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25화 (525/670)

# 525

귀환 마교관

525화

존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느냐?”

그녀를 안고 있는 사내가 조용히 물었다.

하늘 위에서 쨍쨍하게 빛나는 태양 때문에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분지에 잔뜩 펼쳐진 꽃밭이었다.

그 위로 나비와 벌떼가 한가롭게 노닐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끈질기게 늘어졌다.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존야는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아담한 집 안뜰의 마루 위에 앉아서.

어쩌면 이 평화로움을 깨고 싶지 않다는 본능 때문인지도 몰랐다.

“뭘 그리 생각하느냐?”

등 뒤에서 다시 들린 목소리.

존야가 천천히 돌아섰다.

십칠 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

오래전 그날의 그 미소처럼 역시나 아름다웠다.

‘오라버니, 언제나 그 미소로 날 바라봐 줘.’

존야는 괜히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가서 십칠 호의 품에 푹 안겼다.

“녀석, 왜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야?”

“그냥. 이대로 조금 있고 싶어.”

“그럼 그러자꾸나.”

십칠 호가 존야의 어깨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기분 좋은 손길. 기분 좋은 바람. 기분 좋은 햇살.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꿈이다.

소박하지만 무엇보다 간절한 꿈.

십칠 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왜 울고 있느냐?”

“오라버니… 나 꿈을 꾸었어.”

“악몽이라도 꾸었더냐?”

“응. 지독한 악몽이었어. 정말 긴 꿈이었지.”

“신경 쓰지 마라. 꿈은 꿈일 뿐이다.”

“맞아. 꿈은 꿈일 뿐이야. 그런데 나, 너무 힘들고 슬프고 외로웠어. 그곳엔 오라버니가 없었거든.”

“하지만 지금 이렇게 네 곁에 있지 않느냐?”

“응. 그래서 기뻐.”

존야가 십칠 호의 손을 꼭 잡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다시금 잠이 소록소록 쏟아졌다.

“오라버니… 나 또 잠이 오려고 해….”

“걱정 말고 자거라. 이젠 행복한 꿈만 꾸게 될 테니.”

“이젠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돼. 알았지?”

“그럼. 우리 연이(戀邇)를 두고 이 오라비가 어딜 가겠느냐?”

“응… 나 좀 잘게….”

“자장, 자장 우리 연이….”

“오라버니도 차암. 내가 무슨 애도 아닌데….”

존야의 귓속에 십칠 호의 노랫말이 부드럽고 달콤하게 울려 왔다.

맞아. 내 이름… 연이였지.

성은 몰라도… 오라버니가 지어 준 그 이름.

‘가까이 두고 사랑하는 이’라 하여 지어 준 그 이름….

‘연이….’

**

존야는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사비강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라질 듯 말 듯한 미소는 눈물에 젖어 갔다.

그렇게 존야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편히 가시오. 그곳에서는 부디 행복하길.”

죽여야 할 적에게.

혹은 죽인 적에게 이처럼 연민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생사를 걸고 자신에게 펼쳤던 환역마공의 영향이리라.

그는 의식 세계에서 수십 년을 그녀의 몸으로 살았다.

그녀라고 착각한 채로 살았다.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비강 스스로도 놀랐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그것도 숙적의 죽음에 대해서 이토록 애달픈 마음을 가질 줄은.

동시에 화가 났다.

이런 상황을 만든 마족들에게!

사실 어쩌면 마족들은 그저 화풀이대상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으니까.

마족은 그저 살며시 거들었을 뿐.

하지만 여기에서 인간에게 분노를 터뜨렸다간 또 다른 존야가 되고 말리라.

해서 사비강은 의식적으로 마족들을 향해 모든 분노를 돌렸다.

그리고 그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그가 바닥을 차고 지붕 위로 솟구쳐 올랐다.

탁!

후우우우웅!

창공에서 검은 바람이 사납게 불어 왔다.

혈사련 곳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비강이 사자후로 외쳤다.

“다들 동작 그마안!”

그야말로 벽력이 내려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사자후에 지붕의 기와들이 깨져 나가고 전각이 흔들렸으며, 땅이 우르릉 떨렸다.

곳곳에서 전투를 치르던 마족 기사들과 혈사련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비강이 손바닥을 쫘악 펼치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블리자드!”

휘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뼛속을 엘 것만 같은 한풍이 눈보라와 함께 휘날리기 시작했다.

쫘자자자자작…!

시체들이 순식간에 얼어 갔고, 그들이 흘린 핏물도 눈 깜빡할 사이에 꽁꽁 얼어붙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무인들과 마족 기사들도 갑자기 덮친 한파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크읏…!”

“우악…!”

쩌저저저저어억!

얼른 몸을 날려서 한기를 피하려던 자들은 그 상태에서 그대로 조각상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마족 기사들 역시 그대로 얼어붙은 채로 꿈쩍하지 못했다.

휘이이이이잉!

