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7
귀환 마교관
517화
노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련주님. 제가 망설이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입니다. 혹시나 실수를 해서 련주님이 영영 깨어나시지 못하면 제가 이곳에 꼼짝없이 갇히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좀 더 안전하게….”
“본좌는 일을 진행할 때 결코 시간을 걸지 않는다. 다른 걸 걸어라. 정 걸 게 없으면 자네 목숨을 걸어.”
“련주님….”
추희룡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 공간은 련주전 후원 지하 오 장 깊이에 파묻혀 있는 공간이다.
애초에 출입구는 없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방진, 방음 설계까지 완벽하게 해두었다.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이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자신과 자귀 그리고 눈앞의 노인밖에 모른다.
공사를 진행했던 자와 설계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살인멸구 했으므로.
때문에 만약 자신이 의식을 진행하다가 죽을 경우에는 노인을 꺼내 줄 사람이 없다.
무공도 변변찮은 이 연약한 노인이 이 공간을 혼자서 벗어날 방법은 없으므로.
아, 하나의 방법은 있다.
하지만 그 마지막 하나의 방법마저 추희룡은 지금 없앨 생각이었다.
그가 품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들고 말했다.
“이게 뭔지 아는가?”
“모, 모릅니다.”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두루마리지. 믿거나 말거나 본좌는 오늘 이 한 장만 들고 이곳에 들어왔네. 자네가 여기서 나갈 방법은 이 기물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없다. 아니면, 내가 자네를 구해 주거나.”
“련주님 부디….”
화르르르륵.
순간 추희룡의 손에 들린 텔레포트 스크롤이 불길에 타올랐다.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아예 두루마리 전체를 태워 버린 것이다.
추희룡이 히죽 웃었다.
“이제 이곳에서 나갈 방법은 없다. 물론, 본좌 정도의 무공 수위라면 이 벽을 부수고 오 장 깊이의 땅을 파헤쳐 지상까지 오를 수도 있지. 하지만 자네는 불가능해. 선택하게. 내게 마령혼을 이식할 것인지. 여기서 내 손에 죽을 것인지.”
추희룡의 전신에서 살기가 우러나왔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련주님 진정하시고….”
“결국 장렬한 죽음을 선택한 거군. 술법가는 다시 구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추희룡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 순간!
꽈과아아앙! 짜르르르릉!
천지가 격동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바닥과 천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추희룡이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지?’
그의 시선이 노인에게 향했다.
한데 노인은 마치 안도라도 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네 이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추희룡이 뭔가 낌새를 채고 소리치자, 노인이 전에 없이 싸늘한 웃음을 짓더니 대꾸하는 게 아닌가?
“네 집 안마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 나한테 묻는고?”
“뭐, 뭣이? 이 영감이 미쳤나!”
추희룡이 버럭 소리 지르며 재빨리 일장을 내뻗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 일장을 정통으로 맞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일장이 노인의 얼굴을 갈기기 직전,
쩌어어엉!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더니 노인이 뒤로 훌쩍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실드였다.
그걸 본 추희룡이 눈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이놈! 마령교도였구나!”
“킬킬킬! 그러게 꼼꼼히 조사를 했어야지.”
“흥!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추희룡이 경신법을 펼쳐 단숨에 노인에게 날았다.
생각보다 빠른 반응에 노인이 헛바람을 삼키며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헛!”
투까앙!
추희룡이 휘두른 검이 벽에 부딪치면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제법이군!’
노인이 성큼성큼 물러나서는 천천히 고쳐 자세를 잡았다.
그걸 본 추희룡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마령공을 익혔구나!’
실제로 노인은 지금껏 마령공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아직까지 ‘마나’라는 기운이 생소한 추희룡은 미처 노인의 무공 수준을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때, 노인의 시선이 힐끗 옹기승에게 향했다.
찰나지간,
타앗!
추희룡이 바닥을 차며 쏜살 같이 날아갔다.
쒸에에에엑!
한 줄기 섬광이 무서운 속도로 노인의 가슴으로 짓쳐들었다.
“방호!”
노인이 소리치자 그의 앞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쩌카앙!
실드가 깨지면서 추희룡의 몸이 휘청 물러났다.
하지만 그래도 사파를 대표하는 련주였다.
추희룡의 무위는 노인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강했다.
촤아앗!
그가 얼른 보법을 밟으며 중심을 잡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러 왔다.
쒸에에에엑!
횡으로 그어지는 섬광을 보며 노인은 죽음을 직감했다.
‘제길, 방심했구나!’
허무극이 물러난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한 추희룡이었기에 조금 얕잡아 본 게 사실이었다.
마침 날아드는 섬광에 목을 잃기 직전,
꽈자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요란한 폭음에 이어 천지가 격동하는 듯했다.
거침없이 날아들던 섬광도 순간 주춤거리며 검로가 흐트러졌다.
노인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얼른 몸을 낮게 숙이고는 재빨리 일장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화염공!”
쉬르르, 퍼어엉!
“크읏!”
추희룡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물러났다.
아랫배 쪽의 장삼이 훌렁 타버린 채로 잿더미가 되었다.
“제길…!”
추희룡이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운기하자 전신에서 사기가 휘몰아치더니 너덜너덜한 장삼 자락을 훌렁 태워 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영감… 나를 화나게 하는군!”
