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29화 (529/670)

# 529

귀환 마교관

529화

촤아아악!

한 줄기 섬광이 터지면서 뜨끈한 녹색 피가 솟구쳤다.

단리추는 얼른 몸을 날려 튀어 오른 핏줄기를 피했다.

후두둑, 치이이익!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타들어 갔다.

혈액에 독성이 있는 탓이다.

벌써 이 독에 당해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여럿이었다.

단리추는 검을 한 차례 휘저어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절한 전투 현장.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 비명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일성검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마침 단리추에게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단리추는 가만히 검을 갈무리한 다음 천천히 돌아섰다.

찰나지간,

탓!

쉬이이이이익!

한 줄기 푸른 섬광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촤아아악!

거대한 몸집을 가진 오우거가 그대로 상하반신이 갈라지면서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섬광은 그 육중한 덩치를 베고 나서 곧바로 이동했다.

마침 문도를 공격하던 마족 기사의 등을 대각선으로 베어낸 섬광이 다시 한 번 날아오르면서 사이클롭스의 목을 단숨에 그어 버렸다.

촤촤아아악!

투둑! 데굴데굴…!

그야말로 대단한 발검 기술이었다.

일성검문의 독문무공이자, 단리추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성검법(流星劍法)이었다.

일성검문의 모든 검법이 그러하듯 유성검법 역시 발검을 이용한 검법이었다.

발검 순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를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적들을 베어내는 검술.

단리추가 발검과 동시에 최고로 많은 적을 베었을 때는 아홉 명이었다.

단 일검으로 쾌검을 구사하면서 아홉 명까지 벤 다음 다시 검집으로 갈무리한 것이다.

마침 저만치 양문수를 향해 도끼를 내려찍는 오우거가 보였다.

“어딜!”

단리추가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차고는 혜성처럼 쏘아져 나갔다.

쉬이이이이잇, 철컥!

발검과 동시에 오우거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츄아아아아아! 쿠웅!

분수처럼 피를 터뜨린 오우거가 그대로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넘어갔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양문수가 단리추를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문, 문주님… 무사하셨군요?”

“지금 내가 문제요? 양 총관은 어떻소? 다친 곳은 없소?”

“다행히 아직 멀쩡합니다.”

양문수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맑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엇! 문주님 위험…!”

양문수가 버럭 소리치더니 얼른 몸을 날려 단리추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가 익힌 유일한 무공인 경공술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것이다.

푸욱!

기다란 칼자루가 양문수의 등을 뚫고 튀어 나왔다.

얼결에 돌아섰던 단리추는 양문수의 등을 뚫은 칼날을 보고는 벼락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양 총관!”

츄아아아악!

칼자루가 뽑혀 나가면서 양문수는 피를 터뜨리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순간 단리추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노오오오옴!”

단리추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곧바로 유성검법을 펼쳤다.

쉬이이이이이이잇!

섬광이 날아가면서 눈 깜빡할 사이에 적의 목을 그어 버렸다.

섬광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마족 기사를 비롯해서 근처의 각종 마물들을 단숨에 베어낸 단리추는 마침내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쉬이잇, 철컥!

털썩, 털썩, 털썩…!

마족 기사를 포함해서 여섯.

일검에 여섯을 벤 단리추는 씨근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쓰러진 양문수는 움직이질 못했고, 마족 기사들과 마물들은 끝없이 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무인들이 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주변 가득 혈향이 풍겼고, 고통에 신음하는 무인들이 여기저기 허우적거렸다.

절망과 절규만이 가득한 전장.

아니, 지금의 분위기로만 보자면 전장이라기보단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이다.

단리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두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내심은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산 자보다 죽은 자가 훨씬 많아졌다.

귀주십이도는 이제 귀주오도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곱이나 죽었다.

괴도무영은 시체라도 된 것인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고, 흑수방 방도들은 팔 할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양비웅의 주먹은 피로 물든지 오래였다.

‘이 쳐 죽일 놈들…!’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울분, 머리끝에서부터 치솟는 분노,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절망.

“으아아아아아!”

단리추는 그 모든 부정의 기운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거센 기합성을 터뜨리며 다시 발검을 일으켰다.

쒸에에에에에엣!

섬광을 이끌며 날아간 단리추는 이번에도 단번에 마족 기사 셋의 목을 베었다.

쉬이이이잇, 철컥! 쉬이이이잇, 철컥!

일검 삼살, 일검 사살, 일검 오살…!

쉬이이이잇! 철컥! 쉬이이이이잇!

일검 팔살, 일검 구살… 일검 십이살!

그의 유성검법이 경지에 오른 순간이었다.

열 명의 벽을 깨뜨린 순간.

하지만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니, 치열한 전투를 겪으면서 유성검법이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이이이잇, 철컥!

마침내 일검 십삼살.

단 한 번의 발검으로 열셋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 단리추는 검을 갈무리하면서 천천히 허리를 폈다.

털썩!

마지막 마족 기사가 쓰러지는 순간, 단리추는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차디찬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시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귀주십이도와 흑수방주 양비웅은 무너진 담벼락을 넘어서 적들에게 달려가서 싸우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단리추는 뜨거워진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땅에 벌어진 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지독히도 맑았다.

