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
귀환 마교관
522화
존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광휘는 그대로 검은 연기와 뭉치면서 하나의 사람 형상을 만들어냈다.
스르르르…!
이내 완전한 사람으로 변한 연기는 바로 또 다른 존야였다.
존야가 존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역시 넌 바리탄이 아니었군.”
“어떻게 알았지?”
새로 나타난 존야가 기존의 존야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존의 존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처음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완벽하게 동화되었지. 뭐, 워낙 상황이 급박하기도 했고.”
존야가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주렴 너머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새로 나타난 존야가 그 뒤를 따라 나와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다만 이야기는 한 번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침묵했다.
의자에 앉은 존야가 말을 이었다.
“십칠 호의 손을 잡는 순간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세월들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비록 모든 이들의 외면을 받더라도, 그가 옆에 있다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지. 다만 그가 고통 받지 않길 원할 뿐…”
“잡설은 집어치우고 어떻게 눈치 챘는지 묻고 있다.”
서 있는 존야의 표정이 냉랭하게 식어 갔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존야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너의 인생. 기구하고 참혹했다. 다시 떠올려 봐도 가슴 한쪽이 저미는 듯 아프니까.”
“동정하는 거냐?”
“뭐, 그럴 지도. 하지만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했다. 너의 지독한 슬픔과 아픔. 그래도 한때 나의 삶이었으니까. 그래, 칼날을 들이밀고 불덩이를 날리는 것보다 더 날카롭고 뜨거웠다. 위험했어. 이번 공격은 지금껏 내가 받은 그 어떤 공격보다 위험했다. 자칫하면 완전히 당할 뻔했어.”
“…….”
“나였다면? 글쎄… 나였어도 바리탄을 내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먼저 내가 한 말은 사과해야겠군. 네가 멍청하다고 한 말 말이야.”
의자에 앉은 존야가 서 있는 존야에게 씩 웃어 보였다.
서 있는 존야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사과를 바란 적은 없다.”
“속 좁은 계집처럼 굴지 말라고. 그래도 모처럼 건넨 사과니까 일단 받아야지.”
“네놈은…!”
“물론 나였어도 다른 선택은 하지 못했을 거다. 너의 길고 긴 인생 동안 진정으로 네게 손을 내민 사람은 십칠 호뿐이었으니까.”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네 의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마공에 너의 모든 걸 걸었을 테지. 내가 너와 같은 생각으로 바리탄을 받아들인 순간, 너는 내 육신을 삼켰을 테지.”
“……!”
“바리탄이 널 삼켰듯이, 너의 함정에 빠진 나는 널 받아들이고 삼켜졌을 테지.”
“잘 아는군.”
존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계획은 완벽했을 터였다.
그녀는 언젠가 사비강과 조우하게 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흑성에 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사비강을 상대할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비강을 이길 방도를 찾았다고 여긴 순간이 오면, 사비강은 어김없이 그걸 넘어서는 뭔가를 보여주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는 찾아냈다.
사비강을 무조건 이길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그녀가 개발한 환역마공(幻歷魔功)이었다.
환역마공은 마계의 오러 웹을 참조해서 만든 마공으로, 그녀가 내뿜어낸 마기가 오러 웹처럼 거미줄의 형태로 사비강과 자신을 동시에 휘어 감으면서 시작된다.
순식간에 환역마공에 갇힌 사비강은 그 순간부터 자아를 잃고 존야의 의식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존야가 미리 설정해 두었던 세계.
그녀가 직접 겪고, 살아온 그 인생을 고스란히 다시 살게 된다.
즉,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을 존야가 되어서 그대로 겪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어려서부터 자아라는 것을 통제받고 지냈던 존야였기에, 사비강이 그녀의 인생에 동화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존야가 그랬듯이, 사비강 역시 처음에는 자아라는 것이 지워진 상태에서 의식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긴 세월을 실제로 겪게 되지만, 엄연한 의식의 세계.
바깥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
어쨌거나 사비강이 끝내 자아를 찾지 못하고, 완벽하게 존야와 동화가 되어서 모든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사비강은 결국 자아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때 오러 웹에서 풀려난 사비강은 그저 혼이 나가서 멍청한 인간이 되거나, 주화입마에 빠져 미치광이가 되고 말리라.
하지만 사비강은 결정적인 순간 존야와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존야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상황.
환역마공이 깨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존야는 위험해질 수 있다.
비록 의식 세계일지라도 이곳에서 죽게 되면 실제로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어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해서 그녀는 이 마공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런데 어떻게…!
존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다시 묻지. 어떻게 알았나?”
“인생을 살면서 기회가 세 번은 찾아온다고 하지. 너는 십칠 호를 만난 게 첫 번째 기회였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렇게 지금 나를 만나고 있다는 거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어떻게 눈치 챈 거냐고 묻잖아!”
“그래, 그렇게 궁금하다니까 알려 줄게. 사실 이 공간. 이미 와 본적이 있어.”
“뭐?”
존야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비강을 보았다.
이곳은 자신의 의식 세계다.
물론, 실제로 자신이 겪은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 사비강이 와 보았을 리가 없다.
당시 이곳은 철저히 통제된 장원이었다.
존야를 힐끔 본 사비강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실제로 직접 와 본 적은 없지.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서 와 봤다.”
“정류광….”
“잘 기억하는군.”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했다.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정류광에게 걸어 두었던 기억의 봉인이 깨졌다는 사실을.
