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3
귀환 마교관
523화
평생을 이인자로 살아왔다.
욕망과 야망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큼 큰데, 어떻게 된 것이 늘 달려가고 나면 또 다른 상대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운명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네가 과연 일인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어느 날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하오문을 통해 알게 된 기물들.
그 기물들이 어쩌면 자신에게 큰 힘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물들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때가 되길 기다렸다.
언젠가 저 권좌에 앉아서 만인을 내려다보는 때가 오길!
한데 이번엔 또 다른 시험이 시작됐다.
사비강…!
그 이름만 곱씹어도 치가 떨리는 사비강!
처음에는 그자도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칼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칼은 바로 자신이었다.
사비강은 그 칼의 주인이었다.
일인자가 되었지만, 진정한 일인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달려가는 길 앞에는 여전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다못해 정도맹의 총군사마저 자신을 멸시했다.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권좌에 올랐지만, 그곳은 그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바닥이었을 뿐이다.
하늘에서 군림하는 것들이 즐비했다.
그때 다시 결심했다.
다룰 수 없는 칼이라면 버리자고.
대신 내게 맞는 칼을 찾아 나서자고.
그게 바로 옹기승이었다.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두루마리로 옹기승을 납치하고, 그에게 술법을 걸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은 차질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이번엔…!
“네놈들이 날 배신하다니!”
추희룡이 이를 빠득 갈면서 일갈했다.
일괴가 히죽 웃었다.
“거, 이왕이면 배신이라 하지 말고 이용했다고 합시다.”
“노오옴!”
“시끄럽소!”
마침내 사괴가 허공을 붕 가르더니 추희룡에게 떨어져 내렸다.
이미 배가 갈라져서 피를 쏟아낸 추희룡은 그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가 눈을 부릅뜬 채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노려보는 순간,
“엇! 막내야, 조심해라!”
팍!
갑자기 이괴가 날아들면서 사괴를 멀찍이 밀어냈다.
동시에 그가 칼을 휘둘러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쩌어엉!
사괴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놀랍게도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마족 기사였다.
그 뒤로 또 다른 마족 기사 둘이 더 나타났다.
다음 순간 마족 기사들이 다짜고짜 혈도사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파바밧!
“젠장! 혈사진(血絲陳)으로 죽여 버려!”
일괴가 소리치자 혈도사괴가 재빨리 위치를 잡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혈사진이란, 네 명이 동시에 독특한 보법을 밟으면서 도기 안에 적들을 가두는 진법이다.
까강! 깡!
마족 기사들과 혈도사괴 사이에서 연신 불꽃이 터져 나오면서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혈도사괴 역시 하나하나가 초절정에 이른 고수였지만, 마족 기사들의 독특한 전투 방식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까앙!
마침내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삼괴가 뒤로 주룩 밀려났다.
혈사진은 어디까지나 절제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한데 마족 기사들이 연신 강공으로 치고 나오니, 계속해서 밀린다는 느낌을 받은 삼괴가 자존심을 내세우고 만 것이다.
그가 뒤로 서너 장 정도 빠져 버리자, 혈사진에 틈이 생겼다.
그리고 마족 기사들은 본능처럼 그 틈을 파고들었다.
쉬이이이잇!
츄아앗!
“크윽!”
이괴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둘째야!”
일괴가 버럭 소리치는 순간,
팟!
마족 기사가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게 아닌가?
“어딜!”
일괴가 얼른 칼을 휘두르는데, 마족 기사가 그대로 검을 내지르며 마주 부딪쳐 왔다.
쩌어엉!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일괴가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온몸이 저릿저릿 울렸다.
그 순간 또 다른 마족 기사가 검은 바람이 되어 일괴의 품으로 짓쳐들었다.
쉬이이이익!
“헛!”
순간 일괴는 당황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짓에 당한 거지?’
사실 그는 조금 전 마족 기사와 부딪치면서 상대의 마력으로 인해 사기가 억눌린 상태였다.
만약 그가 정순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별로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사공을 익혔기에 마력의 기운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대형!”
절체절명의 순간!
느닷없이 일괴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후아아아아앙!
쩌어어엉!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요란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일괴가 눈을 부릅뜨고 보니, 낯선 청년이 돌아서면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소. 한데 당신은…?”
“아, 저는 사비강 멸마궁주님의 대제자인 추량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폐관수련을 마치고 세상에 다시 발을 디뎠지요.”
“그, 그렇군. 어쨌든 고맙소.”
“그럼 인사는 차후에 다시 드리지요! 반묘!”
그러자 그의 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 크르러렁!
우렁찬 포효와 함께 호랑이만큼이나 덩치가 커지는 게 아닌가?
“가자!”
- 크르렁!
다음 순간, 반묘와 추량이 재빨리 마족 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과연 추량의 움직임은 기기묘묘했다.
우선 그의 손등에서 자라나는 무형의 검도 경악할 노릇이었지만, 그의 보법 또한 굉장히 독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사비강이 특별히 창안한 호조마나검법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반묘의 버프가 더해지니 추량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호랑이처럼 적들 사이를 마음껏 누비면서 날뛰었다.