‘아들아! 이 아비는 후회 없이 싸웠다! 너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생각을 마친 그가 양문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양 총관…”

그가 조심스럽게 안아들자, 양문수의 눈빛이 일순 맑아졌다.

회광반조의 증상이었다.

“문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기어이 양문수는 마지막 말을 마무리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양 총관…!”

단리추가 양문수의 어깨를 콱 잡았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야말로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소.”

그때였다.

“……!”

순간 단리추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온몸이 굳어 버리는 듯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기운!

소름끼치도록 낯선 기운이었지만, 살기나 투기는 아니다.

단리추가 천천히 돌아섰다.

부서진 정자 한쪽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눈부신 금갑을 착용한 남자.

날카롭게 찢어진 눈과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은 무척이나 냉혹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단리추를 가만히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왜 안 나가지?”

단리추의 뺨이 씰룩였다.

“네놈은… 뭐냐?”

“너 같은 하찮은 녀석에게 내 존재를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금갑의 사내는 바로 헬무트였다.

그는 회색빛 눈동자로 단리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눈동자.

아니, 오히려 아이처럼 호기심을 드러내는 눈빛에 가까웠다.

“어떤 심정이지?”

“무슨… 말이냐?”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발악하는 것은… 어떤 심정인가?”

“그 고귀한 정신을 너 같이 하찮은 녀석에게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헬무트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리고는 단리추를 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그 고귀한 정신과 함께 죽을 수 있도록 해주마.”

헬무트가 느긋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단리추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

혈사련 정문 앞에서 서성이던 매설란은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사비강을 향해 날듯이 달려갔다.

“어떻게 됐어?”

사비강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들어보였다.

매설란이 반색했다.

“찾았구나!”

“이걸 가지고 달아날 생각이었지. 뭐,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련주는? 혈도사괴는?”

“다 죽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매설란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제 여기도 대충 정리가 되어가. 당분간은 월섬당주님이 혈사련을 정비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겠지. 다른 곳에서 연락은?”

“아직 없어.”

그때였다.

두 사람 사이로 홍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매설란이 그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만 연락이 새로 왔네.”

홍염이 고개를 깍듯하게 숙여 보이고는 보고했다.

“급보입니다!”

“뭔가?”

“마족 군단이 귀양을 칠 예정입니다. 어쩌면 지금쯤 이미 싸움이 벌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급보가 날아온 시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매설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어쩌지? 귀양이면 일성검문이 있는 곳이야.”

“알아.”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성검문은 천멸대주 단리정의 본가다.

단리추의 성격이라면 아마 지금쯤 그곳에서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고 있으리라.

“원래대로라면 방법이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 방법은 생겼으니 가봐야지.”

“하지만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했잖아? 일성검문에 가본 적 있어?”

“아니.”

“그럼 어떡해?”

“일성검문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귀양에는 가본 적 있으니까.”

그제야 매설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 다녀올게.”

“응. 몸조심해. 우린 궁으로 돌아가 있을게.”

마음 같아서는 매설란도 같이 가겠노라고 고집을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텔레포트 스크롤은 고작 열다섯 개밖에 되지 않는다.

당장 자신이 간다고 해서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귀한 스크롤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난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어.’

사비강이 씨익 웃었다.

“걱정 마. 잘 다녀올게.”

말을 마친 그가 품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다음 순간,

부우우우욱!

스크롤을 찢어 버리자, 새하얀 빛 무리가 생겨나더니 사비강을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사비강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저 바람만 휑하니 불 뿐이었다.

추량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마계 기물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군요.”

**

낮잠을 자고 일어난 거지가 두 팔을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늘어지도록 하품을 한 거지는 사타구니를 벅벅 긁고는 손끝을 코로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으익, 고약한 냄새…!”

그는 헤진 바지춤에 손을 슥슥 문지르고는 엉거주춤 일어나다가 멈칫 굳어 버렸다.

휘이이이이잉!

대로변에 사람이 한 명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얼래? 이게 뭔 일이래?’

거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치 귀신이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는 한산했다.

밖을 힐끔 내다보던 사람들이 거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창문을 닫아 버렸다.

탕! 탕!

“뭐여? 누가 한 푼 달라고 했나?”

거지가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잣거리로 들어선 거지는 입을 척 벌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귀양의 저잣거리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 참, 이게 대체 뭔 일이람? 이보슈! 아무도 없수? 한 푼 줍쇼!”

목청껏 소리쳤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저잣거리에서 메아리를 듣는 경험을 겪게 될 줄이야.

괜히 무서워지려는 찰나,

파치지지지짓!

갑자기 대로 한쪽 허공에서 뇌전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묘한 기운이 뭉치는 게 아닌가?

“으헉!”

깜짝 놀란 거지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후,

파밧!

그 자리에 거짓말처럼 한 사람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거지는 이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는 꿈쩍도 하지 못했다.

빈 공간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이었다.

그가 거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귀양이오?”

놀란 거지가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 제대로 왔군.”

말을 마친 사비강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자, 거지는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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