한 줄기 자연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사비강이 일으킨 재앙은 끝이 났고, 련주전 주변은 무겁고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뒤섞여 있는 인간들을 추려내서 마족 기사들에게만 피해를 줄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 따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마족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인간들에 대한 분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무인이라면 이 정도의 한기에 갇혔다고 해서 죽진 않을 것이다.

한동안 내상을 입고 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사비강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마침 누군가 사비강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돌아보니 매설란과 추량이었다.

추량은 부상을 입은 것인지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후원으로 들어선 매설란이 꽁꽁 얼어붙은 마족과 인간들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괜찮으십니까? 사부님!”

사비강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냥… 성질 좀 부렸어.”

“그럼 이 사람들도….”

“괜찮아. 저절로 녹을 때까지 두면. 한동안은 한기가 체내로 파고들었을 테니 움직임이 좀 둔해질 테지. 심한 경우는 며칠 동안 마비가 된 것처럼 못 움직일 수도 있을 테고.”

“엇! 흑귀까지 있습니다!”

추량이 얼음에 갇힌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흑귀를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왠지 평소에 자신에게 대들던 흑귀를 생각하니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얼어붙어서 알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혀를 내밀고 놀리는데,

“얼어붙었지만 눈으로 다 보고 있을 거다. 녹으면 다 기억할 거야.”

“엇! 진작 말씀을 해주셔야지요!”

사비강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조심하자는 생각에 추량이 자세를 고쳐 잡고는 헛기침을 했다.

“커험! 컴컴!”

매설란이 피식 웃고는 사비강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어쩌긴. 마족 놈들만 골라서 깨부수면 돼.”

“알았어. 처리할게.”

매설란이 저벅저벅 나서서는 두 자루의 연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취리리리릿!

퀴리리리리릿!

두 줄기의 섬광이 얼어붙은 조각상 사이를 굽이굽이 헤엄치듯 날아다녔다.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 적을 찾아서 죽이는 정도는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퍼캉! 펑! 퍼캉! 펑펑!

연검에 베인 얼음 조각상들이 연신 터져 나갔다.

추량은 매설란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하군요.”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비록 움직이지 않는 적이라지만, 꽁꽁 얼어붙은 바닥 위에서 저토록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며 적을 가려내 공격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아군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화려한 검술을 사용하는 매설란에게 꼭 어울리기도 했다.

“넌 몸이 왜 그러냐?”

사비강의 시선이 추량에게 닿았다.

추량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 그게… 실은….”

그가 추희룡에게 당했던 사실을 이야기하자, 사비강이 미간을 좁히고는 침음을 흘렸다.

“흠… 그렇다면 혈도사괴가 스크롤을 가져갔을 가능성이 크군.”

“이제 어쩌죠? 그놈들이 그걸 다 사용해 버리기라도 하면….”

“그럴 걱정은 없지. 스크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아…!”

“그보단 일단 옹기승을 찾자.”

“예, 사부님!”

두 사람은 옹기승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옹기승은 련주전 입구에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꽁꽁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마침 매설란이 얼어붙은 마족 기사들을 모조리 깨부수고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옹기승은 괜찮아?”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비강이 얼어붙은 옹기승을 턱 끝으로 슬쩍 가리켰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마족이라니. 설마 이 녀석들도 옹기승을 노린 거야?”

“그런 모양이야. 존야도 왔더군.”

“존야가? 어디에?”

매설란이 화들짝 놀라서 두리번거리자 사비강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에 존야의 시신이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비강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곁으로 매설란이 다가서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놀랐어.”

“뭐가?”

“생각보다 훨씬 인간답게 생겨서.”

“그렇지.”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설란은 그녀 나름대로 생각에 빠졌다.

사파에 대한 선입견과 마령교의 우두머리에 대한 선입견이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그녀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있으니…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가… 생각하게 되네.”

“바로 그런 고찰이 인간답게 만드는 거겠지.”

사비강이 쓴 웃음을 지으며 등받이가 부서진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침 추량이 달려와 물었다.

“혈도사괴와 추희룡 련주를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추종술은 자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얼마나 여유를 부려도 될까?”

“뭐, 사흘 안에만 뒤쫓는다면 무조건 찾아낼 자신 있습니다.”

“그럼 잠시만 쉬자. 너무 오래 싸웠다.”

“예? 아, 예….”

추량이 모호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비강이 달려간 후, 자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지 않았나?

시산혈해가 된 이 전투 현장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싸움이 끝난 것이다.

한데 오래 싸웠다니…?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사비강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년을 경험했다는 것을.

사비강은 지금 심적으로 매우 피곤했다.

그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잠시 눈 좀 붙이마. 사람들 깨어나면 알려라. 몇몇 사람들은 후속조치를 바로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사부님.”

추량이 깊어진 눈동자로 사비강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따라 사비강이 평소보다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사비강은 추모라도 하듯 존야의 시신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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