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519화 (519/670)

# 519

귀환 마교관

519화

“빨리 달려! 거기서 멍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누군가 소리쳤다.

하지만 소녀는 정신을 차릴 때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시야가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야! 정신 차리라고! 이러다가 다 죽는단 말이야!”

누군가 또 소리쳤다.

하지만 귀에 왕왕 울리기만 할뿐 여전히 울먹임만 계속됐다.

슬펐다.

아니, 힘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너무 힘들었다.

몸은 천근만근이나 된 것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더웠다.

사방이 불길로 이글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조금 전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눈앞의 이 소년은 왜 자신을 보고 소리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지끈!

어디선가 나무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

쿠웅!

화르르르륵!

육중한 소리에 이어 후끈한 열기가 소녀의 뺨까지 훅 밀려왔다.

“크읏!”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던 소년은 신음을 삼키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양손을 소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안간힘을 썼다.

“제발… 좀! 일어나라고!”

하지만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볍디 가벼워야 할 소녀의 몸이 정말이지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아마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천근추와 비슷한 마공을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아! 진짜!”

소년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화마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만치 아이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져서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 십칠(十七) 호! 빨리 와! 거기서 뭐해?”

“이 녀석 때문에.”

“뭐야? 그 얼빠진 애는 두고 달려! 그러다 너도 죽는다고!”

“먼저 가! 몸조심해라! 구(九) 호!”

“칫! 난 모르겠다! 간다!”

구 호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십칠 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방을 둘러싼 화마 너머 어딘가에서는 고함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교의 멸망을 알리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저 소리를 듣는 날이 오면 기뻐서 날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래서야… 뜨거워서 날뛰게 생겼네.’

사방에서 열기가 뻗어 오자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이렇게 땀으로 범벅인데도 ‘몸에 불이 붙기나 할까?’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십칠 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녀 앞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더니 철퍽 주저앉아 버렸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십칠 호가 소녀를 보며 히죽 웃어 버렸다.

사방이 불길로 이글거리는데, 십칠 호의 웃음은 거짓말처럼 천진했다.

그 웃음이 뭔가 경종을 울리기라도 한 걸까?

“…십칠… 오라버니…?”

“그래, 삼 호 이 녀석아. 이제 정신이 좀 드니?”

“오라버니… 여기서 뭐해?”

“네가 일어나질 않으니 나도 그냥 여기 주저앉았다.”

“나… 뜨거워.”

“어이구, 이젠 좀 뜨겁나보네. 지금까진 그냥 따뜻했나 봐?”

“응… 따뜻했어.”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소녀가 진지하게 대답해 버리자 십칠 호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피식 웃어 버렸다.

“하긴… 이렇게 따뜻해본 적도 별로 없었지.”

자신들이 있던 곳은 모든 게 차가웠다.

감시자의 눈초리, 대법을 사용하는 무인들의 냉정함, 밤이면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고, 차가운 철창이 그들을 바깥세상과 분리해 놓았다.

십칠 호가 소녀의 양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삼 호. 이러다가 우린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원래 그런 거잖아.”

소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법을 시행하다 보면 죽는 아이들은 허다했다.

오늘 잘 버텨서 살았다고 해서, 내일도 잘 버텨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때문에 아이들 상당수는 그냥 이러다가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칠 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린 살 수 있게 됐어.”

“어떻게…?”

소녀가 멍하니 물었다.

“정도맹이 마교를 쳤어. 마교는 지금 궤멸 직전이야.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해. 정도맹 무인들이라면 우리를 도와줄 테니까.”

“아….”

“알아들었어? 우린 지금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한다고. 지금 여기 주저앉아 있으면 너도 나도 불에 타 죽을 거야.”

“정말… 우리 살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살 수 있어! 우리에게 다시없을 기회가 왔어!”

“알았어. 가자, 오라버니.”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십칠 호의 안면에 웃음이 가득 피었다.

“좋았어! 지금부터 날 꼭 잡아! 반드시 살아서 나가자!”

“응!”

십칠 호는 소녀가 기운을 차리는 걸 보고 힘을 냈다.

유독 이곳에서 자신을 잘 따르던 삼 호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렸을 때 잃었던 여동생이 자꾸만 생각났다.

“가자!”

십칠 호는 소녀의 손을 꼭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지끈, 쿠웅!

화르르르륵!

다시 불붙은 기둥이 넘어지면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십칠 호가 얼른 걸음을 멈추고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마한극보(魔寒極步) 사용할 수 있어?”

“응!”

“좋아, 지금이야. 마한극보를 사용해서 저 불길을 단숨에 넘어가는 거야!”

“알았어!”

오누이 같은 두 사람이 손을 꼭 잡은 채 동시에 마한극보를 펼쳤다.

마한극보는 극음의 마공으로 시전자의 몸을 극도로 냉각시켜 지나간 자리나, 스친 자리가 차갑게 얼어붙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 사람이 여기에 닿으면 내공이 없는 자는 곧장 동상이 걸려 목숨도 잃을 수 있었고, 내공을 수양한 자라면 일시적으로 몸이 둔해지기도 했다.

파바바바밧!

한기를 풀풀 풍기는 두 사람이 단숨에 쓰러진 불기둥을 뛰어넘었다.

치이이이익…!

