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4
귀환 마교관
524화
끝없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열 명밖에 없는 마족 기사들을 상대할 때는 이렇게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한데 녀석들의 분신은 거의 본체만큼이나 강했다.
마족 기사들에 비해 혈사련 무인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았지만, 실력이 모자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닥에 쌓여 가는 것은 무인들의 시체였다.
마족 기사 대부분은 분신이었기에 도검으로 베었을 때 시커먼 연기만 일어나며 흩어졌을 뿐, 사체가 남진 않았다.
촤아아앗!
쉬르르르르!
이번에도 마족 기사의 분신을 베어낸 소천악이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찰나,
쉬이이이잇!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에 소천악이 움찔거리고는 돌아섰다.
마족 기사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방심했구나!’
마족 기사의 검신에서 시커먼 오러가 솟아올랐다.
절체절명의 순간!
쩌어어엉!
검은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닥치더니 마족 기사의 검이 시커먼 경장을 입은 사내에게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동시에 땅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곧장 쏘아지듯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검은 경장을 입은 사내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자, 바닥에서 일어난 그림자 역시 똑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마족 기사의 목이 뎅겅 날아가고 말았다.
툭, 데굴데굴…!
쿠웅!
목을 잃은 마족 기사가 그대로 넘어졌다.
분신이 아니라 실체였던 것.
뒤늦게 검은 경장 사내를 알아본 소천악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강아!”
“다시 뵙습니다, 아버지.”
소유강, 흑귀가 슬쩍 돌아서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천악은 다시 혈사련에서 아들을 만나게 되자 못내 반가웠다.
하지만 사방이 적들로 들끓고 있었기에 한가로이 수다나 떠들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주변을 경계했다.
소천악이 등 뒤에 선 흑귀에게 말을 건넸다.
“이 아비 뒤에 네가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든든하게 느껴질 날이 올 줄 몰랐다.”
“언제까지나 아이가 아니지요. 이젠 믿고 맡기십시오. 아버지의 등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녀석, 많이 컸구나.”
소천악은 가슴 가득 뿌듯함을 느꼈다.
아들이 실종되었을 때만 해도 삶의 의미가 없었다.
하루하루 목구멍으로 넘기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한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소천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꺾어 들고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검은 구체.
‘어쩌고 있는 거요?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꼭 이겨 주시오. 당신이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아들놈과 버티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믿소!’
그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일순 허공에 뜬 구체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쩌적…! 쩍!
검은 구체에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 사이로 강한 빛이 비집고 나오는 게 아닌가?
쏴아아아아아!
일순 강렬한 빛줄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침내,
꽈아아앙!
요란한 폭음에 이어 검은 구체가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져 날아갔다.
구체를 만들었던 껍질은 허공에서 연기처럼 증발하며 사라졌다.
대신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비강과 존야가 아래로 추락하면서 전각 지붕 위에 떨어졌다.
쿠당탕!
척!
내상을 입은 것인지 존야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한참을 구르다가 엎드려서 구토를 했다.
“웨에엑!”
시뻘건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반면 사비강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가 지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아라. 네가 저지른 짓이다.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은 모두 너와 같은 인간이다.”
“설교 따위는 집어치워! 어차피 세상에서 가장 간악한 것이 인간이다! 오히려 꼴좋군!”
“그런가? 너를 도왔던 십칠 호 역시 인간이라는 건 어찌 해석할 거지?”
“……!”
존야가 입술을 쿡 씹고는 사비강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의식의 세계에서 사비강에게 목숨을 잃은 존야는 실제로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주체하면서 사비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라버니를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깨끗했나?”
“시끄럽구나!”
파밧!
존야가 바닥을 차며 사비강에게 쏘아져 나갔다.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움직인 것이었지만, 내상을 입은 그녀의 움직임을 사비강이 놓칠 리가 없었다.
“느려 터졌군.”
몸을 슬쩍 비튼 사비강이 다리를 걸어서 그녀를 넘어뜨렸다.
쿠당탕탕!
한참이나 바닥을 구른 존야가 다시 악착같이 일어나 신형을 쏘았다.
쉬이이이잇!
그녀의 작은 주먹이 기풍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순간,
탁!
사비강이 그 손목을 가볍게 낚아챘다.
“넌 바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야.”
“시끄럽다!”
“바리탄에게서 십칠 호의 모습이 보이겠지?”
“……!”
“놀랍도록 닮았을 거다. 거기에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있을 테지.”
“시끄러운…!”