그가 처음으로 마족 기사의 목을 뎅겅 썰어내자, 상대는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이내 스르르 사라졌다.
진짜가 아닌 분신이었던 것.
이를 본 삼괴가 얼른 일괴에게 전음을 흘렸다.
[대형! 이 틈에 빠져나갑시다!]
일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추희룡의 목숨을 끊어 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자!]
그가 전음을 보내자마자 바닥을 차고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혈도사괴가 뒤따랐다.
마족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추량은 그들이 달아난 사실도 잊은 채 자신의 무위에 취해 있었다.
중상을 입은 추희룡 역시 이 사실을 미처 추량에게 알리지 못했다.
그는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애써 치뜨며 자책했다.
‘나의 가장 큰 패착은… 이용한다고 착각한 것이로구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껏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해왔다.
한데 돌이켜보니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었다.
사비강도 그랬고, 혈도사괴도 그랬다.
‘제길…!’
한편 추량과 마족 기사들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명의 마족 기사가 추량을 동시에 공격하는 순간,
“하아아앗!”
추량은 마나방패를 내세우는 대신 마나검을 앞으로 내지르고는 기합성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 크르러렁!
반묘가 포효를 터뜨리자,
쫘자자자자작!
쏴쏴쏴쏴쏴쏴쏴아악!
조각조각 갈라진 마나검 파편들이 두 갈래로 흩어지면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푸푸푸푸푸푹!
마나검만큼은 검은 갑주도 막아내지 못했다.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파편으로 박혀 버린 두 마족 기사가 이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스르르르르…!
잠시 뒤 두 녀석 모두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쳇! 이것들도 분신인가?’
어쨌거나 보기 좋게 둘을 동시에 해치운 추량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 이제 안심하십시오. 폐관수련을 했던 제가 이렇게 놈들을… 음? 다들 어디 간 거지?”
추량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추희룡이 조소를 지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자넨… 속았네.”
“아, 련주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그들을 쫓아가게!”
“그들이라면…?”
“혈도사괴 말일세! 조금 전에 여기 있던 자들이 중요한 물건들을 가져갔어!”
“설마… 그 물건이 텔레… 아니, 마계의 기물입니까?”
추량 역시 텔레포트 스크롤에 대해서는 사비강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넘겨짚었는데, 추희룡의 표정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국 추희룡도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더 이상 숨기길 포기한 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가?”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하긴…”
“마계의 기물이 맞습니까?”
“그렇네. 이왕 이리 된 것 모두 얘기해 주겠네. 이리 오게.”
“말씀하십시오.”
추량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파박!
순간 추희룡이 남아 있는 모든 내공을 쥐어짜며 번개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 팔이 붙들린 추량이 황급히 물러나려는데,
파지지지직!
“컥!”
추량은 전신을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뇌전이 흐르는 듯했다.
“자네 힘 좀 빌리지!”
“크으으윽!”
추량이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을 삼켰다.
두 사람 사이에서 뇌전이 흐르면서 추량의 기운이 추희룡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됐다.
‘제길…!’
추량은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뇌전흡살공…?’
일전에 사비강에게 듣기로는 이 사공을 익힌 자가 바로 전 혈사련주인 허무극이라 들었다.
한데 추희룡이 뇌전흡살공을 사용하다니…!
이게 정말 뇌전흡살공이라면 꼼짝없이 죽게 생긴 게 아닌가?
그때였다.
전신을 마비시킬 듯한 뇌전 속에서 한 줄기 기운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반묘구나!’
그의 예상대로 반묘가 순간 털을 곤두세우면서 추량의 전신에 흐르는 마나를 증폭시킨 것이었다.
다행히 내공과 달리 마나는 뇌전흡살공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반박의 여지가 생겼다.
추량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뇌전에 맞서 마나를 밀어냈다.
꽈아앙!
마치 몸 안에서 폭약이 터진 것처럼 큰 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크읏!”
“커억!”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음을 터뜨리면서 물러났다.
“헉, 헉, 허억…!”
가까스로 추희룡의 마수에서 빠져나온 추량은 거칠게 호흡하면서 비틀거렸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미 상당한 양의 내공을 갈취당한 데다가 뇌전에 당하면서 입은 내상이 상당했다.
“쿠웨에에엑!”
급기야 그가 무릎을 쥐고 피까지 토해냈다.
한편 기운이 한층 솟구친 추희룡은 다시 추량에게 달려들려고 몸을 날렸다.
찰나,
- 크르러렁!
그 사이를 막아서면서 반묘가 거칠게 포효하는 것이 아닌가?
“방해 말고 비켜라!”
쑤아아앙!
추희룡이 일장을 날리자, 반묘가 잽싸게 몸을 날려 피하더니 그의 옆구리를 물어뜯으려고 아가리를 벌렸다.
“치잇!”
추희룡이 얼른 보법을 밟고 물러났다.
다행히 반묘는 추량을 건드리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추량에게서 더 많은 내공을 흡수했다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저 짐승이 있는 한 뇌전흡살공을 계속해서 펼치기도 어려울 터였다.
“혈도사괴, 이 개 망나니 같은 새끼들!”
추희룡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몸을 휙 돌리더니 혈도사괴가 달린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