그때,
“그렇다면 임무에 충실했구나.”
갑자기 등 뒤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추희룡이 슬쩍 돌아보는데, 노인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찧었다.
“존야를 뵙습니다!”
“수고했네. 황노(黃老)”
‘존야’라 불린 소녀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추희룡을 보았다.
추희룡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게다가 존야라 불린 소녀 뒤로는 검은 갑옷에 투구를 쓴 기사들이 엄청난 위압감과 함께 서 있었다.
“자네가 혈사련주인가?”
**
블링크와 천해심보를 번갈아 시전하며 빠르게 내달리던 사비강은 어느 순간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몸을 흠칫 떨었다.
‘뭐지?’
조금 전에 들린 폭음은 예삿소리가 아니었다.
들려온 방향을 보면 분명 혈사련!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스팟!
사비강의 신형이 다시 감쪽같이 사라지더니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렇게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한 그가 혈사련 정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차창! 깡! 까앙!
혈사련 안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잡하게 뒤섞여 들려왔다.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은 모두 그곳으로 지원을 간 것인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꽤나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것이 옹기승과 관련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비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팟!
그가 얼른 전각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붕을 따라 이동하는 혈사련 무인들이 다수 보였다.
누군가 사비강을 보고는 소리치며 돌아섰다.
“엇! 거기 누구냐!”
쉬이이이잇!
하지만 사비강은 대답 대신 그들 사이를 천해심보를 이용해 스치듯 지나갔다.
휘이이잉!
사비강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저 바람 한 줄기만 불 뿐이었다.
“어…?”
무인들은 조금 전만 해도 눈앞에 서 있던 사비강이 사라지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두리번거렸다.
“뭐지?”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저만치 앞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엇! 저기다!”
혈사련 무인들이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사비강은 곧장 련주전 지붕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무인들이 그 뒤를 쫓으려는데, 누군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멈춰라!”
무인들이 힐끔 돌아보니, 월섬당주 소천악이 사비강을 보며 말했다.
“사비강 궁주님이시다. 적이 아니니 쫓을 필요 없다.”
그제야 무인들이 긴장을 풀었다.
한편 사비강은 눈 깜빡할 사이에 련주전 지붕 위에 다다랐다.
이미 련주전 지붕 위에는 실력 있는 궁수들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긴 채 누군가를 겨누고 있었고, 암기를 사용하는 무인들이 여차하면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중 궁수들을 이끄는 광살대주(光殺隊主) 현무룡(玄武龍)이 사비강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엇! 당신은….”
[쉿. 무슨 일인지만 말해라.]
사비강이 전음으로 주의를 주자, 현무룡 역시 더는 호들갑을 떨지 않고 전음으로 보고했다.
[정체불명의 소녀가 련주전 후원에 침입했습니다.]
[소녀가…?]
[예, 마족 기사로 보이는 자들을 대동했습니다. 무공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서는 반로환동한 자가 아닌가 합니다.]
‘설마 존야가…?’
사비강이 궁수들 사이를 비집고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이미 많은 무인들이 피범벅이 된 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왼편으로는 열 명의 마족 기사들과 소녀, 노인이 보였고, 오른편에는 다소 지쳐 보이는 추희룡과 그를 호위하는 호신위들이 있었다.
그리고 추희룡이 인질처럼 잡고 있는 한 사람.
바로 의식을 잃은 옹기승이었다.
‘역시….’
후원 한쪽 바닥이 움푹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제 막 그곳에서 올라온 듯했다.
‘저건 존야가 파헤친 건가?’
아마도 이곳으로 올 때 들었던 폭음은 저 구멍이 생기면서 일어난 것이리라.
존야가 추희룡을 빤히 보며 말했다.
“그 애를 순순히 넘겨주게. 그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돌아가지.”
“그냥 순순히 돌아가라. 그럼 이 녀석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지.”
존야가 피식 웃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반대로 묻고 싶군. 그럼 네년이 한 말을 본좌가 믿으라는 건가?”
“할 수 없군. 난리를 원한다니….”
존야가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흑기사들이 성큼 나서려고 하자,
차앙!
추희룡이 검을 꺼내들고 옹기승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녀석도 죽고 네놈들도 죽는다.”
“그러시든지.”
존야는 일절 상관없다는 듯 턱짓을 했다.
추희룡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대책 없는 새끼들이…!’
흑기사들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현무룡이 재빨리 수신호를 내렸다.
패패패패패앵!
쒸쒸쒸쒸쒸에엑!
수백 자루의 화살이 흑기사들을 향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후아아아앙!
순간 흑기사들을 둘러싸면서 반투명한 막이 형성됐다.
투타타타타타타탕!
철판에 콩 볶는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쳐라!”
자귀가 명을 내리자, 호신위들이 일제히 흑기사들에게 부딪쳐 갔다.
그때,
“잠깐!”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혈사련 무인들은 물론, 흑기사들 역시 주춤거리면서 고개를 꺾어 들었다.
사자후를 터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
처마 끝에 서 있던 그가 히죽 웃었다.
“우리 애를 데리고 너희들이 왜 서로 데려가겠다고 난리냐?”
쿵!
그의 신형이 뚝 떨어지자, 주변으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사비강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우리 애는 내가 데려가야겠다.”