“놈을 가호하는 건 질투와 미혹의 악신이지. 한 번 미혹에 빠지게 되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된다. 너는 바리탄에게서 십칠 호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크이이익! 그 주둥이 닥치란 말이다앗!”
존야가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사비강은 더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펑!
그가 일장을 뻗어내자, 존야의 한쪽 팔이 장풍을 맞고 뜯겨져 나갔다.
“끄아아아악!”
존야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됐다.
강호의 모든 무인들에게 확실한 복수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십칠 호는 자신에게 바리탄을 보내주었다.
그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아 있었다.
자신도 마령혼을 흡수하고, 바리탄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째서…!
“너 따위가 방해를 하는 거냐!”
존야가 다시 일갈을 터뜨리며 발을 휘둘렀다.
이번만큼은 사비강도 방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야는 사비강에게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었다.
사비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날 죽일 수 있었던 기회는 그 의식 세계에서 단 한 번이었다. 이미 내상을 입은 네가 날 이길 수는 없다.”
“닥쳐!”
“정말이지 말을 안 들어 처먹는군. 마지막으로 계도는 하고 저승으로 보내려고 했더니!”
사비강이 나무라듯 소리치더니 그대로 존야의 팔을 꺾으며 지붕 위에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꽈자앙!
그대로 지붕이 무너지면서 사비강과 존야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커억! 쿨럭, 쿨럭!”
존야가 기침을 하자 피가 마구 튀어나왔다.
존야는 이제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비강의 말대로 그를 죽일 수 있었던 최적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네놈만큼은… 내가 죽어서도…!”
“시끄러워.”
사비강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존야의 손을 잡았다.
다음 순간 존야는 손끝에서부터 한 줄기 공력이 체내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사비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마지막 수를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사비강이 전해주는 공력은 그녀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사비강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기에 존야가 눈살을 구기고는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지?”
“네 의식 속에 다시 한 번 나를 가둬라. 마지막으로 바리탄을 봤을 때로 돌아가자.”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넌 죽을 거다. 죽기 전에 진실을 알고 싶지 않나? 네가 그토록 동경하는 바리탄의 진실을.”
“집어 치…”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끝내 주도록 하지.”
사비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단숨에 천령개를 내려쳐 즉사시킬 생각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존야의 눈빛에 갈등이 스몄다.
잠시 후,
“그 어떤 진실도 두렵지 않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며 사비강을 순식간에 감쌌다.
**
존야는 바리탄의 방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예, 주군.”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들고는 대답했다.
달빛에 비친 바리탄의 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 언젠가 십칠 호의 몸을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그가 한 차례 고통을 겪고 나면 늘 윗옷을 벗은 채로 저렇게 달빛을 올려다보곤 했다.
‘오라버니….’
존야는 순간 바리탄을 향해 온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걸 눈치 챈 것인지 바리탄이 창밖의 달을 보며 물었다.
“나의 여자가 되고 싶으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십칠 호와 함께 세월을 보내던 그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바리탄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내 품에 안기고 싶으냐?”
바리탄이 다시 물었다.
존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이젠 알겠다.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십칠 호가 너무 그립다.
오라버니가 너무 그립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나직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 다시 한 번 고개를 들고 정확히 봐라. 바리탄의 진짜 모습을!
따앙!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가 갑자기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 존야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아악!”
참지 못한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바리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머리가… 헛!”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 존야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괴물…!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다 끌어 모은 듯한 괴물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가…? 무슨 일이냐?”
괴물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존야의 턱을 천천히 받쳐 들었다.
그 손에서 악취가 느껴졌다.
움푹 파인 눈과 시커멓게 썩어 가는 피부, 가는 실뱀처럼 흐느적거리는 머리카락과 사납게 찢어진 눈.
그는 결코 평소에 보던 바리탄이 아니었다.
그 추악하면서도 괴기스러운 모습에 존야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주…군….”
바리탄의 표정이 점점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울던 아이도 뚝 그칠 만큼 흉악한 얼굴이었다.
그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했다.
“어째서 너는 내게 미혹되지 않는 것이냐?”
“아…”
“어째서 미혹되지 않는 것이냐!”
바리탄이 버럭 소리 지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내게 미혹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쓔아아아아악!
바리탄이 갈퀴 같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빠른 속도로 존야를 향해 내리쳤다.
찰나,
촤아아아악!
한 줄기 섬광이 바리탄의 가슴을 가르며 지나갔다.
시퍼런 핏줄기가 터져 나오면서 존야를 가득 적셨다.
존야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아아…”
털썩, 쿠웅!
바리탄이 그대로 넘어가자, 그녀의 앞을 막아선 자가 돌아섰다.
그는 바로 사비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