다.
“써라.”
콤펠로에 대해서 알고 있고, 지금 그걸 사용하라는 것은 분명 내키지 않는 명령을 내리라는 뜻일 터.
사비강이 거꾸로 매달린 헬무트를 내려다보았다.
“나 같은 인간이 왜 널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 수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왜 내가 너의 주인인 지도. 그걸 지금부터 알려 줄 테니, 알고 싶다면 콤펠로를 사용해. 유지 시간은 얼마나 되지?”
“이곳 시간으로 반 시진 정도다.”
“그 정도면 충분하군. 모두 후퇴해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해라.”
“왜 내가 네놈 말을….”
“안 들으면?”
사비강의 눈빛이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
헬무트는 뼛속 깊은 곳까지 한기가 치미는 듯했다.
실제로 사비강은 헬무트의 몸에 한기를 불어넣고 있기도 했다.
헬무트가 곧 체념했다는 듯 말했다.
“놔라. 콤펠로를 쓰지.”
“잘 생각했어.”
그제야 사비강이 발목을 놓아 주었다.
이미 자신의 약세가 뚜렷한 상황에서 허튼 짓을 할 헬무트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으니까.
또한 헬무트의 성격이라면 분명 자신이 한 말에 구미가 당겼으리라.
어째서 인간 앞에서 자신이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할 테니까.
허공에 똑바로 선 헬무트가 마족 기사들을 향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했다.
“모두 물러가 있어라.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마족 기사들이 거짓말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학살에 미친 자들처럼 설치더니, 지금은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헬무트나 마족 기사들이나 어떠한 변화가 보이진 않았다.
콤펠로가 그렇다.
딱히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시전자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콤펠로를 사용했다는 걸 모른다.
“제법이군. 확실히 콤펠로를 사용하는군.”
“아닐 수도 있지. 저들이 곧 깨어나서 여길 쓸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러자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그럼, 넌 나한테 처맞다가 결국 뒈지는 거고.”
헬무트가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이제 말해 보시지. 네놈의 정체에 대해서 납득이 가도록.”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있지. 직접 겪어 봐라.”
“무슨 소리냐?”
“잠깐 기다려라. 곧 돌아올 테니.”
“무슨 말을…?”
팟!
하지만 사비강은 헬무트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스크롤 한 장을 부욱 찢더니 허공에서 종적을 감췄다.
헬무트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허공만 바라보았다.
마치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만 같다.
자신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리다니.
헬무트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무인들을 보고는 어금니를 꾸욱 씹었다.
**
멸마궁 무랑전 후원의 정자.
무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운룡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내게 절을 하는고?”
“도사님 덕분에 모든 것이 잘 해결됐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무랑이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보자 자운룡이 빙그레 웃었다.
“다 알고 계실 거라는 것 압니다.”
“허허, 자네가 도사를 해야겠구먼.”
“만약 그날 도사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일전에 멸마관에서 자신에게 술법을 걸었던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만약 그날 무랑도사가 자신에게 술법을 걸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지금까지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무랑이 자신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서 술법을 걸었든, 깨우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걸었든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는 은혜를 입은 셈이었으니까.
“커험, 다 궁주의 뜻이었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사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셨기에 제게 술법을 거신 것 아닙니까?”
“한참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갑자기 사례를 하다니, 무슨 일이 있나보군.”
자운룡이 빙그레 웃었다.
“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일전에 유정에게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무랑이 푸근한 웃음을 그렸다.
“그래, 그것이 진실의 힘일세. 영원한 비밀은 없지만, 진실은 영원하지.”
“옳은 말씀입니다. 때론 그 진실이 뼈를 깎는 아픔을 수반하기도 하지만요.”
“그렇다고 진실을 외면하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네.”
“이젠 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다행이군.”
무랑이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그렸다.
그때였다.
“그 진실의 힘을 좀 보여줘야 할 녀석이 또 있소.”
무랑과 자운룡이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