그 부분을 유의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상황까지 예견하진 못했으리라.
단지 봉인이 깨진 것을 알아챈 것과 사비강이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리라는 걸 짐작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사비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기시감이 들었지. 언젠가 와 본 것 같은 이 장소, 왠지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한 느낌. 그러다가 마침 딱 생각이 났어. 여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와 본 적이 있다는 걸.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지? 잠시 혼란을 겪은 끝에 깨달은 거지.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걸.”
존야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너’의 인생을 살아온 실체. 진짜 힘은 내게 있겠지. 그리고 지금 너는 아무 힘도 가지지 않았을 테고.”
서 있던 존야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아직 아무 짓도 안 해. 다만… 아까 말했다시피 살면서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너의 그 시련과 고통, 절망과 슬픔을 내가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다른 삶을 살아 볼 생각은 없나?”
“…….”
“이래봬도 내가 교관 출신이라서 말이지. 너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너를 버린 강호를 대신해서 한 번은 너에게 사과의 의미로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
서 있던 존야가 차갑게 힐난했다.
“우리를 그토록 매몰차게 내몰더니, 이제 와서 무슨…!”
“자, 내 손을 잡도록 하자. 마침 지금 나는 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네가 너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의미로도 좋잖아?”
존야의 모습을 한 사비강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서 있던 존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뺨을 씰룩이다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날 회유할 생각은 마라. 말 한 마디로 쉽게 풀릴 역사가….”
“쉽게 한 마디 던진 게 아니다. 너의 인생을 겪으면서 뼈를 깎는 슬픔을 겪으면서… 나름 어렵게 꺼낸 말이다. 그러니 그 거지 같은 바리탄 따위는….”
“감히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존야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코웃음을 쳤다.
“나야말로 깜빡 속을 뻔했군. 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이 강호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을 뻔했다. 썩 꺼져라.”
“넌 속고 있는 거다. 바리탄에게. 그리고 너 자신에게. 십칠 호에 대한 의지를 바리탄에게 이어 가는 거다. 홀로 서지 못하면 너는 계속해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될 거다.”
“시끄럽군.”
“도저히 안 되겠나?”
“안 돼.”
존야가 존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존야의 눈빛이 허공에서 한참이나 얽혀들었다.
마침내 존야의 모습을 한 사비강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널 이대로 살려 둘 수는 없다.”
말을 마친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피융!
한 줄기 지풍이 날아가더니 그대로 존야의 이마에 구멍을 뚫어 버렸다.
**
“빌어먹을! 어째서 이런 상황이…!”
추희룡은 창밖을 힐끔 돌아보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귀와 소천악 등이 마족 기사들을 나름대로 막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얼른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둘러멨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담긴 가죽 주머니였다.
“어쨌든 이 기물만 있으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못내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련을 떠나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상책이다.
옹기승을 숨긴 이상 사비강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고, 존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때,
콰자앙!
문짝이 부서지면서 마족 기사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시커먼 갑주를 두른 녀석이 진짜인지 분신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썩 꺼지지 못할까!”
추희룡이 일갈을 터뜨리고는 품에서 비수를 꺼내 던졌다.
쉭쉭쉭!
따다당!
마족 기사는 아예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빠르게 날아간 비수가 시커먼 갑주에 막혀 튕겨 나갔다.
“칫!”
추희룡이 혀를 차고는 얼른 다른 방으로 달려가서는 훌쩍 몸을 날렸다.
콰자앙!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온 그가 재빨리 모퉁이를 돌아선 후, 가죽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련주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듣기로는 련 내에 마족들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황급하게 달려온 자들은 다름 아닌 혈도사괴였다.
‘하필 이런 때에….’
추희룡이 두루마리를 슬그머니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대꾸했다.
“마침 네 분 잘 오셨소. 지금 마족 놈들이 본련을 침입했소. 네 분께 부탁을 좀 드리겠소. 내 바삐 갈 곳이 있으니, 여러분이 저 마족 기사들을 잠시 상대해 주시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련주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게 있는데, 어찌 어려움을 모른 척하겠습니까?”
“저희에게 맡기고 다녀오십시오!”
“고맙소! 꼭 부탁드리겠소!”
말을 마친 추희룡이 막 돌아설 때였다.
“그런데 련주님?”
“뭐요?”
추희룡이 다시 돌아서는 순간,
“이걸 잊고 가시면 안 되지.”
쉬이이이익!
머리 위에서 칼날 한 자루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헛!”
추희룡이 얼른 검을 들어 올려 막았다.
쩌엉!
금속성이 고막을 찔렀다.
찰나,
쉬이이이잇!
정면에서 일괴가 칼을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츄아아아악!
배가 갈라지면서 피가 튀었다.
“크으윽!”
추희룡이 이를 빠득 갈고는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순간 혈도사괴 중 가장 빠른 삼괴가 몸을 날려 가죽 주머니를 뺏어 들었다.
“어지간히도 중요한 물건인가 보지? 련을 버리고 달아나면서도 지키려는 걸 보니?”
“그, 그건 네놈들에게 소용없는 것이야! 내놔라!”
“그럴 수는 없지. 련주의 물건 잘 맡아서 보관하겠소. 편히 보내드려라.”
“예, 대형!”
사괴가 이죽거리며 추희룡에게 다가왔다.
추희룡은 암담한 표정으로 혈도사괴를 보았다.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