두 사람의 몸이 열기에 닿으면서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

불기둥을 뛰어넘은 십칠 호가 소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응, 괜찮아.”

“다행이다.”

십칠 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소녀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을음이 잔뜩 묻은 웃음이었지만, 지금껏 그녀가 본 그 어떤 미소보다 아름다웠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정도맹 무인들이 우릴 구해 줄 거야.”

“응!”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달렸다.

그리고 막 모퉁이를 돌아가려는 순간,

“아악!”

앳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십칠 호가 얼른 삼호의 손을 잡아끌고 몸을 훌쩍 날렸다.

지붕으로 올라선 그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바닥에 구르는 머리는 조금 전 자신을 두고 달려갔던 구 호였다.

그는 퀭한 눈을 부릅뜬 채로 지붕 위의 십칠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무인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이 갖춰 입은 무복으로 보아 정도맹 소속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지긋해 보였고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가의 장문인들인가? 저들이 구 호를? 대체 왜…?’

무인 중 한 명이 물었다.

“모두 제거했소?”

“일단 여기엔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불이 난 직후에 몇 놈들이 도망갔습니다. 우리 쪽 애들도 피해가 제법 됩니다.”

“마교에서 작정을 하고 만든 마령들이오. 애들이라고 손속에 사정을 두어선 안 될 것이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모조리 찾아내서 죽여야 하오!”

“물론입니다, 위지상(韋知上) 문주님.”

대답을 한 무인이 바닥을 차고는 달려갔다.

홀로 남은 무인은 주위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걸음을 돌렸다.

십칠 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녀가 십칠 호를 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왜 숨는 거야?”

“계획을 바꿔야겠다. 이제 우리는 우리 힘으로도 살 수 있을 거야.”

“응. 난 오라버니만 따라갈 거야.”

“그래, 가자.”

십칠 호는 소녀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렸다.

**

소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가슴이 부풀고,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것이 제법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헉, 헉, 헉!”

소녀를 등진 십칠 호는 단단한 어깨를 딱 벌린 채 무인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누구든지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죽여 버리겠다.”

“지독한 놈…!”

무인 세 명이 십칠 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벌써 바닥에 널브러진 무인만 여든일곱 명이었다.

소주위가(蘇州韋家)에서 자랑하는 검풍단(劍風團)의 삼 개 대가 모조리 전멸한 것이다.

게다가 장문인 위지상과 일 공자마저 죽었다.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한 셈.

그것도 저 두 연놈 때문에!

십칠 호는 상처 입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도대체 누가 지독하다는 거냐? 우리를 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거냐! 도대체 몇 년째 우리를 쫓는 거냐!”

“몰라서 묻는가? 네놈들은 마교의 후예….”

“닥쳐라! 우리는 마교도가 아니라고! 그저 납치당해서 온갖 대법을….”

“그래. 그게 바로 문제다. 네놈들이 받은 대법이 훗날 이 강호에 재앙이 될 게 뻔하니까. 본가를 멸문시켰다고 한들 네놈들이 두 다리 뻗고 지낼성 싶으냐?”

“이 겁쟁이들! 그렇다고 우리 같은 어린 아이들을 사정없이 잡아 죽였단 말이냐!”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아?”

무인 하나가 이죽거리듯 답했다.

십칠 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가 허리를 꺾어 들고 포효하더니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로 세 명의 무인 향해 날아갔다.

쉬이이이잇!

“헛!”

무인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지만, 십칠 호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검붉은 마기가 그의 전신에서 풀풀 휘날렸다.

푹! 푹푹!

그는 손에 들린 나뭇가지로 무인 한 명의 목과 가슴 그리고 단전을 연이어 찔렀다.

“컥…!”

무인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십칠 호는 그의 손에서 검을 뺏어 들고는 곧장 두 명의 무인 사이로 날아갔다.

쒸아아아아앙!

검붉은 섬광이 무인들 사이를 스쳤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세상이 조금씩 기울더니 엉망진창으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두 사람이 그대로 고목처럼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하악, 하악, 하악…!”

십칠 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삼 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크아아아아아!”

십칠 호가 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포효를 내질렀다.

천지가 격동할 듯 큰 울림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십칠 호의 눈은 완전히 검은자위로 채워져 있었다.

대법을 완전히 완성하지 못한 마령들의 숙명.

마공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들의 몸은 점점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와락!

순간 삼 호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십칠 호의 포효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괜찮아… 오라버니, 괜찮아….”

삼 호의 간절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크르르르…!”

십칠 호는 검은자위가 가득한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전신에서 폭사하듯 우러나온 검붉은 기운이 차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씨근거렸을까?

십칠 호의 손길이 삼 호의 손등에 겹쳐졌다.

“고맙다.”

“오라버니…?”

“이제 괜찮아. 고마워.”

땀으로 범벅이 된 십칠 호가 웃고 있었다.

그때, 그날의 웃음이었다.

얼굴 가득 그을음을 묻히고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날의 웃음.

이 강호에 득실거리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홀로 빛나는 미소.

“가자꾸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

“응. 난 오라버니만 있으면 되니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수 년 전, 화마가 이글거리는 장원을 벗어날 때처럼.

그들은 그렇게 강호를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이 강호를 벗어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는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이 앞으로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단지 그들은 부정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